1987년 12월 대선, 1991년 6월 지방선거(광역의회), 2026년 63서울시장 선거 - 길거리 시위와 선거 (한국 정치)
페이스북에 방금, 1989년에 시위 장면 사진이 떴다. 9월인데, 화염병이 있어서 약간 놀랬다. 의무경찰 (군입대->시위대 막는 경찰 복무 제도)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89년에는 그 이전과 달리 화염병 제작,운반,투척하면 '실형'을 살았다.
1989년 5월 부산 동의대 학내 시위 당시, 학교 건물 안으로 전경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작전을 세웠다 (이것은 시위대 진압에 대한 잘못된 전술임)
전경과 시위학생이 건물 안에서 대립하다가, 6명의 전경이 화염병 불에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5월 이후, 노태우 정권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극렬히 탄압했고, 조직사건들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치떨리는 김기춘 검찰총장시절이었다.
비폭력 시위를 하자, 비폭력 시위는 노태우정권에 대한 굴복이다, 화염병 대신 '돌'만 사용하자, 학내 대자보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길거리 화염병 시위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길거리 시위와 학내 시위에서 '화염병 사용량'은 줄고, 대신 돌멩이 사용량은 증가해, 학생들의 어깨 근육은 다 망가졌다. 비폭력 시위로 잡혀가는 숫자도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의 '백골단 쇠파이프 사망'까지 지속되었다. 서울 시내는 해방구였다. 신촌 연세대에서 명동 성당까지, 신세계 백화점, 한국 은행 앞 광장까지, 전경들을 해산시킬 정도로 시위대 숫자는 많아졌다.
1991년 6월 3일,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대를 방문했을 때, 외대 학생들이 정총리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퍼붓고, 옷을 찢는 사진이 일간지 1면에 실리기 전까지, 5주 넘게 대규모 시위가 서울을 뒤덮었다.
길거리 시위 '출구 전략'을 짜야했지만, 답도 없었고, 중단할 수도, 정리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한국외대 정원식 사건은, 5주 넘는 그 서울의 해방구를, 단번에 싸늘하게 뒤엎어버렸다.
1991년 6월에, 1961년 박정희 516군사 쿠데타 이후 중단된 지방 광역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노태우와 민자당의 압승이었다. 총 866중, 민주자유당이 564석, 신민주연합당이 165석, (노무현 꼬마) 민주당이 21석, 무소속이 116석. 최동원 (야구선수)이 부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시위대 인파가 집결한 게 1991년 4월 28일부터 1991년 6월 3일까지이다. 그러나 정원식 폭행 사건을 계기로, 시위는 정리되었고, 6월 지방선거는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1991년은 민주노동당이나 정의당,녹색당,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도 없었기 때문에, 길거리 시위와 '정당'의 선거와의 상관관계도 연구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1987년 12월 대선에서 패배와, 1991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 압승의 교훈은, 대규모 시민 항쟁이 곧바로 '선거의 승리'나, 보수파의 '퇴진'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87년 12월 충격만큼 91년 6월도 큰 충격이었다. (정치적 숙제였다)
5월 어느날인가, 서울 시내 모든 대학들 (4년제, 전문대 다 합쳐서)이 명동,서울시내로 집결하기로 했다. 서울대를 출발해, 숭실대를 지나, 이화약국, 김영삼 집을 거쳐, 터널 위 산을 넘어, 노량진 한강대교를 줄지어 도강했다. 김영삼 집 근처와 터널 위에서 전경들과 싸우기도 했다. 1학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3명씩 조를 짜서 움직였다.
2만명 중 7~10%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을 것이다. 당시 전문대와 종합대학을 합쳐 대략 서울시내 40만 재학생이었으니, 3만~4만명이 학교에서 쏟아져 나왔다.
용산, 삼각지, 숙대입구 역을 넘어, 서울역까지 진군했다.
그 날은, 1945년 이후,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일 것이다. 인산 인해였고, 전경들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을 포기했다.
시위대 쪽으로 넘어와버린 전경들에게 물을 먹여주곤 했다.
화염병 처벌법이 강화된 이후, 길거리 시위는 5분 안에 백골단과 전경에 의해 진압되거나 해산되곤 했었다. 그러나 91년 5월의 시위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6시간에서 10시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6월 3일 외대에서 벌어진 정원식 폭행사건 이후, 조선일보와 보수 언론은 '시위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부쳤고, 시위의 윤리적 토대가 약화되었다.
호시탐탐 역전의 기회를 노리던 노태우 정권에, 외대학생들의 정치적 실수를 뭐라고 해석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
서울시내를 해방구로 만들었지만, 서울 시민사회의 보수적 성채는 해방구로 만들지 못했다. (89년 길거리 시위 사진을 보다 메모)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의 결과는 1987년 12월 대선이나 1991년 6월 지방선거(광역의회)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거대한 윤석열 탄핵 시위를 생각하면, 지난 2년간, '절차적 민주주의 ' 요소인 선거법, 정당법, 헌법 하나 제대로 바꾸지도 못했고,
결선투표제, 비례대표제도 바꾸지 못했다, '후보 단일화'만 24시간 365일 앵무새처럼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다.
현행 게임규칙을 위반한 것에 대한 저항과, 게임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과는 다르다. 그 간극을 내년이면 40년 봐왔다.
1987년 6월의 40주년, 2017년 6월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