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사. 이난영은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초등학교도 중퇴해야 했던 이난영과 이봉룡 오누이였다.
제주도 청심관이라는 영화관에서 막간 가수로 일하다가 그 영화관 주인의 추천으로 가수의 길을 갔다.
목포 고향집 아버지의 가난과 술주정 때문에 어머니가 제주도 청심관 주인집 가정부를 하고 있었다.
목포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제주도로 간 이난영(이옥순)이 경성으로 가게 되어 불사조를 히트시켰다.
하춘화보다는 나이가 많고 아이유보다는 더 적은 십대 중반이었다.
이난영의 길에 일제시대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온갖 상처 투성이였다.
이난영과 그 오빠 이봉룡 (목포는 항구다 작곡가) 모두 일제 동원령에 굴복했다.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 작곡가도 일제 동원령에 협조했다.
반대로 이난영은 일제 관헌의 말에 저항하기도 했다. 조선의 상징 의복 한복을 입고 목포의 눈물, 불사조를 불렀기 때문이다.
대중가수의 길과 정치적 현실과의 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정치적 단죄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관계가 존재했다.
이난영 신문 자료를 보다 느낀점.
1933. 12. 27. 대구 자선 공연. 오케 레코드 사 주최.
자료.
1936.04.08. 조선일보.
작곡자 김해송 고복수, 재즈
가수 이난영, 나품심, 김연월, 강남향 소개.
대중 재즈를 소개했다.
1936. 04. 09 조선일보. 재즈 공연 보도.
1939년 4월 8일자.조선일보. 조선악극단.
1948년. 5.15. 국산품 음반 기업. 김해송, 장세정, 이난영. 오케 레코드 사.
1948. 09. 01. 이난영 자살 미수 사건 보도 (동아일보)
소양강에 몸을 던진 이난영. 백사장에 "나는 갑니다. 김해송"을 남겨. 투신 자살 시도.
순행 경관이 이난영을 구출했다. (춘천)
칼멘 오페라 공연. 이난영 "집시의 노래"
1950년 1월 7일자.
1954년 8월 30일자. 경향 신문 광고. 이난영 악단 공연.
1955년 4월 11일자. 경향 광고. 혁신적 감성 클럽
1965년 4월 11일 자택에서 사망. 4월 13일자 조선일보
신경과민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동료 후배 가수 장세정 씨 인용 보도.
이난영의 딸 김숙자 (김시스터즈)씨는 어머니 이난영의 사망 소식에 졸도. 미국에서.
1965년 4월 12일자 경향 신문. 이난영 사망 소식.
일제시대, 이난영이 공연할 때, 조선인들 앞에서 한복을 입고 노래를 했는데, 일본 관헌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난영에게 한복을 입지 말라고 했는데, 이난영이 이를 무시하고, 한복을 입고 노래했고, 조선인들은 이난영의 노래에 감동했다.
이난영이 일본측의 요구를 듣지 않아, 경범죄로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고 함.
이난영 다큐 2009년.
https://youtu.be/uUed3Cjskt8
신동아
문화생활[노래가 있는 풍경]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이난영 ‘목포의 눈물’
입력 2015.07.22 / 671호(p464~470)
목포는 이난영으로 대표되고 기억된다. 한국인은 목포를 생각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목포의 눈물’을 떠올린다. 그래서 목포는 이난영 때문에 동경과 그리움의 항구가 된다. ‘목포의 눈물’은 좁은 한반도에서 악다구니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년시절 고향집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노래다.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순전히 개인적인 주장 또는 감상이다. 유년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클레멘타인’ 이다. 1960~1970년대에 꽤나 유명하던 노래다.
“엄마 엄마 내 죽거든 뒷동산에 묻어줘/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줘….”
어릴 적,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많이도 따라 부르던 구전 동요다. 고무줄, 공기놀이에 맞춰 불리던 이 노래가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에서 곡조를 따왔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영문과 여자 교생선생님이 칠판에 가사를 써놓고 우리더러 따라 부르게 했다. 교실 뒷자리에 앉은 짓궂은 친구들은 일부러 음정을 틀리게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교생선생님은 송골송골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열심히 가르쳤다.
한국판 클레멘타인?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교실 옆에는 요즘은 보기 드문 샐비어와 칸나 꽃이 흐드러지고, 그 향기가 창문을 넘어오던 어느 여름, 까까머리들은 교생선생님의 맨손 지휘에 맞춰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다. 장난기에서 시작했다가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로 이어지며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달할 때쯤이면, 싱숭생숭하던 꿈 많은 사춘기, 어떤 녀석들은 제풀에 눈시울도 조금 붉어졌다.
그랬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잔한 멜로디와 슬픈 노랫말 덕에 노래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로 시작되는, 한국인의 정서에 딱 떨어지는 우리말 가사는 박태원이 번안해 보급했다. 그는 ‘오빠생각’으로 유명한 작곡가 박태준의 친형으로 이 노래를 ‘스와니 강’과 함께 3·1운동 직후 이 땅에 소개했다고 전한다.
나는 애상적인 ‘클레멘타인’과 기막히게 딱 떨어지는 노래가 이 땅에도 하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목포의 눈물’이다. 왜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이 바다 건너 먼 나라 민요 ‘클레멘타인’처럼 여겨지는지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굳이 부연하자면, ‘클레멘타인’은 1800년대 중반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삶을 살던 개척민의 슬픔이 밴 노래라 일제강점기 헐벗은 식민지 백성들이 목메어 부르던 노래의 정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결국 노래에 관한 나의 편향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을 배우기 훨씬 전,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내 유년시절, 어머니는 동구 밖 시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 왔다. 머리에 이고 온 젖은 옷을 말리려고 마당 한 곳의 빨랫줄 바지랑대가 낮아지고, 어머니는 거기에 빨래를 널면서 당신의 애창곡인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를 불렀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치마를 끌며 흉내 내기에 바빴다. 바지랑대에는 고추잠자리가 선명하고 텃밭의 과꽃이 오후 햇볕에 졸고 있던 어느 더운 여름날의 풍경이다.
유년시절과 ‘중년 증상’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상하게도 어제 일은 생각나지 않는데 아득한 과거의 일이 어제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주변에선 이를 ‘중년 증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 시절 지겨울 만큼 부르던 ‘클레멘타인’은 이제 섭섭하게도 더 이상 이 땅에서 잘 들리지 않아 기억 속 노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끔 술자리에 이어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을 때 불현듯 또렷하다 못해 어제 같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노란 호박꽃이 담장 위에 무성하고, 밤이면 마당 구석에 피워놓은 매운 모깃불에 눈물짓던 그런 유년의 날들이다. 그래서 ‘목포의 눈물’을 듣는 순간 나는 예닐곱 살 소년으로 돌아가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그 옛날 시골집 아이가 돼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남선 열차에 몸을 던져 서너 시간 달리다보면 목포역이 나온다. 기차가 플랫폼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노래.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 그 옛날 이난영이 부른 이른바 오리지널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의 노래로, 나아가 전남의 애국가로, 이제 전설이 된 해태타이거즈의 공식 응원가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십팔번’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노래다. 목포역장이 스스로 결정했는지, 아니면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 확인할 길 없지만, 열차가 오고 갈 때마다 목포역에는 늘 ‘사공의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목포항도 마찬가지다. 까마득한 대학시절 홍도, 흑산도를 다녀오던 길에 이용한 목포항 연안부두 선착장에서도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불과 얼마 전에 찾아갔을 때도 ‘목포의 눈물’은 구성지게도 흘러나왔다. 목포에는 눈물이 그칠 날이 없나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애달픈 정조’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울린 노래 ‘목포의 눈물’은, 그러나 격변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정치적인 노래로 탈바꿈한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특별히 호남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 제목을 두고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호남의 눈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1930년대 ‘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1950년대 ‘비 내리는 호남선’을 거쳐 1980년대 김수희의 ‘남행열차’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호남선 트리오’를 이루게 된다.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호남선 노래는 왜 슬픈가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목이 멘 이별가를 불러야 옳은가,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로 시작되는 ‘비 내리는 호남선’은 이승만 시대에 한 많은 한국인들을 울렸다.
박춘석 작곡, 손로원 작사에 손인호가 부른 노래다. 박춘석은 평생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이 노래로 한동안 고초를 겪었다.
경찰은 이 노래가 1956년 5월 3대 대통령선거 유세 중 공교롭게도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한 야당 대통령 후보자 신익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작곡자와 작사자를 몰아붙였다. 결국 신익희 선생이 타계하기 3개월 전에 만들어진 사실이 드러나 이들은 풀려났지만 괴로움을 많이 당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는 ‘남행열차’가 등장했다.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라는 노랫말은 억압받던 시절의 슬픔을 노래했다. 야구장에서는 호남을 연고로 한 기아타이거즈의 공식 응원가로, 그리고 대학 MT와 직장인들의 회식 후 노래방 회동에서 ‘떼창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고 보니 호남선 열차를 배경으로 한 노래에는 모두 눈물이 녹아 있다. ‘호남선 노래’ 관련 노래에는 왜 이다지도 눈물이 많은가. 호사가들은 호남선 열차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많은 노래에 구슬픈 곡조와 비감 어린 노랫말이 많은 것은 조선시대 이후 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전라도 사람들의 슬픔이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의 노래라기보다는 한 많은 이 땅 모든 민초의 노래였고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부른 설움의 노래였다.
노래가 탄생한 역사도 슬프다.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조선일보’가 문화사업의 하나로 신민요 가사를 공모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 씨의 작품이 당선됐고, 이 시에다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다. 당연히 목포 출생. 15세 때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태양극단에 입단해 단역가수로서 노래하다가 ‘목포의 눈물’로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목포의 눈물’은 의미도 많고 사연도 많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호응을 이끌었고, 오늘날까지 묵직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대중음악 장르인 ‘엔카’풍인 탓에 한때는 눈총도 받았지만, 애절한 곡조와 아름다운 가사에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이 곡조의 유장함을 더해 일본인들에게서도 사랑을 받게 된다. 이 노래는 ‘해조곡’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이난영의 대표곡이 됐고 이제는 ‘목포의 애국가’라고 불린다. 워낙 오래된 노래이지만 지금의 젊은 층도 잘 부를 줄은 모를지언정 들으면 누구나 아는 ‘한국인의 노래’가 됐다.
목포는 이난영이다
서너 해 전의 일이다. 내가 몸담은 대학의 석사과정 학생들과 작당해 조그마한 아카펠라 그룹을 만들었다. 연말로 예정된 송년의 밤 행사의 피날레를 근사하게 장식하고 싶어서였다. 레퍼토리 선정은 당연히 젊은 그들에게 양보하고, 앙코르곡은 내가 고르기로 했다. 대학원생들이 골라온 노래는 때가 때인 만큼 캐럴 몇 곡과 널리 알려진 클래식 팝송으로 무난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앙코르곡으로 ‘목포의 눈물’을 고르자 그들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차인표가 나오는 영화 ‘목포는 항구다’는 알아도 ‘목포의 눈물’을 모르는 그들은 차마 눈앞에서 드러내진 못했지만 영 못마땅하고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고 즉석에서 내 딴에는 구성지게(?) 이 노래를 불렀고, 그들은 그제야 “노래 제목은 몰랐지만 곡조는 알고 있었다”고들 했다. 내가 그네들의 교수라는 위치가 얼마간 감안됐겠지만, ‘목포의 눈물’은 만장일치 앙코르곡으로 정해졌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마음이 짠해오던 연말 송년회 저녁, 예정된 (어느 정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겠지만) 앙코르곡을 부를 순서가 오자 아홉 명의 아카펠라 그룹이 열심히 “사아아공의 배앤 노오오래…”를 불렀다. 20대부터 50대까지 함께 부르는 노래는 차가운 겨울 하늘로 퍼져 나가고 별이 되고 있음을 나는 그날 밤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남쪽 어느 산골의 철부지 아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은 그런 노래다. 좁은 한반도에서 악다구니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년시절 고향집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노래다.
목포는 이난영으로 대표되고 또 기억된다. 한국인은 목포를 생각하는 순간 ‘목포의 눈물’을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이난영으로 인해 목포는 동경과 그리움의 항구가 된다. 그래서 목포를 찾는 이방인은 도시 곳곳에 있는 난영의 정취를 보고 목포인들의 어마어마한 이난영 사랑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난영 공원도 있고, 이난영 나무도 있고, 이난영 거리도 있다. 유달산 곳곳에서 이난영이 흘러나온다.깊은 여름, 깊은 슬픔
그 선두에 있는 것이 ‘목포의 눈물 노래비’다. 1966년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등산로 중턱에 세워진 노래비는 한국 최초의 노래비로 인정된다. 당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목포지부가 앞장서 대형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래비는, 조형미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촌스러운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목포의 눈물’을 둘러싼 지난한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볼품없는 두툼한 화강암 비석 뒤편에 숨은 스피커에서는 난영의 애상 어린 노래가 시시각각 흘러나온다.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데, 목포항을 상징하는 두 축에 해당한다. 개발시대 때 섬과 목포항을 연결해 오랫동안 ‘이름만 섬’인 삼학도에 머물렀지만, 행정당국의 결정에 따라 거대한 공사 끝에 다시 예전의 모습인 아담한 사이즈의 섬으로 최근 돌아왔다.
먹을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포의 세발낙지를 떠올리게 된다. ‘쓰러져가는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이면 벌떡 일어선다’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 설명에서 엿볼 수 있듯 낙지는 한국인의 술안주로 단연 인기다. 널리 알려진 식당에서 낙지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지지직’ 불협화음과 함께 낡은 스피커에서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삶의 신산함을 겪은 뒤에 녹음한 것으로 짐작되는, 지독히도 청승맞은 그 노래다. 예전에,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도 ‘목포의 눈물’을 무척 좋아하던 곰 같은 대식가 선배가 말했다. “이난영의 노래는 그가 삶에 찌들려 가혹한 고통을 겪은 뒤에 녹음한 노래가 가장 이난영답다”고. 이제 나는 그 말에 조금은 공감하는 나이가 됐다. ‘낙지 탕탕이’를 안주로 소주를 들이켜는 목포의 여름은 깊을 대로 깊어 가고, 이제 나는 이 비감 어린 노래가 주는 깊은 슬픔을 아는 나이가 됐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연 원앙풍은(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2절 첫 부분의 ‘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은’은 원래 ‘삼백년 원한품은’이었으나 일제가 가사의 내용을 문제 삼자 작곡가 손목인 등이 둘러댄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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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 · 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2. 대중 가요사.
트로트 열풍] 100년을 이어온 트로트, 100년을 채운 트로트의 별들
임진모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승인 2020.03.15 15:00 호수 1587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트로트와 함께 시작
트로트의 힘,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
트로트 음악의 역사는 깊다. 한국 전체 대중음악의 역사가 실은 트로트와 함께 시작됐다. 무려 100년 역사를 자랑한다. 무성영화 삽입곡으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타이틀을 얻은 이정숙의 《낙화유수》가 발표된 때가 1929년이다. 그 뒤 등장한 장르인 최희준·패티김의 스탠더드 발라드, 신중현·키보이스의 로큰롤, 한대수·김민기의 포크보다 최소한 30~40년 더 빠르다.
애초 도시의 세련된 음악으로 출발해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 ‘뽕짝’이라는 멸시와 맞물리면서 트로트는 저학력과 가난의 서민음악으로 인식됐다. 또 70년대 이후 젊은 음악인 로큰롤과 포크 그리고 흑인음악에 밀리면서 주류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얼핏 은폐된 것 같아도 기성세대의 트로트에 대한 은근한 ‘물밑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다. 질긴 생명력의 음악이라고 할까.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아도 고학력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면, 노래방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마는, 지금도 살아 있는 ‘백 투 트로트’ 관습은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 준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 데 있다.
1952년 9월9일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하는 가수 이난영(위)과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 (오른쪽)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 채규엽 ⓒ연합뉴스
1952년 9월9일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하는 가수 이난영(위)과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 (오른쪽)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 채규엽 ⓒ연합뉴스
남인수와 이난영, 해방 전 트로트계를 빛내다
대중가요의 등장과 함께 인기가수 즉 스타가 출현했다. 30년대 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는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의 채규엽이다. 그는 1935년 잡지 ‘삼천리’의 인기가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한 바리톤 가수라는 사실은 ‘신문화’ 트로트가 초기에는 도시의 지식인, 돈 많은 소시민층, 기생 등이 향유하던 세련된 음악이었음을 알려준다.
트로트 탄생기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라는 주장은 트로트의 태생적 한계로 따라붙는다. ‘트로트가 일본 것이냐 아니냐’는 국적 논쟁은 유서가 깊다. 그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트로트를 일본의 ‘엔카’로부터 영향을 받아 식민지 시대의 비탄 정서를 위해 일본에 의해 보급된 것이라며 비판적 해석을 가하지만, 일본 일각에서는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며 특히 영남 쪽의 민요에 기원을 둔다”는 주장도 나온다. 트로트의 고된 숙명은 훗날 60년대에 ‘왜색’ 시비로 이어진다.
30년대 말부터 해방 전까지 수많은 트로트의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라울 정도의 긴 호흡을 자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와 20세기 최고 가요로 손색이 없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은 남녀 대표가수였다. 30년대 말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방탄소년단 못지않아 공연이 끝나면 입구에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줄을 섰다고 한다. 하늘이 내려준 비음이라고 할 이난영은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통했다.
남인수·이난영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짝사랑》의 고복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박재홍,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역마차》의 장세정 등이 맹활약했다. 해방 후에 등장한 가수로는 단연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을 빼놓을 수 없다. 매우 심한 떨림을 강조한 특이한 음색으로 시대를 풍미해 《신라의 달밤》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한동안 가수든 일반인이든 모창 단골 소재였다.
ⓒ연합뉴스·시사저널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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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의 별, 이미자와 남진·나훈아
라틴 댄스음악 그리고 한국전쟁 후 미군정 통치와 함께 재즈 스타일 스탠더드와 록 등 미국 음악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여전히 트로트는 막강했다. 특히 단조의 비애감을 강조한 구슬픈 멜로디는 60년대 경제개발의 어두운 한숨을 위로해 준 덕분에 경쟁 음악의 잇단 등장에도 대중 흡수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와 가요사의 명곡 《동백아가씨》 덕분이었다.
여타 가수들이 보여준 기교와 장식이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순정 보이스를 전한 이미자는 1964년 《동백아가씨》로 당시로는 경이적인 10만 장 이상, 요즘으로 치면 100만 장의 판매량을 거두면서 음악이 이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렸다. 지구레코드의 고(故) 임정수 회장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왜색이라는 덫에 걸려 이미자의 3대 명곡으로 불리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는 오랫동안 방송과 출반이 금지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백아가씨》가 금지로 묶인 줄도 모르고 공개 석상에서 이 곡을 신청해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왜색과 함께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시의 늪에도 빠지게 된다. 초기의 ‘쿨’한 음악이 이 무렵에는 ‘천’한 음악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자 이전 《눈물의 연평도》의 최숙자 그리고 동시대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영산강처녀》의 송춘희 등 트로트 음악은 여가수들의 분전으로 성비 균형을 획득해 결코 남자 중심으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트로트의 위력을 꼭짓점으로 끌고 올라간 주역은 두 남자가수 남진과 나훈아였다. 남진은 67년 《가슴 아프게》의 대박으로 우뚝 섰고, 나훈아는 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인기 가도의 불을 지폈다. 남진과 나훈아는 동시대 야당 40대 기수인 목포 출신의 김대중, 부산 출신의 김영삼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영호남 대결의 양상을 띠면서 72년까지 한반도 반을 둘로 쪼개는 극심한 라이벌전을 펼쳤다.
음악 연구자들은 이때를 트로트의 실질적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심지어 꼬마들도 “넌 남진이냐 나훈아냐”라는 질문을 강요받았으니 이처럼 세대를 망라한 맞수전은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 나훈아가 훗날 ‘트로트 황제’로 절대적 전설이 됐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지만 당대 라이벌전의 승자는 엄연히 남진이었다.
70년대는 신중현과 키보이스의 록(그룹사운드), 한대수·김민기·송창식·이장희·김정호의 포크가 청춘의 열정과 낭만을 대변하면서 유행음악으로서 트로트는 급속 위축됐다. 고군분투한 《잘했군 잘했어》의 하춘화가 있었지만 남진·나훈아 경쟁 같은 뜨거운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75년 대마초 파동과 가요 규제조치로 록과 포크가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트로트에 다시 조금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룹사운드 즉, 록 출신 가수가 대거 안전한 트로트를 택하면서 다소간 위력을 회복한 것이다. 시작이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고 그 뒤를 《오동잎》의 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정 주고 내가 우네》의 김훈, 《내게도 사랑이》의 함중아가 따랐다. 록이 트로트와 타협한 이 스타일을 ‘트로트 고고’라고 불렀다. 80년대 들어 ‘가왕’으로 솟아오른 조용필이 대중적 존재감을 트로트로 얻기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때까지 기성세대의 납득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말해 국민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트로트에 발을 담가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록의 피를 가진 조용필은 이후 록 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며 록과 젊은 음악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1985년에는 3박자 트로트 《허공》을 불러 다시 트로트에 원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수은등》의 김연자와 《멍에》의 김수희는 대박이었고 79년 박 대통령 궁정동 시해 사건과 연루되어 공식 활동이 어려웠던 심수봉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날갯짓을 시작해 트로트의 상승기류에 힘을 보탰다.
ⓒ연합뉴스·시사저널 임준선
ⓒ연합뉴스·시사저널 임준선
트로트, 8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다
1980년대 후반에는 6공화국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 사람들’의 이미지와 어울린 주현미와 현철이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음색의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과 《짝사랑》으로 88년과 89년 MBC 가수왕을 거푸 수상했다. 현철 역시 《봉선화연정》과 《싫다 싫어》로 89년과 90년 KBS 가수왕을 연패했다.
이들의 경쾌한 폭스 트로트는 과거의 마이너 애상조와 작별하면서 트로트를 ‘관광버스용’의 위락 음악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유행음악의 대세는 젊은이의 댄스와 발라드로 넘어갔다. 90년대에는 현철과 더불어 미국에서 돌아온 태진아·송대관·설운도가 ‘남자 트로트 4강 체제’를 구축했지만, 그 체제가 너무 오래가는 바람에 신예의 등장이 더뎌졌고 트로트의 스탠스는 더욱 좁아졌다.
2005년 2월 25살 젊은 가수 장윤정의 혜성 같은 등장은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폴카풍의 뽕짝 《어머나》가 TV 가요 프로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젊은 음악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장윤정의 인기는 다소간 트로트의 기사회생을 가져왔다. 장윤정 스스로도 “팬들도 젊은 가수가 부르는 색다른 트로트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했다.
《무조건》의 박상철, 《오빠만 믿어》의 박현빈, 《사랑의 배터리》의 홍진영 그리고 LPG, 뚜띠 등 젊은 트로트 가수들도 잇달아 출현했다. 심지어 아이돌 가수들도 트로트 시장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2007년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는 티(T)라는 프로젝트팀을 통해 《로꾸거》를 발표했고 빅뱅의 대성은 《날 봐 귀순》을 노래방의 골든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트로트의 파워는 선거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 여야, 무소속 후보 가릴 것 없이 상당수가 로고송으로 트로트를 빌린다. 유권자 공략을 위해 트로트를 썼다면 그것은 여전히 트로트의 서민적 흡수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압도적 기술문명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한테는 ‘고향’ 같은 음악이 트로트다. 지난해부터 음악계를 강타하고 있는 트로트 흐름 역시 트로트의 무궁한 힘이 오랜만에 발휘된 산물로 볼 수 있다.
아직은 세대를 관통하는 열풍이라기보다는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 TV 프로그램 인기인 것 같지만 트로트에 ‘부활’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주류에서 소외돼 매체에 덜 비친 게 도리어 음악 인구의 반가움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과연 젊은 층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가장 중요한 ‘시장성’이 결정될 것이다.
2000년대 후반 영스타들인 슈퍼주니어와 대성이 가담했음에도 그 물결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트로트 시장이 허약하고 확장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정한 열풍으로 번지려면 판을 전복할 만큼의 큰 히트곡 하나와 장윤정에 버금가는 화제의 인물이 필요하다. 그래도 트로트에는 기나긴 역사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서민대중 저 아래로 파고드는 유서 깊은 ‘물밑사랑’을 자극하는 노래와 가수가 출현한다면 더 확실한 인기몰이 음악은 없을 것이다. 다시 트로트에 기회가 왔다.
#임진모 음악 평론가#트로트음악계보
가수 이난영의 딸 ‘김시스터즈’ 김숙자
“어머니 이난영은 앞서간 프로듀서 원조 K팝 스타 김시스터즈 키웠다”
기자명권경안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
입력 2016.06.03 17:54 호수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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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난영 탄생 100년’에서 김시스터즈의 리더 김숙자씨가 부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photo 최성환 목포대 교수
지난 5월 31일 오후 7시 바닷가에 자리한 전남 목포문화예술회관 공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공연장 2층까지 객석을 채웠다. 목포가 낳은 가수 이난영(李蘭影)은 1935년 이래 ‘민족의 노래’로 승화한 ‘목포의 눈물’을 불렀었다. 이날 공연장은 그의 딸들로 구성되었던 ‘김시스터즈’의 리더 김숙자씨의 토크콘서트장. ‘목포의눈물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가수 이난영 탄생 100년’ 행사 중 하나였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살고 있는 김숙자(76)씨는 “노래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 마치 지금도 어머니가 살아계신 듯하다”며 먼저 아버지(김해송·1911~1950?)에 대해서 말문을 열었다.
“아주 무서웠어요. 여섯 살 때 클래식 곡에다 가사를 붙여 아주 빠른 노래를 형제자매들이 모두 이어 부르게 했는데, 그게 6개월 걸렸어요. 처음부터 똑바로 가르쳐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지요. 음악의 기둥을 세워주신 분이지요.”
평양숭실전문 때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는 아버지 김해송(金海松)은 1930년대부터 작곡가(신민요·가요), 성악가(재즈·가요)로서 그리고 뮤지컬 기획과 악극단 운영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광복 이전 최고의 가수 이난영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음악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스승 아래 조기교육을 받은 셈. 김해송·이난영 커플의 자녀는 모두 12명. 이 중 7명이 성장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문 열고 들어오시면서 ‘하나, 둘, 셋’ 하십니다. 그러면 무조건 언니, 오빠, 동생들과 노래를 화음을 맞춰 불러야 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은 김해송이 1939년 조직한 ‘저고리시스터즈’. 멤버는 이난영을 비롯,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박향림, 대단한 인기가수였던 장세정, 이화자였다. 그리고 해외(미국)로 최초 진출한 걸그룹이 김시스터즈. 김해송·이난영의 딸들이다. 한류(韓流)와 K-POP의 원조다.
이날 김숙자씨는 마지막엔 ‘목포의 눈물’을 관객과 함께 불렀다. 눈물도 글썽였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인 김선태씨(목포대 국문과 교수)는 “눈물이 절로 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칠남매를 키우느라 너무 고생하셨어요. 무대를 너무도 사랑했고, 저희들을 가르쳐서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 이난영은 훌륭한 디렉터이고 프로듀서였다. 아버지는 1950년 전쟁 중 납북돼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아이들을 혼자 몸으로 키우며, 먹을 게 없어 고생하면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이난영은 ‘오동추야’라는 30명가량 되는 극단을 이끌기도 했다.
김시스터즈는 1951년 대구에서 처음 결성됐다. 언니 영자씨와 둘이었다. 1년 만에 언니가 키가 크자 무용단으로 가고, 1953년 사촌 민자씨(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 이봉룡은 ‘목포는 항구다’ 작곡자), 동생 애자씨와 다시 모였다. 미8군 클럽에서 컨트리음악을 불렀다. 어머니가 팝송을 라디오로 듣고 받아적어 외워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자매들도 숙자씨의 오빠(영조)가 조립한 라디오로 FM방송을 들으며 노래를 익혔다. 클럽에 출연한 대가는 위스키와 맥주. 이것을 쌀과 바꾸었다.
“미8군 클럽에서 단연 인기를 얻으니, 그게 일본에 있는 미군들에게까지 퍼졌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시안쇼를 기획한 톰 볼(Tom Ball)이 이 얘기를 듣고 1958년 한국에 와서 어머니와 계약을 한 거예요. 김시스터즈를 데려가겠다고요.”
1959년 1월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얼마 걸리는 줄도 모르고 모두 꽉 끼는 한복을 입고 갔다가 혼이 났어요. 미국에서 만난 톰 볼이 그러더군요. 의상, 악기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는 다 주고 떠나왔었죠. 어쩔 줄 몰라 우리가 울기만 했더니, 톰 볼이 울지 말라며 의상도 해주고, 악기도 주었어요.”
영어가 통하지도 않고 음식도 맞지 않아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김치에 목말라 하던 애자씨는 황달까지 걸렸다. 다행히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호텔에서 가진 ‘차이나 돌 레뷔(China Doll Revue)’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 한국의 미8군 클럽에서 불렀던 로큰롤을 주로 불렀다. 패티 페이지의 ‘테네시 왈츠’도 불렀다.
“당초 4주 계약에서 무려 8개월 반으로 바뀌었어요. 다른 호텔들도 공연 요청을 했고, 뉴욕에서도 요청해왔습니다. 이듬해 1960년 라이프(LIFE)지에 소개되기도 했지요. 시카고 TV 가이드의 표지로도 나왔죠. 미국 CBS 인기 TV쇼 ‘에드 설리반 쇼’에 22차례 출연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복을 입고서 아리랑을 부르고, 이어서는 노래 부르며 악기를 함께 했지요.”
1960년 김시스터즈가 불렀던 리메이크곡 ‘찰리 브라운’은 빌보드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김숙자씨가 다룬 악기는 모두 13가지. 애자·민자씨도 10개 이상의 악기를 다루었다. 색소폰, 트롬본, 플루트, 벤조, 기타, 클라리넷, 아코디언, 마림바, 백파이프, 피아노, 만돌린, 바이올린 등등.
“어머니는 내다보시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가야금, 북, 장구를 배웠고 춤과 발레와 승무도 배웠어요. 1955년 무렵까지요. 미국 가서도 악기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보컬이 뛰어나니, 목소리에다 악기를 다뤄야 이길 수 있다고. 우리 시스터즈가 운이 좋았던 것이 한 호텔에서 장기공연하면서 악기를 끊임없이 배울 수 있었다는 거지요.”
가수 이난영은 1963년 성공한 딸들의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딸들은 ‘에드 설리반 쇼’에 어머니와 함께 출연했다. 이난영은 딸들에게 “성공해서 돌아와라. 절대로 남자와 데이트하지 마라(팀이 깨지면 안 되므로). 셋이 함께 움직여라”고 주문했다. 같은 해 김씨의 오빠와 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즈(김영조, 영일, 상호, 태성)가 미국에 왔다. 김시스터즈는 셋이서 1973년까지 활동하다가 민자씨가 헝가리인과 결혼하면서 큰 언니 영자씨가 들어왔다. 김시스터즈는 1980년까지 활동했다. 이후부턴 김숙자씨와 김브라더즈가 함께 1995년까지 공연했다. 1967년 김시스터즈는 50만달러의 세금을 납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액납세자 6위였다. 김씨는 호텔을 경영하는 이탈리아인과 결혼, 두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목포에서 어릴 적 밥 짓다가도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했다고 했습니다. 노래하면서 속이 풀린다고 했어요. 언제나 노래가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젊어진다고. 제가 나이가 들다 보니 어머니 말씀이 이해가 되더군요.”
1916년 태어난 이난영이 열두 살 때까지 산 곳은 유달산이 비껴 보이고,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목포 양동 산동네 초가였다. 목포는 식민도시의 전형이었다. 교역항으로서 급속도로 발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전국 6대 도시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그러나 항구도시 목포는 수탈의 중심지였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김과 면화, 쌀, 소금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인은 개항장 중심의 계획된 신시가지에서 신문물을 향유했고, 조선인은 산비탈 빈민촌에서 허덕였다. 이난영은 1965년 숨졌고, 목포 사람들이 2006년 경기 파주 용미리 묘지에서 목포로 모셔 수목장으로 치렀다. 목포는 지금 눈물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최태옥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21세기 목포의 미래를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게 이난영 탄생 100년 행사의 취지”라고 말했다.
https://bit.ly/3GP0c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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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5호 (2016.04.17)
[312]목차보기기사 제보|편집장에게 한마디 | 체험구독신청
[특별 문화기획]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글로벌 열풍 K팝에 그녀의 음악혼 스몄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너무 일찍 태어나 불운했던 한국 대중음악의 시원(始原)…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던 불세출의 엔터테이너
▎목포 유달산 자락의 이난영 생가 터에 세워진 이난영 흉상. 그는 무대 예술가로서의 기질과 근성에 있어 독보적인 자리를 점한다. / 사진·중앙포토
이난영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는 일, 이난영을 수식할 새로운 이름을 상상하는 일이다. 일제 말기 군국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이난영의 음악은 한국 대중가요의 새 길을 뚫는 더욱 강력한 절창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난영은 민요에 능했던 당시 기생 출신 가수들과는 달리 모던하고 재즈적인 음악에 강점을 드러냈다. / 사진·중앙포토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신민요’의 일종인 ‘향토노래’로서 발표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倭色)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노래의 주인공 이난영이 죽은 뒤 목포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난영가요제’를 개최했으며(1968년에 호남매일신문사 주최로 시작된 이 가요제는 한때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문화방송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1969년에는 목포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대중가요를 위한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목포의 눈물’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호남지역을 연고지로 한 프로야구팀의 응원가로 불렸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목포의 눈물’은 ‘일본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그리고 ‘호남적인 것’까지 갖추고 있다고 여겨지는 셈이 된다.
물론 여기서 ‘일본적인 것’은 껄끄러운 문제다.
사실상 ‘목포의 눈물’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유행가 일반이 20세기 후반 ‘트로트’라는 적잖이 경멸의 뉘앙스가 담긴 장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트로트 일반이 ‘왜색’이라는 주홍글씨를 얻게 되었다. 트로트의 ‘왜색’을 지적하는 음악비평적 근거는 무엇일까?
리듬의 측면에서 한국 전통음악에서는 3박 계열이 주를 이루는 데 반해 트로트는 2박과 4박 리듬이 주로 쓰인다는 점, 그리고 선율의 측면에서 전형적인 트로트 가요의 경우 일본의 전통 유행가인 엔카(演歌/艶歌)와 이른바 ‘요나누키 단음계’를 공유한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뜻이다.
‘목포의 눈물’과 같은 느린 단조 선율에서 이러한 ‘요나누키 단음계’가 나타나는 것은 일본을 통로로 서양의 기능화성을 배운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가들에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단조풍의 음계를 화성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장조에 비해 좀 더 어려운데, 당시로서는 일본식의 표준에 따르는 것이 안전했을 것이다.
뽕짝은 ‘왜색’ 아닌 ‘서양색’에 가까운 것
▎목포 유달산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노래비로 기록된다. / 사진·중앙포토
그보다 앞선 문제는 ‘요나누키 단음계’가 과연 일본 고유의 음계였는가 하는 것인데, 실은 그렇지도 않다. ‘4음과 7음을 뺀다’는 뜻의 ‘요나누키(よなぬき)’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서양식 7음계를 전제한 신조어로, ‘요나누키 단음계’는 동양의 5음계적 선율이 서양식 단조 음계 선율과 화성에 적응하는 서구화 과정에서 생겨난 일반적인 음계 가운데 하나로 분석될 수 있다.
‘요나누키 단음계’는 ‘미야코부시’라는 이름의 음계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미야코부시’라는 용어 역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신조어로서 서양 음계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서구식 창가와 유행가를 의식한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야코부시(みやこぶし, 都節)’라는 용어 자체가 ‘도시음계’라는 뜻으로, 반음이 결여된 ‘시골음계’라는 뜻의 ‘이나카부시(いなかぶし, 田舍節)’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었다. ‘미야코부시’ 혹은 ‘요나누키 단음계’는 당시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나아가 서양의 단조 화음이 뒷받침된 도시풍의 음조였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 시기 유행가에 ‘왜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왜색’은 이미 ‘(서)양색’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혼융되어 있다. ‘뽕짝’이라는 별칭을 낳게 한 2박 내지 4박의 리듬도 ‘왜색’이라기보다는 ‘양색’에 가깝다. 그것은 19세기의 케이크워크(cakewalk)나 래그타임(ragtime), 20세기 초반의 폭스트로트(foxtrot)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서구 댄스홀 문화의 산물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간전기(間戰期) 미국의 음반 산업을 중심축으로 전 지구적 대중음악 문화가 형성되면서 공유케 된 새로운 의미의 음악적 공통 관습(common practic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뽕짝’ 리듬은 일본풍 유행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1930년대 세계의 유행가에 두루 적용되는 공통의 리듬이었던 셈이다.
이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일본-한국-호남만이 아니라 서양-세계까지 연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노래의 가사 또한 그렇다. 사실 노래가 만들어지던 당시 목포는 지금과 같은 낙후된 소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외래의 선진 문물을 향해 열려 있는 모던한 항구 도시로서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목포 출신의 재기발랄한 젊은 여가수 이난영 역시 모든 면에서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노래 속 이난영의 페르소나인 ‘부두의 새악씨’는 자신의 욕망을 좇아 항구를 떠나고 싶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그녀로 하여금 ‘아롱저진 옷자락’을 여미며 항구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쩌면 가수 이난영의 욕망이 도달하게 될 예견된 좌절의 지점을 복선처럼 그려주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슴 서늘해지는 블루스 ‘다방의 푸른 꿈’
▎1963년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와 이난영. (왼쪽부터)김숙자, 진행자 에드 설리반, 이난영, 김민자, 김애자. / 사진·중앙포토
1960년대 이후 ‘트로트 왜색 논쟁’이 초래한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식민지조선의 유행가 전체를 ‘트로트’라는 이름의 한 가지 장르로 뭉뚱그려 보게 된 데에 있다. 해방 전후 음반산업이 침체 상황을 겪은 데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대중음악의 양식적 단절 내지는 퇴행이 이루어진 점,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계기로 미국의 대중음악이 직수입되면서 음악청취자들의 취향이 점차 미국화된 것, 196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시도된 광범위한 왜색 문화 일소운동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미국식 팝음악(나중에는 록음악 포함)과 트로트의 이분법적 구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기의 대중음악이 장르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했다는 사실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모조리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이다.
사실상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을 한 가지 장르로 종합하는 것은, 예컨대 19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단 하나의 장르로(정태춘과 서태지, 신해철 등이 보여주었던 음악적 차이를 가리지 않고 뭉뚱그려)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일이다.
이난영은 이러한 불합리한 장르 구분에 의한 직접적 희생자였다. 해방 이후 한국의 대중들에게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처량하게 노래한 식민지 시기의 트로트 가수로만 기억되곤 했다. 그녀가 ‘아리랑’과 같은 ‘신민요’는 물론, ‘명랑한 젊은 날’과 같은 발랄한 ‘만요(漫謠)’를 비롯하여 ‘재즈송’과 ‘블루스’풍의 음악까지 매우 폭넓은 음악적 양식을 소화했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감춰졌다.
해방 직후 그녀의 남편 김해송이 제작한 대규모 악극 <카르멘>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는 사실도 한국전쟁 이후 쉽게 잊혀졌다.(한국전쟁 와중에 김해송의 납북이라는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가 이끈 K.P.K악단이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단으로, 이난영은 한국 최초의 성공한 뮤지컬 배우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난영은 다재다능이라는 면에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수들 가운데 발군이었다. 1935년 당시 최대발행 부수의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에서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과 여가수 부문에서 이난영이 3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위와 2위인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모두 기생 출신 가수였다.
이난영은 기생 출신이 아니었던 만큼 ‘민요’와 ‘신민요’에 능했던 기생 출신 가수들보다는 좀 더 모던하고 재즈적인 음악에 강세를 보였고, 실제로 그러한 음악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같은 오케레코드사 소속의 작곡가이자 가수 겸 연주자였던 김해송과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이난영이 스물한 살 되던 1936년 12월 24일에 결혼)도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교감만이 아니라 김해송이 추구한 재즈풍의 음악과 이난영의 음악적 지향이 공명을 이루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풍의 곡을 발표한다.
스윙재즈 양식의 ‘바다의 꿈’과 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 그리고 경쾌한 집시스윙 양식의 ‘항구의 붉은 소매’다. 이난영은 ‘바다의 꿈’과 ‘항구의 붉은 소매’에서 의미 없는 음절로 선율을 흥얼거리는 일종의 ‘스캣(scat)’까지 선보이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을 과시한다.
두 곡 모두에서 스윙 반주에 맞추어가는 리듬감이 탁월하며 고음역과 저음역을 오가며 음색을 조율하는 방식이 여타의 유행가를 부를 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
이 시기 일본식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미국 본토의 블루스와 양식적 유사성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다방의 푸른 꿈’은 오히려 일본식 블루스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적 블루스의 향취를 더 많이 자아낸다. 블루스 특유의 반음 내린 3음(블루노트)을 쓴 김해송의 파격적 선율구사와 더불어 이를 잘 소화해낸 이난영의 가창력이 합작해낸 결과다.
매력적인 비음, 정교한 음정 구사력
▎김해송·이난영 부부의 자녀들은 김시스터즈(앞줄)와 김브라더즈를 만들어 활동했다. / 사진·중앙포토
김해송과 이난영을 중심으로 한 재즈풍의 음악에 대한 추구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면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였을 것 같다.(적어도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을 ‘트로트’라는 한 가지 장르 용어로 부르면서 예외 없이 ‘왜색’이라는 낙인까지 찍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고 총력전 체제를 강화하면서 이난영을 포함한 식민지 조선의 음악인들은 한마디로 재앙을 맞게 된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적국’으로 규정한 미국과 관련된 모든 대중문화를 검열하고 금지했다. 1941년 이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이난영은 더 이상 재즈 양식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1942년에는 ‘小林玉順’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군국가요를 부르는 일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난영은 비음이 섞인 매력적인 목소리와 함께 정교한 음정 구사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라이브 무대에서의 그녀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치열한 연습 습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주요 레코드사는 전속 가수들만이 아니라 전속 악단을 거느리고 레코드 홍보를 겸하여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난영이 전속계약을 맺고 있던 오케레코드사는 특히 이러한 순회공연에 많은 힘을 쏟았다.
전속가수들과 전속악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공연단의 순회공연 장소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일대까지 미쳤다. 공연단의 일원으로서 이난영과 김해송 부부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연 무대에 동반 출연했는데 재즈와 즉흥연주에 능했던 김해송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9년경 오케레코드 공연단 규모는 매우 커져서 ‘오케그랜드쇼단’이라는 공식명칭을 쓰고 있었다. 오케그랜드쇼단 내에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CMC 밴드’, ‘오케싱잉팀’과 더불어 김해송이 포함되었던 ‘아리랑보이즈’가 오늘날 보이그룹의 효시라면, 이난영이 포함되었던 ‘저고리시스터즈’는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다.
오케그랜드쇼단은 1939년 3월에 일본 순회공연까지 성사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는 이난영도 참여했다.
일본 현지에서 조선악극단이 일본 영화 <사려깊은 부인(思ひつき夫人)>에 특별출연하여 공연 장면의 일부가 짧게나마 기록되었는데, 영화 속 공연장면을 보면 C.M.C 밴드를 지휘하는 작곡가 손목인을 비롯하여 김정구,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 등이 노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 속에서 밴드 연주자들을 제외한 무대 위의 단원들은 모두 한복 차림이며 신민요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해외공연이라서 더욱 ‘조선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이 시기의 대중음악가들은 모두 전통 민요에도 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식으로 말하자면, 퓨전국악이나 월드뮤직 장르의 뮤지션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난영은 레코드가수로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태양극단에 입단했을 때부터 무대예술가로서 성공하고픈 꿈이 있었고 배우로서의 기질도 다분했다.
해방 직후 그녀는 남편 김해송의 K.P.K악단 무대를 통해 십대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의 꿈을 이루어내는 듯했다.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미국의 초기 뮤지컬과 흡사한 방식으로 공연을 시도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버라이어티쇼와 레뷔 등 삽입 단막극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점 장편 뮤지컬 작품이 시도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설상가상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으로 가는 길에 죽게 되면서, 이난영은 7남매를 포함한 대가족의 생계를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이난영은 자신의 딸들을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걸그룹으로 키워내기 시작한다. 전쟁 중이던 1951년경 부산으로 피란 온 이난영이 미군 위문공연을 다니던 때부터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의 김시스터즈는 어머니의 조련을 받아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알려진 바대로 김시스터즈는 오래지 않아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여(이때 멤버들 가운데 큰 언니 영자를 대신하여 이난영의 친오빠 이봉룡의 딸이었던 민자가 합류한다) 상당히 큰 성공을 거둔다.
이난영의 주도면밀한 기획 아래 노래 실력만이 아니라 춤 실력과 다양한 악기연주 등의 실력 등을 갖추고 있었던 그들은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이 많았다. 비틀스가 미국을 강타할 때 교두보가 되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스물두 번이나 출연했을 만큼 김시스터즈는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김해송, 남인수와의 비극적 사랑
주로 미국대중음악의 히트곡에 대한 커버송들과 함께 ‘동양적’이거나 이국적인 이미지를 뒤섞어갔던 김시스터즈의 미국 공연 활동은 대중예술의 창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점수를 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의 열악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흥행성을 인정받을 만한 공연 능력을 키워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김시스터즈 멤버들의 타고난 역량에 기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김시스터즈의 성공의 이면에는 그들의 부모인 이난영과 김해송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가들이 가꾸어온 음악적 역량과 초기 대중예술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쌓여온 역량이 반세기 후 케이팝의 보편적 호소력이 만들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한국에서의 이난영은 몰락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오케레코드사의 동료가수였던 남인수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기혼자였던 그가 불륜의 관계 맺기를 감행했던 것은 이난영이 겪었을 모종의 상실감에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난영 또한 연하의 남인수에게 의지하고 매달렸으며,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불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유지되던 이들의 애정관계 역시 1962년 남인수의 죽음으로 짧게 매듭지어졌다.
같은 해 12월에 이난영은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라스베이거스의 무대에 함께 서기도 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지만, 8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미국생활을 접고 1963년 8월 돌연 귀국했다.
그녀는 국내에서 ‘김보이스’ 등의 이름으로 연예활동하고 있었던 세 아들들의 음악적 전열을 정비하여 그해 11월에 ‘김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시킨다.
이제 한국에서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난영의 삶은 이후 1년 남짓 유지되다가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의 자택에서 마무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기록되었지만, 자살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난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대중매체에서 젊은 연예인들이 나이든 선배 연예인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종종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한 존칭의 부여가 존경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전성기를 지난 대중예술인들을 과거 속으로 봉인하는 가식적 예우의 방식처럼 느껴지곤 해서다.
대중가수 이난영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 또한 ‘이난영 선생님’이라는 어색한 존칭을 대하는 것처럼 껄끄럽다. 이난영은 그저 ‘이난영’일 때 가장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이난영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가진 목소리의 가수라는 면에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샹송의 에디트 피아프, 파두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재즈의 빌리 홀리데이에 필적할 만하지만, ‘샹송’이나 ‘파두’, ‘재즈’와 같이 그녀를 수식할 음악의 명칭이 없다는 사실은 적잖이 치명적이다. ‘트로트’가 그 이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가들이 처한 식민적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트로트’ 대신 ‘케이팝’은 또 어떨까?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난영이 기념할 만한 인물인가 하는 물음은 과거 자체보다는 오히려 현재나 미래에 대한 물음이 된다. 즉, 그 물음은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수나 대중음악인들에게 얼마만큼의, 그리고 어떤 식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며, 한국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독창성과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물음이기도 하다.
한반도 최초의 대중가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흔히 셋으로 갈린다.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1926), 이정숙이 부른 <강남달(낙화유수)>(1929), 그리고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황성의 적)>(1932)다. <사의 찬미>는 최초의 레코드 히트곡이라는 점에서 꼽히지만 번안곡이기 때문에 실격이라면, <강남달>은 창작곡이긴 하지만, 양식적으로 창가와 동요에 가깝다.
양식적인 면에서 유행가로서의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황성옛터>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1932년경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이난영이 십대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서 태양극단의 막간무대 가수로 활동하다가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에게 발탁되어 전속가수가 된 해가 1933년이니, 그녀 또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출발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가수의 전형(典型)을 형성했다는 측면에서는 이난영과 함께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는 초국가적 음반산업을 통해 일상 문화의 차원에서 글로벌과 로컬의 첨예한 만남이 시작되던 시기,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서양적인 것)이 치열하고 만나 섞이는 모더니티의 음악적 실험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대중음악 형성기의 상황은 전 지구적 음악시장이 새롭게 열리고, 전통음악계의 새로운 혼종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21세기의 현 상황과 무척 닮아 있다.
이난영이 100년 후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보편적 호소력을 갖춘 타고난 목소리와 국제적 감각을 갖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 무대예술가로서의 기질과 근성, 그녀는 너무 일찍 태어나 불운의 세기를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은 아직까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기억하는 방법, 그들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난영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그 방법에 대한 모색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난영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는 일, 이난영을 수식할 새로운 이름을 상상하는 일이다.
-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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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난영'을 이야기하다 - 최성환 (오마이뉴스)
<목포의 눈물> 여가수 이난영 평전 ⓛ
06.03.09 16:10
필자는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거나 그가 남긴 가요계의 업적이 칭송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인물로서 그를 바라보고 싶고, 지역의 문화자원으로서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지닌 가치가 소중하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지방자치시대가 열린 이후 전국은 각 지역을 상징할 수 있는 매개체를 개발하기 위해 앞 다투어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물=지역"이라는 이미지 공식을 성립시키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현시대는 어느 지역하면 순간적으로 연상되는 문화코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가수 '이난영'은 호남권 특히 '목포시'에게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1935년에 그가 불렀던 노래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코드이다. 나이 지긋한 한국 사람이라면 <목포의 눈물>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목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심지어 최근 북한에서 개최되는 각종 기념공연에서도 <목포의 눈물>은 불려지고 있고, 북측동포들의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은 분단의 세월을 넘어 남과 북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주는 문화자원이기도 하다.
▲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이난영.
ⓒ 최성환
그러나 정작 가수 '이난영'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너무나 빈약하다. 문학인이나 미술가였다면 이미 그에 대한 연구 논문이 수십 편은 발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가수'를 예술가가 아닌 '딴따라'로 취급해 온 그동안 우리문화계의 풍토상 '가수 이난영의 삶과 예술세계'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거나 글로 정리되지 못해왔다.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 역시, 대중 가수를 주제로 논문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난 2002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음반자료를 중심으로 '이난영 추모 전시회'가 개최된 적이 있었다. 필자가 당시 전시회를 준비했는데, '이난영'에 대한 간단한 소개문이나 연보를 작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존에 '이난영'에 대해 소개된 자료마다 그 내용이 제 각각이고, 연보도 통일성이 없었다. 심지어 고향인 목포시에도 '이난영'에 대한 자료가 전무했고, 변변한 사진자료 하나 확보되어 있지 못했다. 이 때부터 '이난영'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왔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이렇다할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 이난영 추억의 노래 앨범자켓
ⓒ 최성환최근에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그의 묘지를 경기도 파주에서 고향인 목포로 이전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각종 기념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일제강점기 유행가 가수들에 대한 문제가 도마에 올라있는 상황이라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난영'의 경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 1차 명단(2005년 8월 발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난영과 부부관계를 맺었던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남인수' 두 사람은 모두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흔히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크게 성공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특수 체제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고, 한 여인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지금도 이난영의 죽음을 놓고 자살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이난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하는 일이 더 절박해졌다. 이점이 부족하지만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주기적이고 체계적인 글을 써낼 자신이 없지만, 우선 시작해본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연재를 통해 '이난영'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평가 등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 지기를 기대한다.
가수 이난영 주요연보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 녹음.
1933년 10월 OK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 취입 가수 데뷔.
1934년 2월 <봄맞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출연.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6년 7월 오까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 대히트 기록.
1939년 1월 문일석 작사, 이봉룡작곡, <목포의 추억> 발표.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2년 오빠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8년 <목포의 눈물>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 관중 동원.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시민 기금으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2004년 목포문화연대 측에서 이난영 묘지 이전 및 추모사업 제안.
2005년 목포에 이난영 기념사업회 발족.
2005년 이난영 유가족들과 묘지 이전 및 기념사업 협의.
2006년 3월 묘지 이전, 유가족 초청 추모 콘서트 등 예정.
덧붙이는 글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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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난영'을 이야기하다
<목포의 눈물> 여가수 이난영 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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