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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1999년 12월 22일 경향 신문. 효봉 스님의 법어 "너나 잘 해" 의 문제점. 그리고 대중의 권위를 얻기 위한 '신화'는 필요없다.

by 원시 2023. 2. 9.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광주고등학교 육교 앞 헌 책방에서 사서 읽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법정 스님의 선생이 효봉 스님이라고 해서 관련자료를 읽다가 몇 가지 느낀 점.

 

1999년 12월 22일 경향 신문. 효봉 스님의 법어 "너나 잘 해" 의 문제점. 

 

중생을 교화한다는 스님들에게 쓰던 말이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너나 잘 해'는 정치적 지혜가 담긴 말은 아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말처럼, 완벽한 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알겠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동료 인생들 속에서 '나', 그 경계선에서 '나', 그리고 그들과 분리된 '나', 이런 3가지 세계에 대해서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아이고, 참된 자유를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나 잘 해'라는 식은 원자론적 (atomistic) 사유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혜암 종정의 신년 법어 "허망한 나를 버리고, 이웃들과 협조하여, 둥근 해가 밝게 비추는 좋은 세상".

왜 '인간'의 본성이나 활동, 삶의 의지를 '허망한 나'로 표현했는가? 어떤 선행에 대한 강력한 실천의지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허망한 나'에 대한 강조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는 늘 '허망한 존재'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늘 '선하거나 '허망한' 반대말 '충실한, 충만한' 나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허망한 나는 버리고, 충만한 나는 보존해서, 이웃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해 원죄의식을 집어 넣는 그런 전제는 이제 불필요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고, 자연 세계, 사회 세계, 자기 자신의 심리적 세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고쳐나가고 혁신해 나가고, 또 보존하려는 의지와 행동 자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2. 한국 불교계나 다른 종교 단체들 수장도 늘 '서울대'나 혹은 어떤 유명 대학, 혹은 특정 직종을 강조하는가?

아무래도 '대중들'을 결집시키고, 제사장과 정치의 수장 역할을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필요해서일까?

한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학력이 높은 사회에서, 이제 굳이 학력 위조를 통해 대중의 권위를 확보할 필요도 없다.

 

깨달음은 굳어버린 '신화'를 깨뜨리고, 자연, 사회, 내 마음과 연결된 나의 진심을 바라볼 때 조금이나마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신화'를 깨라고 했더니, 자기 만의 '신화'를 자기보다 더 못나거나 잘난 사람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대중교육, 초,중,고,대학 교육의 발달로, 교화의 대상이 되어야 할 중생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배워야하는 시대이다.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시대에 그 이전에는 나이 5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벼농사, 하나만 짓다가, 혹은 숭어나 꼬막만 캐는 '단일 업종'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공간적으로 한 지역에서만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편견에 사로잡혀 살거나 부정확한 지식과 정보로 살아가기도 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80억 인구의 삶을 '간접적'으로라도 체험하고, 나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80억 인구 자체가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해석해주고 해석을 받는 시대이다.

 

'권위'와 '신화'는 이제 필요없다. 그냥 내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한인섭-  
[효봉 스님이 판사였다고?]
효봉스님 이야기...판사였다가 승려가 된 반전스토리는 국민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속명은 이찬형. 효봉스님은 조선조 말인 1888년 평남 양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사서삼경을 배웠고 14세에 평양감사가 개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한다. 

 

후에 명문인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26세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법관이 된 분으로 유명하다. 

 

효봉스님은 일제치하에서 10년간 (1913~1923) 법관생활을 하면서 고통과 회의를 느끼면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1

 

923년 36세에 평양복심법원 판사직을 수행하던 그는 10여년의 판사 생활 중 처음으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사흘 밤을 새우며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너무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 그런데 fact check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부분보다, 그의 학력, 경력에 대한 것입니다.


-와세다 대학 유학, 법학 전공: 와세다대학 명부를 보면 그런 인물 없음. 당시 유학생이 극소수였던지라, 명단 보면 간단히 확인됨.


-졸업하여 귀국하면 판사? 1913년 무렵에는, 조선인으로서 시험  통한 신규판사(법조인)의 길이 봉쇄되어 있었음. 


-최초의 판사? "최초"글자 좋아하는 한국인의 취향을 잡아당기나, 1910년 일제 지배의 첫 단계에서, 조선인으로 판사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판사하게 해줬음. 따라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누구에게도 쓰기 부적합함. 


-1923년 즈음, 평양복심법원에 그런 판사 없음. 조선인 판사는 극소했고, 대부분이 일본인 판사.


-그럼 뭔가? 위의 글은 연도, 학력, 경력이 세밀하여 사실 그 자체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친일인명사전>, <조선총독부관보>에도 이찬형이란 이름의 판사는 없음. 

 

<한국유학생운동사(조도전대학 우리동창회 70년사)>, <한국법관사> 다 뒤져봐도 그런 이름 없고, 그런 판사 없음. 


-Conclusion: 판사  운운한 수백명 이상의 글쟁이들은 사실검증해볼 시도한번 않고 그냥 씀. 

우리 역사적 사실 중에 그런 것 너무 많음. (내 fact check는, 다른 분들의 새로운 evidence 나오면, 즉각 수정할 것임). 


-효봉스님은 고승대덕이시니,  세속과의 대비법으로 각색시킬 필요가 없음. 


-산은 산, 물은 물, 판사는 판사, 스님은 스님.

 

 

 

 

 

 

 

와세다 대학 동창부 - 한인섭 제공

 

 

 

1999년 언론보도. 동아일보.

 

1999.nov 20.

 

 

 

1999.nov. 24

 

 

 

관련 기사.

 

효봉스님은 판사 아니었다

:1999-11-20 00:00ㅣ

 

 


‘일제 초기 최초의 조선인 판사로 알려진 효봉(曉峰·1888∼1966) 스님은판사가 아니었다’ 경기도 이천 지족암에 한거하고 있는 혜봉(慧峰) 스님은 최근 발간한 ‘종정열전’(가람기획)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효봉 스님의 판사이력을 부정,주목을 끈다.

효봉 스님은 한국인 최초의 판사로 임용돼 평양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 재직하다가 사직서도 쓰지않고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연보와 그에 관한 기록엔 빠짐없이 판사이력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혜봉 스님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직원록’ 등 관련문헌을 훑어봤지만 효봉(속명 이찬형) 스님이 판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혜봉스님은 ‘한국법관사’(1981년 법원행정처)의 법관 명단,‘조선총독부직원록’(1911∼1925년 조선총독부)을 샅샅히 훑었지만 효봉 스님의 속명인이찬형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 온 일본인 판사가 함께 판사로 활동했던 이홍종을 효봉 스님과 착각했거나 스님의 연보 등 문헌이 처음부터 잘못됐을것이라는게 혜봉스님의 주장이다.

김성호기자
1999-11-20 

 

 

‘판사스님 효봉’은 와전된것?
문화일보
입력 1999-11-19 09:21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로 판사를 지내다가 사형선고를 내린 것에 인간적 회의를 느껴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전설적 선승으로 알려진 효봉(曉峰.1888∼1966)스님의 판사 경력은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왔다.

경기도 이천 지족암에서 불교 전기학(傳記學)을 연구해온 혜봉(慧峰)스님은 최근 펴낸 ‘종정열전’(가람기획)에서 “‘조선총독부 직원록’ 등의 관련문헌을 뒤진 결과 효봉스님의 속명인 이찬형(李燦亨)이 판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효봉스님이 판사 출신 승려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33년 유점사에 온 평양복심법원 일본인 판사가 유점사 주지에게 발설한 소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혜봉스님은 “당시 일본인 판사가 함께 근무한 조선인 판사 이홍종을 이찬형으로 착각해 잘못 전달했거나 아니면 애초 스님의 연보 등 문헌이 잘못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홍종은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특별임명된 조선인 판사로서 1923년 평양복심법원 판사직에서 퇴직한 인물로, 그 역시 조선인 최초의 판사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효봉스님의 속명이 이찬형이 아니라 이홍종이라고 가정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 경우 지금까지 알려진 본적을 비롯해 출생에서 출가까지의 가족관계 등 스님의 생애 전반부인 속가 이력이 전면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혜봉스님은 효봉스님의 상좌인 법정(法頂)스님의 말을 인용해 “효봉스님은 출가후 이원명(李元明)이라는 속명을 쓴 적이 있고, 스님이 입적하기 사흘 전에 장손자라고 밝힌 이인목(李仁穆)씨에 의해 이찬형이란 속명이 밝혀졌지만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혜봉스님은 “효봉선사의 출가 전 경력이 ‘판사’였든 아니면 ‘조실부모한 엿장수’였든 1925년 출가후 선사가 보여준 치열한 구도정신과 ‘절구통수좌’(한번 좌선을 하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진했다는 수행이력에서 붙은 별명)로서 문없는 토굴속에서 정진해 오도(悟道)한 선승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판사 출신 승려였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한미(寒微)한 신분의 조실부모한 엿장수가 선수행에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종정을 두번씩이나 역임한 한국불교계 최고지도자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좌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땅의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와닿을 것”이라는 게 판사이력 시비에 대한 혜봉스님의 최종결론이다.

 

 

 

한겨레 신문 조헌 기자.

 

법정 스님은 왜 기독교인 함석헌과 함께했을까
등록 :2021-09-29 11:46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 법어 ‘효봉 노트’ 발간

 


효봉과 평양고등보통학교 후배 함석헌 사진 ‘발견’
제자 법정과 함석헌 1970년대 민주화운동 동지로

 

 


조계종이 불교 통합종단으로 발족한 1962년 통합종단 첫 종정으로 추대된 효봉 스님(1888~1966)의 생생한 법어가 70여년 만에 되살아났다. 제자들이 스승 몰래 녹취해놓은 글이 <효봉 노트>(어의운하 펴냄)로 발간됐다.


효봉은 일본 와세대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평양 등에서 판사로 일했다. 사형 판결에 대한 깊은 회의로 판사복을 벗어던진 뒤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늦은 나이인 38살에 출가했으나 좌복에 엉덩이살이 눌러붙을 정도로 정진해 ‘절구통수좌’로 불렸다.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할 때 성철, 일타, 탄허 같은 선승들이 그를 따라 모여 수행했고, 송광사 방장 자리를 이은 구산 스님, 무소유의 법정 스님, 고은 시인 등이 효봉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시인 고은은 이 책에서 스승에 대해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효봉은 1956년 시자 한명만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가서 한철 정진을 했다. 그때 효봉을 모신 시자가 법정 스님이었다. 

 

법정은 훗날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와 같아서 시자들과 장난도 곧잘 치고 자비롭기 그지 없었다”고 회고하면서도, 시줏물을 낭비하는 것엔 엄중했던 스승의 면모를 이렇게 전했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 앉기 전엔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살림이라고 금강산 시절부터 쓰던 다 닮아진 세숫비누를 쌍계사 탑전에 와서도 쓸 만큼 철저했다. 무더운 여름날 단 둘이 앉아서 공양을 하면서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죽비를 쳐서 심경(식사 전 외우는 글)을 외우면서 엄숙히 음식을 먹었다.”


<


<효봉 노트>엔 선원 수좌들이 ‘3개월 집중수행’(안거)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한 서릿발 같은 법어가 담겨 있다.


“금부처는 화로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견디지 못하며,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견디지 못한다. 그 세 부처는 참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대중은 화로와 불에도 녹지 않고, 물에도 풀리지 않을 참부처를 제각기 조성하라.”


“모든 법은 다 마음으로 된 것이니, 지옥과 천당도 마찬가지다. 만일 지금 무심으로 분별망상을 내지 않으면 천당도 지옥도 없으며, 너도 나도 없고, 탐욕도 성냄도 미움도 사랑도 없어 본래 청정한 자성이 바로 나타날 것이다.”


이 책 말미의 일대기엔 효봉이 이승만 대통령 생일 때 조계종단 대표로 다른 종교 대표들과 함께 경무대로 초대받았을 당시 일화도 나와 있다. 

 

고관대작들의 인사를 받던 이 대통령은 효봉이 들어오자 일어나 손을 잡고 앉을 자리를 권하며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하고 물었다. 효봉은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한참이나 ‘생불생 사불사’를 되뇌었다는 것이다.


<효봉 노트>에 실린 효봉(왼쪽) 스님과 함석헌(오른쪽)의 사진. 효봉의 제자인 법정 스님은 함석헌과 막역한 사이였다. 어의운하 제공


<효봉 노트>에 실린 효봉(왼쪽) 스님과 함석헌(오른쪽)의 사진. 효봉의 제자인 법정 스님은 함석헌과 막역한 사이였다. 어의운하 제공

 


이 책엔 효봉과 사상가 함석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법정은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에 송건호(<한겨레> 초대 사장) 등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그동안 왜 법정이 기독교인 함석헌과 그처럼 막역하게 지내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효봉은 평양고등보통학교 1기, 함석헌은 같은 학교 8기로 선후배 사이였다고 한다. 

 

사진에선 함석헌이 무릎을 꿇고 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효봉을 바라보고 있다. 함석헌과의 인연은 법정의 스승대부터 이어져온 셈이다.

 


법정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그만두고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은거할 때 함석헌이 찾아와서 하룻밤 자고 간 것을 두고 “하루 한끼밖에 안 드시는 어른에게 밥을 해드리지 못하고 감자를 삶아드린 일이 두고두고 후회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언론보도 . 효봉 스님. 한국 선불교 계보. 한겨레 신문. 1999년. 12.25

 

 

 

 

 

1999년 12월 22일 경향 신문. 효봉 스님의 법어 "너나 잘 해" 

 

중생을 교화한다는 스님들에게 쓰던 말이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너나 잘 해'는 정치적 지혜가 담긴 말은 아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말처럼, 완벽한 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알겠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동료 인생들 속에서 '나', 그 경계선에서 '나', 그리고 그들과 분리된 '나', 이런 3가지 세계에 대해서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아이고, 참된 자유를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나 잘 해'라는 식은 원자론적 (atomistic) 사유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혜암 종정의 신년 법어 "허망한 나를 버리고, 이웃들과 협조하여, 둥근 해가 밝게 비추는 좋은 세상".

왜 '인간'의 본성이나 활동, 삶의 의지를 '허망한 나'로 표현했는가? 어떤 선행에 대한 강력한 실천의지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허망한 나'에 대한 강조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는 늘 '허망한 존재'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늘 '선하거나 '허망한' 반대말 '충실한, 충만한' 나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허망한 나는 버리고, 충만한 나는 보존해서, 이웃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해 원죄의식을 집어 넣는 그런 전제는 이제 불필요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고, 자연 세계, 사회 세계, 자기 자신의 심리적 세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고쳐나가고 혁신해 나가고, 또 보존하려는 의지와 행동 자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