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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획 기사] 염장이’ 유재철 “꾹 다문 노무현의 입술, 타살 아님을 확신했죠”- 한겨레. 박주연 기자.

by 원시 2022. 2. 21.

염장이’ 유재철 “꾹 다문 노무현의 입술, 타살 아님을 확신했죠”
박주연 기자입력 : 2022.02.20 09:21 


불법체류 노동자부터
6명의 전직 대통령까지
수천명 마지막 길 배웅

유재철씨가 지난 2월 15일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서 전직 대통령들을 포함해 자신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고인들의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유재철씨가 지난 2월 15일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서 전직 대통령들을 포함해 자신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고인들의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유재철씨(63)는 매일 아침 6시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작은 불상 앞에 촛불 3개를 켜고 향을 피운 후 기도를 한다. 그가 배웅한 고인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기도다. 그는 스스로를 ‘염장이’라 부른다. 염장이는 ‘염습(殮襲)’을 하는 사람이며, 염습은 고인을 마지막으로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혀 관에 모시는 일이다. 유씨는 염습 외에도 장례지도사로서 매장이나 화장, 묘소 조성, 봉안 등 장례 전반의 일을 진행한다.
지난 29년 동안 그의 위로를 받으며 떠난 고인은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머물던 불법체류노동자·무연고자부터 최고 권력 또는 재력가에 이르기까지 수천명에 달한다. 최규하·노무현·김대중·김영삼·노태우·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 여섯명도 포함된다. 그에게 ‘대통령의 염장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일붕·법정·숭산·법전·무진장 등 큰스님들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의 마지막 길도 그가 배웅했다.
유씨는 최근 에세이 <대통령의 염장이>(김영사)를 펴냈다. 전직 대통령뿐 아니라 그가 곱게 단장해 이승을 떠나보낸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2월 15일 유씨를 인터뷰했다.
유재철씨는 매일 아침 6시면 작은 불상 앞에 촛불 3개를 켜고 향초를 피운 후 자신과 인연을 맺은 고인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한다. 29년째 하는 일이다. / 우철훈 선임기자
유재철씨는 매일 아침 6시면 작은 불상 앞에 촛불 3개를 켜고 향초를 피운 후 자신과 인연을 맺은 고인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한다. 29년째 하는 일이다. / 우철훈 선임기자

-전직 대통령 여섯분의 장례를 잇따라 맡게 된 첫 단추가 최규하 전 대통령 서거였다지요.
“염장이로 일하면서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어요. 2005년 ‘한국의 단체장(葬)’으로 석사 논문을 쓰고 싶어 행정안전부 의정팀에 연락했죠. 대통령 장례식 자료가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대통령기록물은 30년간 공개할 수 없다고 해요. 대신 육영수 여사 기록물은 막 비밀해제가 됐다면서 주더라고요. 별 도움이 안 됐어요. 이듬해 10월 새벽 1시에 TV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속보로 떴어요. 장례식장으로 무작정 달려갔죠.”
-부르지도 않았는데요.
“그랬죠(웃음). 가보니 비서진들은 뭘 먼저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더라고요. 명함을 주며 돕겠다고 했어요. 당시 저는 대학원생인 동시에 강의도 맡고 있어 명함에 장례문화학과 외래교수로 찍혀 있었거든요(웃음). 비서진들이 아침에 보자고 해요. 다음날 아침 종묘사직의 제사를 맡고 계신 인간문화재 이건웅 선생님과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왕실 장례를 진행한 이홍경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갔어요. 비서에게 두분을 소개했더니, 마침 잘됐다며 최 전 대통령의 유지가 적힌 파일을 꺼내 보이더라고요.”
-유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최 전 대통령은 돌아가시기 전 직접 자신의 장례와 제사 방식을 정리해 놓으셨어요. 이건웅·이홍경 선생님은 격을 높여 왕실 장례 방식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유족은 흔쾌히 동의했고, 염은 제게 맡기셨죠. 마침 장례식장에 온 한 스님이 저를 알아보고는 제가 이전에 수만명이 모여든 큰스님들의 다비식을 진행한 사실을 유족에게 알렸거든요. 직후 박정희·윤보선 전 대통령 장례식 자료 복사본도 행안부 의정팀으로부터 받았어요. 전직 대통령 장례를 왕실 방식으로 치른 건 그때가 유일했어요.”


2015년 11월 23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손명순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유가족 제공
2015년 11월 23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손명순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유가족 제공


“최규하 전 대통령 서거 때 대통령 장례 첫 단추 끼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관상 훼손된 부위 거의 없어
젊은이 못지않게 다리 근육 단단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

-왕실 방식의 염습은 일반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돌아가신 분의 수의 겉옷을 입혀드릴 때는 보통 두가지 방법이 있어요. 다리를 들고 엉덩이 밑으로 겉옷을 넣어 입히는 게 한 방법이에요. 또 다른 방법은 환자복을 입히듯 어깨와 허리를 옆으로 세워서 반쯤 말아놓은 겉옷을 넣은 다음, 다시 몸을 반대로 돌려 겉옷을 펴고 팔을 끼워 입히는 방법이죠. 왕실에서는 하의를 입히고 여러 사람이 고인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다음, 시상대에 펼쳐놓은 겉옷에 고인을 내려 양팔을 끼워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의해 서거했어요. 염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나요.
“아쉽게도 없었어요. 박정희·윤보선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장례는 교보문고와 종로2가 사이에 있던 중앙장의사라는 곳에서 진행했어요. 장의업을 하던 분이 돌아가시고 후손들도 가업을 잇지 않으면서 문을 닫았죠.”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은 ‘다행히 깨끗하셨다’고 책에 기술했어요. 표정은 어땠습니까.
“두 눈은 감겨 있고 입술은 꾹 다물고 계셨어요.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부에서 타살 의혹을 제기했지만 저는 타살이 아님을 확신했어요. 타살일 경우 얼굴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겁먹거나 놀란 표정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에요. 노 전 대통령은 피는 많이 흘렸지만, 외관상으로는 훼손된 부위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손과 발뒤꿈치 등 몇군데 외에는 꿰매드린 부위가 거의 없었어요.”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후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운구행렬이 숭례문 앞을 지나고 있다. 2000개의 만장이 펄럭였다. / 김기남 기자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후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운구행렬이 숭례문 앞을 지나고 있다. 2000개의 만장이 펄럭였다. / 김기남 기자


사업 실패 후 스님들과 대화하며 힘 얻어
광주에서 열린 전국불교청년대회 참가
상조회사 운영하던 청년회원의 권유로
주말마다 광주로 내려가 염습 배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엠바밍(emba- lming·시신 부패 방지를 위해 몸속에 약품을 넣으면서 피를 빼내는 작업)을 했지요.
“냉방 장치가 열악한 봉하마을 마을회관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7일장을 진행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2009년 5월 29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사용된 만장 2000개를 준비하는 과정은 ‘기적’에 가까웠다. 불과 이틀 만에 만장에 글씨를 쓸 서예가를 섭외하고 만장 깃대인 대나무도 그만큼 구해야 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조계사에 연락했고, 조계종 총무원장이셨던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시는 모습이 방송을 타자 전국의 서예가들이 몰려들어 하루 반 만에 만장 1200장에 글씨를 써줬다”고 했다. 남은 800장은 서예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썼다. 이후 행안부는 “이유는 묻지 말라”며 어렵게 구한 대나무 대신 PVC 파이프로 만장 깃대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중에 언론보도를 통해 만장에 쓴 대나무가 죽창이 돼 청와대로 향하게 될 위험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염습도 직접 했습니까.
“유일하게 제가 염습을 안 해드린 분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에요. 고인의 비서실장을 했던 박지원 당시 의원(현 국가정보원 원장)이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측에 사전에 맡겼거든요. 하지만 다른 대통령의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빈소와 시신 안치, 분향소 운영과 관리, 영결식 후 운구 행렬 등 장래 전반의 진행은 제가 맡았어요.”
-노태우·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습니까.
“두 분 모두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병석에 계셔서 많이 수척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얼굴이 몹시 초췌하셨어요. 그런데 전 전 대통령은 만져보니 젊은이 못지않게 다리 근육이 정말 단단했어요. 운동을 열심히 하신 것 같았어요. 두 분 모두 고인이 누울 관 바닥을 한반도 모양의 꽃장식으로 해드렸어요. 두분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물을 것이고, 저는 염장이로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다해 고인을 잘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는 영정에 두르는 검은 띠를 없앴지요.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 때는 상주가 왼팔에 차던 완장을 없애고 베로 만든 상장을 왼쪽 가슴에 달게 했고요. 운구병들이 착용하던 마스크와 장갑도 벗게 했고요.
“모두 우리 전통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왼팔에 두르는 검은 띠는 일제의 잔재이고, 운구병들의 마스크와 장갑은 군사문화의 하나예요.”
그는 경기도 광주 태생이다. 다섯 살 때 가족이 서울 천호동으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는 항아리 장사와 쌀집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전문대학 졸업 후 군에서 제대한 다음, 부자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크게 벌렸다가 큰돈을 날렸다. 당시 아파트 3채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한강에 뛰어들 생각을 할 만큼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위해 안암동 고려대 뒤쪽 개운사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게 인연이 돼 스님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힘을 얻었다. 이후 학원 운영도 하고, 형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도 일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염습 / 유재철 제공
염습 / 유재철 제공


“우리 집은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가족이 손수 염해
처음 염습 배우러 간 날부터 시신에 대한 두려움 없었죠”

-어쩌다 염장이가 된 건가요.
“어머니 따라 절에 가서 공부하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법륜스님, 암도스님도 뵀고요. 자연스럽게 대한불교청년회에 가입했죠. 그러다 1994년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전국불교청년대회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청년회원 2명이 상조회사를 만들어 3년 만에 큰돈을 벌었다는 거예요. 초기자금이 없어도 된다면서, 나도 배워보라고 권했어요. 이후 가족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주말마다 광주로 내려갔어요.”
-시신을 만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집은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가족이 손수 염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시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만으로 서른다섯 살에 처음 염습을 배우러 간 날부터 그랬어요. 그날 고인은 할머니였어요. 여자 염사가 염을 주관했고, 저는 옆에서 그분을 따라 했어요. 몸을 닦아드릴 때 할머니의 찬 피부가 손에 닿을 때마다 왠지 애틋하게 느껴졌어요. 이 일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특히 유족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하실 때 큰 보람을 느껴요.”
불교와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된 염장이 인생. 그는 1996년 6월 25일 일붕스님이 입적한 날, 처음으로 큰 장례를 맡았다. 7일장에 수많은 조문객이 몰렸다. 염습하는 내내 스님들로부터 “왜 발을 들어서 등 뒤로 장삼을 올리느냐?” “옷고름도 못 매느냐?” “왜 그렇게 승복을 입히느냐?”는 타박을 들어야 했다. 허둥대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후 큰스님들이 입적할 때마다 그는 단골로 불려갔다.
-투병생활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 스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술이 인상적이더군요. 잠깐 잠드신 것처럼 보여 흔들어 깨울 뻔했다고요.
“표정이 몹시 편안해 보였어요. 법정스님은 수의 대신 평소 즐겨 입던 승복을 입히고 관도 준비하지 말고 사리도 찾지 말라고 유지를 남기셨어요. 하지만 고민이 됐어요. 3월 초여서 송광사 다비장까지 가는 길이 꽁꽁 언데다 경사로여서 남자 걸음으로도 30분은 걸리거든요. 그런 길을 관 없이 어떻게 이동해야 할지…. 결국 묘수를 냈죠. 법정스님이 오대산 암자에서 책을 읽거나 명상하실 때 쓰던 대나무 평상을 서울로 가져오게 했어요. 거기에 법정스님을 누이고 혹시 운구 중에 법체가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광목으로 평상에 스님을 살짝 묶은 후 옮겼어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 등의 장례도 진행했는데, 유명인의 장례만 맡습니까.
“아니에요. 오래전에는 불법체류하다 사고로 숨을 거둔 이주노동자들이나 무연고자의 염습도 많이 했어요. 안타까운 건 상당수 한국인 고용주들이 노동자가 사망해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고인의 신원이 불분명하니까 2~3℃ 상태인 시립병원 안치실에 그냥 방치되면서 시신이 심하게 훼손돼요. 뒤늦게라도 가족이 알게 돼 본국 송환을 요청하면 엠바밍을 해야 하는데, 부패가 많이 진행돼 있어 약품을 투입할 혈관조차 찾기 어려워요. 그러니 고인을 온전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법정스님이 입적한 후 서울에서 송광사 다비장으로 법체를 이동할 때 관 대신 법정스님이 오대산 암자에서 사용하던 평상을 이용했다. / 유재철 제공
법정스님이 입적한 후 서울에서 송광사 다비장으로 법체를 이동할 때 관 대신 법정스님이 오대산 암자에서 사용하던 평상을 이용했다. / 유재철 제공


정부의 무연고자 장례 입찰제 실시로
염습도 안 한 채 화장장으로 보내는 경우 많아
“법 바뀌어 안타까운 상황 오지 않았으면”

-끝내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무연고 사망자는 어떻게 하나요.
“스님이 말씀하셔서 무료로 해드렸어요. 무연고자 염습을 정성껏 해드리고 나면 이상하게 일이 갑자기 많이 들어오는 등 보답이 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어요. 정부가 무연고자 장례 입찰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가격을 가장 낮게 적어낸 장례업체가 선정되다 보니 병원 시트에 고인을 싸서 염습도 안 한 채 관에 넣어 화장장으로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에요.”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장례협회도 있고, 염습을 비롯해 봉사하고자 하는 일반인도 많이 계세요. 수의·관 등 장례에 꼭 필요한 실비 70여만원만 정부가 제공하면 무연고자라고 해도 고인의 마지막을 잘 보내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저는 법이 바뀌면 좋겠어요.”
-삶처럼 죽음에도 계급·계층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돈의 유무에 따라 장례식 규모나 장례용품의 수준 차이는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제게 모든 이의 죽음은 다르지 않아요. 저마다의 삶과 죽음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기 때문이에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기마놀이하다 떨어졌을 때도, 2015년 고속도로에서 고라니가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을 때도 유체이탈 경험을 했어요. 2015년 교통사고 때는 전복된 자동차의 열린 창문으로 겨우 빠져나와 살았는데, 그때 제 힘으로 빠져나온 것 같지 않았어요. 누군가 저를 창밖으로 확 빼낸 느낌이었죠. 저와 인연을 맺은 영가(영혼)들이 도와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 외에도 신기한 경험이 몇 번 더 있었어요.”
‘국가장’으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의 장례문화의 획일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인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기획을 통해 노래나 춤, 시 낭송 혹은 생전 고인의 영상 관람 등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 문화로 바뀌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자신이 직접 기억하고 준비한다면 인생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29년 동안 수천명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면서 얻게 된 지혜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죠. 오늘을 열심히 살고, 지금 내가 만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 닥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