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dec 14.
1922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사설. 빈자에게 주택공급. 주택구제회의 사업.
빈자(가난한 자), 빈민구제는 자선을 베푸는 것이고, 사회공동체의 '맛당한 (마땅한)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설. (지난 40년간 보수일간지로 타락한 동아일보와는 사뭇 다름)
국가와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을 '어찌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대목이 이채롭다.
'서울과 수도권' 공간, 주택정책을 한국근대사 속에서 한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사회주택 social housing'은 영국이 가장 강력하게 추진해왔는데, 그 이유는 칼 막스(마르크스)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엘스(Engels : 발음은 엥-엘스임)가 당시 25세 나이로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년)"같은 훌륭한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주택문제는 일제시대 '경성'부터 시작하니, 거의 100년이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어떠했는지, 동아일보 사설을 검토해 봅니다.
1931년 6월 22일 동아일보 요약: 당시 서울 조선인 90%는 무주택자. 주택난 대안, 주택조합운동을 펼쳐라 + 주택 임차인을 보호할 '차가법 借家法 ) 제정하라 !
주택난과 주택조합 : 1931년 6월 22일 동아일보 사설
1. 현대생활에서 인민의 요구란, 농촌에서 토지 요구, 도시에서 주택요구이다.
농촌에서는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민으로 전락함.
도시에서는 소시민이 주택을 잃고 유랑민으로 전전함.
통계가 명확치 않아 가난한 소시민의 곤궁함을 추측만 할 뿐.
2. 당시 서울(경성시), 양호한 주택는 전체 주택의 20% 미만이다.
조선인의 90%는 자기 집이 없었다.
조선인들은 가혹한 임대료 제도 때문에, 1평 남짓한 한 방에 5~6명이 사는 참담한 생활을 영위.
시민생활에 가장 큰 위험요소는 전염병이다. 보건 위생상태가 좋지 못한 주거 환경에서 발생하는 질병 문제는 심각함.
조선의 출산율은 높지만, 유아 사망률이 세계 1위인 이유는 주택난 때문.
여름에는 불쾌한 냄새. 길 옆에 가마니 같은 것을 깔고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어찌 도시인의 수치가 아니랴’ 고 신문은 적고 있다.
-불황과 임금 삭감.
3. 대안
조선총독부 공무원들 중, 집주인의 횡포에 분개해 ‘산업조합령’에 근거해 주택조합을 만든다.
노량진 국유지를 1원~2원 정도 불하받고 국가에서 돈을 융자받으려고 한다. 선금 300원을 내면 1가구를 소유할 수 있고, 그 후는 3000원짜리 100가구를 건설하려 한다.
건축업자의 횡포와 폭리 심각.
고립대금업자와 악랄한 집주인.
도시 빈민에게 경성부와 국가가 주거시설을 공급해야 한다.
선진 사회에서는 국가나 공공단체가 솔선수범하여 시민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의 경성부 (서울시)는 겨우 부영주택만 경영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시민의 생활이 향상되지 않는다.
조선인들이 주택조합 운동을 펼쳐야 하고, 국가와 공공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임시적으로 차가법(借家法 – 주택 임차인 보호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부영주택 = 경성부가 직접 건설하는 일종의 공공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