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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

구로공단에서 어느 날

by 원시 2016. 8. 10.

2012.10.16 17:22

‘탄’과 ‘칼’

원시 조회 수 532 댓글 1


어느날 회사에서 돌아와보니 출입문이 열려져 있었고, 열쇠는 박살나 있었다. 방 옷장 서랍은 열려져 있었다. 없어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져갈 물건이나 증거로 잡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개X의 자식들이...’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 날 밤 방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잔업을 해서 극도로 피곤한데..... ‘잡범들이겠지. 설마 경찰은 아니겠지.’ 순간 별의별 생각이 스쳐갔다. ‘아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가......여기에서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대한 액션이 뭔가?’ 방문을 열고 부엌에 있는 칼을 머리맡에 두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니, 부적의 효과는 있었다.


어제 <레디앙>기사, http://www.redian.org/archive/43542 화장실 바로 앞 휴게실 사진을 보다. 회사 직원 혹은 노동자에 대한 태도가 강산이 2번 3번이 변했는데도 변한 게 없다. 그런 현실을 바꿔보겠다던 우리의 현재 모습을 잠시 생각해보다. 진보신당 사람들, 그리고 당원들은 아니지만 아직도 변혁의 꿈과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심정은 이 순간 어떠할까?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다 끌어들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온라인으로만 현실을 보는 내 이야기만 간결하게 하는게 낫겠다.


집안이 털린 느낌이다.


통진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을 유권자 90%는 구별하지 못한다. 512 통합진보당 폭력사건은 프로야구 중계방송되듯이 전국으로 중계되었고, “진보정치하는 너희들도 알고 보면 새누리당 민주당 정치꾼들과 똑같은 놈들이다”라는 극도의 냉소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다. “너희들이 정권을 잡으면 더 해처먹을 놈들이다”이라는 모멸적인 발언을 하는 세력들도 있다. 사람들은 의식화운동을 거치지 않더라도 자기 오감 체험에 따라 자기 생각을 바꾼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혹은 거꾸로 한국인의 특유의 ‘속도전 망각’이라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도, 만회의 시간은 최소 5~6년, 길게는 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들 정치적으로 억울하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일자리 창출과 밥그릇 깨부수기 다툼에 직접 동참하지도 않았다. 베테랑 혁명가에게는 이런 상황도 다 짊어지고 가야 할 역사적 책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타의반 자의반 지쳐버린 수분 부족으로 탈진 상태에 이른 많은 평당원들에게는 ‘심리적 박탈감’과 ‘사기 저하’가 자리잡고 있을 것같다.


그래서 집안이 털린 느낌이 든다. 황망함과 허탈감이 그것이다.


이십여년 전 방이 털렸을 때 ‘방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다. 부엌칼이라도 들어 ‘자기방어’를 해야했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한 순간에 다 깨질 수 있으니까.


2012년 당이 처한 상황, 또 당 바깥 동료들이 부딪힌 상황은 그 당시와는 또 다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적어도 수 만명이 지난 10년간 자기가 벌어서 낸 자비, 자원봉사시간들, 무엇보다도 선거때마다 마음 졸이고 주변의 걱정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살아야하는 심리적 압박, 빚져서 더 이상 당활동을 할 수 없는 분들......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노동중심성, 전태일 정신이다. 그런데 노동중심성은 전국 1만여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중심’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그 말의 정치적 의미가 나타날 것이다. 전태일 정신에 대한 강조, 그런데 왜 자꾸 집회시 민중의례와 같은 말처럼 들리는가? 역설적이게도 또 드라마 같지만, 전태일 누이는 민주당 비례대표 1번 국회의원이다. 


전태일정신은 정신이고 그 누이 전순옥의 길은 또 다르다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것을 이미 말해주고 있다. 전태일 정신은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과 같을 뿐이다. 미싱사 전태일의 죽음도, 80년 5월 광주항쟁도, 87년 6월 시민항쟁, 7-8월 노동자 투쟁은 역사적으로 재해석되고 재배치되고 재관행화되고 재법률화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무형의 공공 자산일 뿐이다.


내가 구로공단에 처음 갔을 때 느낀 점은 공포였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리에 기가 죽은 것이다. 아침 10시~12시 사이 구로 제 2공단을 안쪽을 걸어가는데, 거리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느 공장에서 울려나오지도 측정이 되지 않는 엄청난 큰 기계음, “쿵 쾅”하는 소음들이 귀청을 때리며 사람 기를 팍팍 죽였다.


이 곳에 사는 노동자들이 누군인지 알고 있다.어린시절 논바닥에 비닐 축구공으로 축구하던 맹윤기, 유철종 형제들, 아랫마을 신씨네 누이들, 화담마을 송창식을 ... 내가 읽은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 엥겔스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런 것과 굳이 연결시켜 필연적으로 무슨 논증을 할 필요는 없었다. 현실은 더 간단명료했다.


 나랑 동네에서 축구할 친구들이 서울로 돈 벌러 가버렸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향을 떠나온 이유가 있고 인생설계가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살기 바빴으니까, 신림 4거리 -> 신대방동 -> 구로공단 (요새는 디지털 역으로 바뀌었다고함) 지하철 2호선 두 정거장만 가면, “내가 흘린 땀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이 된다”는 표어가 붙어있는 산업공단 단지, 구로공단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도시공간’에 대해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복덕방 이름도 ‘광주 복덕방’, 가리봉 오거리 시장 안에 김치가게는 ‘충남상회’, 다들 자기 고향 이름을 붙이고 살았다. 보증금 100만원, 월세 7만에 시작했고, 주인집 아줌마의 시어머니되시는 분은, ‘어이 총각, 방 넓고 좋아, 아가씨만 데려오면 쓰것구만’ 그러니까 내가 운이 좋아서 좋은 방을 얻었다는 것이다. 어른께서 그렇게 또 ‘인생의 격려’ 차원에서 말씀하시니, 난 예의갖춰 ‘감사합니다’ 했다.


문제는 연탄이었고, 연탄가스와의 싸움이었다. 그 집은 화장실이 골목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연료는 연탄이었다. 당시 한국의 큰 도시에는 3저 호황의 결과로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 도시들까지 아파트가 미친듯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연립주택에도 연탄에서 기름이나 천연가스가 보급되었다. 


여긴 ‘아직인’ 동네, 예외 공간이었다. 주인 아줌마와 할머니는 연탄가스 염려말라고 하셨지만, 우리 선배 한분은 인천에서 연탄가스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실은 이건 큰 문제였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첫 날은 오후에 연탄을 피우고 2시간 간격으로 시계를 맞춰놓고 잠들었다. 깨어보면 내가 살아있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할 것까지야...그렇지만, 당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자구책은 다 동원했다.


‘자기 방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잠시 과거를 뒤돌아보다. 이런 회고담을 할 때는 아니지만. 열정과 패기, 의분도 중요하지만, 어이없는 우연적 변수, 연탄가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 더 중요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