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2017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국면, 민주당은 조승식 전 검사를, 국민의힘은 박영수 전 검사를 각각 '특검'으로 추천했었다. 당시 나 역시, 특검 후보들 중에, 조승식이 더 유명해서, 조승식이 될 줄 알았는데, 대중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박영수씨가 특검이 된 것을 보고 좀 의아해 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특검 임명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힘이 추천한 박영수를 박근혜가 선택했다고 본다.
역사의 아니러니다.
박영수가 특검이 되었기 때문에, 대장동 50억 클럽, 가짜 수산물 김태우 로비 사건 등으로 지배층의 '연락장교 Liaison 리에종' 역할을 어떻게 박영수가 했는가가 전 사회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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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인터뷰]‘악질 검사’ 훈장 달고 퇴임한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 사회
2008.04.08ㅣ뉴스메이커 769호
“한국 조폭 성장에 정치권이 일조했죠”
[아주 특별한 인터뷰]‘악질 검사’ 훈장 달고 퇴임한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조승식(56) 전 대검 형사부장. 그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검사 조직과 조직폭력배 세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검사 시절 부임하는 곳마다 현지 폭력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올렸다. 호남 주먹의 대부 이육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영화 ‘친구’에 등장한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도 그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지 못했다. 조직폭력배들 사이에서 그는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로 통했다. 그런 그가 28년 6개월 동안 몸담았던 검찰을 떠났다. 동기가 검찰총장에 오를 경우 부담을 주지 않게 떠나는 ‘용퇴’ 전통에 따라서다. 최근 법무법인 한결의 대표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은 그를 만났다.
때는 1990년 5월 19일 오전 10시. 서울 동부이촌동 미주아파트 부근 제일사우나 앞에 3000cc짜리 고급 승용차가 들어섰다. 근처에서 잠복하던 수사관들은 잔뜩 긴장하며 승용차를 주시했다. 운전자를 남긴 채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린 40대 초반의 남자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사우나탕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욕조에 느긋이 앉아 몸을 푸는 사내. 그러나 탕 안에서도 그를 감시하는 수사관의 눈길이 있다는 사실을 사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목욕을 마치고 사우나탕을 나서는 순간 체포됐다. 건장한 4명의 남자(수사관들)가 그를 덮쳤고, 권총을 빼든 한 남자는 “꼼짝 말라”고 소리치더니 이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날 체포된 사람은 대한민국 깡패의 대명사, 김태촌(당시 42세)이다. 그리고 권총을 빼든 이는 바로 조승식(당시 38세)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다.
조승식 한결 대표 변호사는 ‘조직폭력배 수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사시 19회로 1979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1년 군산지검에 근무할 때부터 깡패 소탕에 나서더니 2003년 천안지청장 재직 때까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조폭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독일 막스프랑크 국제형사법연구소에서 유학하고 법무부에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면 늘 깡패와 전쟁을 치렀다. 군산의 역전파·그랜드파, 부산의 칠성파·영도파·신칠성파·신20세기파, 강경의 한실파, 순천의 라이온스파, 안산의 원주민파, 천안의 아산 신미도파 등 부임하는 곳마다 현지 폭력조직들을 일망타진했다. 조폭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었다.
그가 조폭 수사를 고집한 이유는 단순하다. “나쁜 놈이기 때문”이란다. 범죄 중 가장 나쁜 게 다름 아닌 깡패짓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는 것은 같다고 해도 사기꾼은 교묘한 말로 뜯어내지만, 깡패는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쁘다는 얘기다.
조 변호사가 주먹 검사로 특히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다. 1988년은 유학 후 법무부에서 근무하던 그가 서울지검 특수1부에 배속된 해다. 당시 특수1부장은 심재륜 검사(전 부산고검장)였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조 검사는 그때부터 심 부장을 ‘사부’로 모셨다. 당시 호남 주먹의 실세이자 전국 규모의 우익단체인 호국청년연합회 회장인 이육래를 검거한 일은 두 사람의 첫 합작품이었다. 매립지 인가를 받은 부산의 사업가 송모씨를 납치해 서울 이태원의 한 사무실에 감금하면서 시가 100억 원대의 토지에 대한 양도각서를 강제로 받아낸 혐의다. 송모씨는 감금 당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조직폭력배를 잡아넣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범죄의 특성상 정보를 수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물급 수사는 몹시 까다롭다. 어지간해서는 범죄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거나 피해자 진술을 듣기 어렵다. 피해자들이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또 은신처를 수시로 옮기기 때문에 소재지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조 변호사는 “1990년 검거해 감옥에 넣은 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전자의 경우라면, 1991년 검거한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1990년 검거 당시 김태촌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상태였다. 1986년 말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의 주범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청송교도소에서 복역하다 폐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89년 1월 조건부로 석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의 인연으로 과거를 반성하며 독실한 신자가 된 모습까지 보여줬다. 대다수 사람은 그가 정말 새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런 그가 다시 감옥 신세를 지게 된 것은 1989년 가을 김씨의 지인이 청와대, 법무장관, 검찰총장, 안기부 등 관계요로에 보낸 진정서가 빌미가 됐다. 김씨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투서였다. 피해자는 20여 명이었다. 서울지검 형사부의 모 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해당 검사가 피해자를 소환해 조사하면 하나같이 피해 사실을 부정했다. 김태촌은 권력기관 곳곳에 심어놓은 정보망을 통해 진정서가 접수된 사실은 물론 조사받기 위해 지검에 불려간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은 검찰 조사를 받기 전 김씨를 먼저 만나 입을 맞춰야 했다. 조사를 받은 후에도 그들은 김씨에게 다시 불려갔다. 사건을 맡은 담당 검사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김씨의 혐의를 무혐의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보복이 무서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는 검거됐다. 조승식 검사가 수개월에 걸쳐 내사한 끝에 명백한 혐의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1989년 말 어느 날 형사부의 후배 검사가 김태촌을 수사하게 됐다며 진정서를 든 채 제 방을 찾아왔어요. ‘열심히 해봐라’고 했죠. 하지만 그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재빠르게 진정서를 복사해뒀어요. 후배가 돌아간 후 심재륜 특수1부장에게 진정서를 보여주며 상의했죠. 심 부장은 ‘피해자를 부르면 김태촌이 먼저 만나 손을 쓰니 이것은 게릴라전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전 형사부의 담당 검사에게도 비밀로 한 채 피해자들을 뒷조사해 약점을 캤어요. 그리고 어느 날 데려와서 약점을 들이대며 ‘너도 잘못하면 들어갈 수 있다. 너가 들어갈래? 아니면 김태촌의 비리를 털어놓을래?’ 하며 압박을 가했죠. 그 대신 뒷일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네가 분 것 하나로 김태촌을 잡지는 않는다’고 단서를 달았어요. 그래서 20여 명으로부터 진실을 들을 수 있었고 입단속도 제대로 했죠.”
조 검사는 전화 통화 추적과 탐문수사를 통해 김태촌이 거주하는 곳이 서울 동부이촌동의 미주아파트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씨가 매일 오전 10시쯤에는 아파트 부근의 제일사우나에 들른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후 24시간 감시했다. 문제는 그가 늘 승용차 10대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20~30명의 부하가 김씨를 호위했다. 조 검사는 다시 꾀를 냈다. 조 검사가 혹 김태촌 수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염탐하던 검찰 내 김씨의 정보원에게 되레 “형집행정지로 나온 후 나쁜 짓 한 게 없으면 걱정할 것 없다”면서도 “하지만 움직일 때 깡패들이 무리지어 다니니까 보기는 좋지 않더라”고 슬쩍 흘렸다. 이후 함께 다니는 깡패들의 수가 점점 줄더니, 검거 당시엔 운전기사 겸 경호원 한 사람만 대동했다. 조 검사의 기지가 먹힌 것이다. 조 검사가 직접 권총을 차고 체포 현장을 진두지휘한 것은 ‘큰놈을 잡을 때는 직접 움직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나름의 원칙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악질 검사’ 훈장 달고 퇴임한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김태촌 외에 제가 직접 수갑을 채워 검거한 폭력배는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이었어요. 천은 범죄 사실은 확인했는데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아 고생했어요. 실마리는 천과 깊은 관계였던 한 여인의 집을 알아내면서 풀렸어요. 그 여인의 집을 오랫동안 도청한 결과 천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거든요. 1991년 당시 천은 대구에 있었고, 철저히 공중전화만 이용했어요. 그것도 장소를 옮겨가며 여러 공중전화를 사용했죠. 다행히 하루 중 제일 먼저 쓰는 공중전화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얘기죠. 천과 여인 사이에는 애절한 사연이 있었어요.”
검찰에 조직폭력배 전담 부서가 창설된 것은 1989년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던 인신매매범, 마약사범, 퇴폐사범 등과 함께 조직폭력사범을 국민생활침해사범으로 규정, 이에 대처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지검에 민생특수부를 설치한 것이다. 민생특수부는 검사 5명, 경찰관 15명, 검찰수사관 24명으로 구성되었다. 심재륜 부장이 민생특수부장을 겸임했고, 조 검사도 민생특수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업무 처리에 한계를 느끼면서 검찰은 이듬해인 1990년 5월 전국 주요 6대 도시의 지방검찰청에 강력부를 신설했다. 철저히 조직폭력만 전담 수사하는 부서다. 때마침 같은 해 10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조폭과의 대결은 전국적으로 전면전 양상을 띠었다.
“1980년 말은 깡패들의 전성기였어요. 1987년 노태우 대통령 선거에서 공을 세웠다고 떠벌리는 깡패들이 실제 정치권과 결탁해 각종 이권에 개입했거든요. 대통령 선거 당시 엄삼탁은 안기부의 실국장급인 대선팀 팀장이었어요. 그가 주요 조직의 두목들을 조종해 우익단체를 결성하게 했죠. 폭력조직의 행사에 격려금도 줬고요.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을 구속했을 때 이강환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어요. 이강환이 무슨 행사를 하는데 안기부 지역 간부가 참석해 엄삼탁의 금일봉이라며 500만 원을 줬다는 거예요. 그 시절 안기부는 폭력배들의 이권에 노골적으로 개입했어요. 호텔 파칭코 업소 운영을 둘러싸고 조직폭력배 사이에 시비가 붙으면 안기부가 개입해 지분을 조정했어요. 어떤 정치인이 새로 짓는 관광호텔 사장에게 파칭코 운영권을 주면 검은 정치자금 안 받고 일할 수 있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건물주일 뿐 파칭코 운영권은 안기부에 있다고 대답하더래요. 결국 엄삼탁은 김영삼 정부 시절 병무청장 자리에 올랐지만,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잖아요.”
조 변호사는 조직폭력배들이 가장 들끓던 시기는 김대중 정부 때라고 한다. 골프장이나 목욕탕에서도 몸에 문신을 한 호남 주먹들이 정치권 최고 실세를 ‘형님’이라고 지칭하며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한국의 조직폭력배가 성장하는 데 정치권이 일조했다”고 단언한다.
“YS나 DJ나 자유당 시절부터 오랜 야당생활을 했기 때문에 깡패들과 친할 수밖에 없었어요. 각목 전당대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당대회 때 깡패들이 동원되는 일이 흔했잖아요. YS는 31년, DJ는 36년을 야당생활을 했어요. 36년간 깡패에게 신세를 졌으면 그건 유착이라고 표현하기보다 형, 동생 사이라고 봐야죠. 노무현 정권 때는 깡패가 맥을 못 췄어요. 아무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힘이 있어야 깡패도 붙죠. 게다가 영남 출신이잖아요. 서울은 한동안 호남 주먹들이 와서 주름 잡고 있었어요.”
조 변호사에 따르면 조직폭력을 수사하는 데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치열한 로비로 인해 수사 보안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검찰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청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인 조 변호사는 외압이나 로비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주먹들은 모략이나 음해로 반격을 가하기도 한다. 주로 술집여자와의 관계, 조직폭력배와의 골프 회동, 피의자 구타 등으로 검사를 옭아매려 한다.
조승식 변호사가 검사 시절 검거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왼쪽)과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검거 직후 모습.
조승식 변호사가 검사 시절 검거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왼쪽)과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검거 직후 모습.
“제가 깡패에게 고마운 게 딱 하나 있어요. 깡패 덕에 자기 관리 잘해서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니까요. 1983년 독일 유학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어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요. 방법은 골프 안 치고, 술집 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 노래방을 포함해 술을 파는 곳에는 일절 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피의자 구타로 곤욕을 치른 적은 있다. 1989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있을 때 보험사기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를 받은 피의자가 “조 검사의 지시를 받은 수사관들로부터 50여 시간 동안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낸 것이다. 법원은 “온몸을 맞는 등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은 인정된다”며 3000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당시 조 검사는 이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형사부에서 파견나온 경찰관들이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조직폭력배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이나 협박을 받은 일은 없었을까. 조 변호사는 “옛날 ‘수호지’를 보면 떼도둑의 불문율 제1조가 관군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검사나 형사를 건드리면 자기들이 손해라고 판단하니까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형사 하나를 칼로 찌른다고 수사하는 걸 막을 수 있나요? 서울서 형사 한 사람 찌르면 전국의 깡패를 소탕한다고 훨씬 많은 수사 인력이 투입될 텐데요. 물론 협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제가 부산에 있을 때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제가 언제 들어오느냐고 묻고 가는 깡패 같은 놈들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당시엔 늘 권총을 가지고 다녔어요. 또 서울 집으로 전화를 걸어 제 아내에게 ‘네 아들 어느 학교 다니지?’ 하면서 상욕을 퍼부으며 협박한 놈도 있어요. 하지만 잘못 판단한 거죠. 그 놈과 고향이 같은 형사에게 제가 누군지 이야기해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내 어디로 도망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군요.”
시라소니, 김태촌, 조양은은 한국의 조폭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면서 공통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양은 역시 김태촌(김은 조 목사 아들 희준씨의 이혼에도 개입했다)과 마찬가지로 조용기 목사와 친분이 깊다. 1995년에는 조 목사의 주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태촌과 조양은은 얼마 안 가 다시 악행을 해 철창 신세를 졌다. 조 변호사는 “옛날의 깡패가 아니라 새사람이 됐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라며 “연출이라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위) 1983년 독일에서 연수 시절 모습. (가운데) 2006년 가을 유럽 시찰 중 프라이부르크를 방문, 후배 부장검사와 연수 중인 후배 검사와 포즈를 취했다. (아래) 28년 6개월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나는 퇴임식 자리. 조 변호사의 손을 맞잡은 사람은 임채진 검찰총장.
(위) 1983년 독일에서 연수 시절 모습. (가운데) 2006년 가을 유럽 시찰 중 프라이부르크를 방문, 후배 부장검사와 연수 중인 후배 검사와 포즈를 취했다. (아래) 28년 6개월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나는 퇴임식 자리. 조 변호사의 손을 맞잡은 사람은 임채진 검찰총장.
“열심히 살면서 새사람이 됐음을 증명하는 건 표도 잘 안 나고 시간도 많이 걸리잖아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종교에 귀의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목사님이 속은 거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목사님이 훌륭한(조 변호사는 훌륭하다는 말과 유명하다는 말은 다르다는 단서를 달았다) 분이면 속은 것이고, 속이 시커먼 사람이면 한통속인 거라고요. 평생 살아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혹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가 본 깡패 중에는 개과천선한 인물은 없었어요.”
조 변호사는 1979년 임관 이후 22번의 인사발령을 받아 18차례 보직을 받았지만 그가 퇴임사에서 한 말마따나 소위 빛이 나는 자리에 가본 적은 없다. 강력수사통으로 ‘일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발로 뛰며 성과를 낸 그가 한직으로 돈 것을 ‘주먹 수사의 후유증’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다. 주먹 수사 과정에서 구설에 오른 검사들 중 고위직에 오른 이들이 그를 의도적으로 배척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가 명성에 맞는 제자리에 앉은 것은 2003년 대검 강력부장이 되었을 때다.
조 변호사가 퇴직 후 개업이 아닌 법무법인 한결에 둥지를 튼 이유 역시 그의 강직한 성품에 기인한다. 그는 “단독 개업을 해서 허구한 날 사건 당사자와 돈 때문에 입씨름하기가 죽기보다 싫고, 법조계에서 가끔 문제되고 있는 변호사 소개나 선임과 관련해 아직도 일부 남아 있다는 불법 관행이 싫어 법무법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가 퇴임할 때 검사 게시판에는 후배 검사들의 댓글이 순식간에 200여 개나 달렸다. 한결같이 후배들의 귀감과 표상이 된 그에 대한 존경의 말과 앞길을 축원하는 내용들이다. 그가 28년 6개월간 검사생활을 어떻게 했느냐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약력
1977 제19회 사법시험 합격
1979~ 서울지검 검사
1981~ 전주지검 군산지청 검사
1983~ 독일 MAX~PLANCK 국제형사법연구소 초청연구원
1985~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 겸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8~ 서울지검 검사
1990~ 부산지검 검사(고등검찰관)
1991~ 대전지검 강경지청 지청장
1992~ 광주지검 순천지청 부장검사
1993.3~ 대구지검 강력부 부장검사
1993.9~ 수원지검 강력부 부장검사
1994.9~ 대전고검 검사
1995.9~ 대구지검 김천지청 지청장
1996.8~ 인천지검 형사제1부 부장검사
1997.3~ 사법연수원 교수
1999.3~ 인천지검 부청지청 차장검사
2000.7~ 서울고검 검사
2002.2~ 대전지검 천안지청 지청장
2003.4 서울고검 형사부 부장검사
2003.8~ 대검찰청 강력부 부장
2005.4~ 서울서부지검 검사장
2006.2~ 인천지검 검사장
2007.2~2008.3 대검찰청 형사부 부장
“후배들에겐 유머 넘쳤던 선배”
충남 홍성 출신인 조승식 변호사는 대전중학교 시절 늘 전교에서 1, 2등을 다퉜다. 당시 대전중에서 10등 안에 들면 서울 경기고를 갈 수 있는데, 8남매 중 넷째인 그는 가정형편상 서울로 유학을 갈 수 없었다. 8남매 중 6남매가 학생이었고 형은 이미 서울로 유학을 간 상태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전고에 수석으로 입학한 그는 입학식 날부터 검도를 배웠다. 그것도 취미 수준이 아닌 선수용 검도였다. 전국 단위의 시합에도 출전했다. 그 덕분에 싸움을 잘했다. 눈이 빨라 싸움을 해도 잘 피하고 상대방의 허점을 재빨리 포착했다. 학교에서 주먹깨나 쓰는 애들에게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과 어울리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그래도 전교 1등 자리는 놓치지 않았다.
3학년 2학기는 딱 일주일만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형네 집에 살면서 틈틈이 공부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고시를 준비하면서 고등학생 때인 열일곱 살 때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고시에 합격한 후 공직자의 아내로 조용히 내조했던 아내는 자궁암으로 14년 간 투병하다 6년 전 50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사무실에 생전 전화를 거는 적도 없었고, 아무리 아파도 택시나 119를 부를지언정 남편에게 병원에 데려다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행여 자신 때문에 남편의 일에 지장이 생길까 꺼려 해서다. 조 검사는 아내가 세상을 뜬 후 1년간 매주 아내의 산소를 찾았다. 지금의 아내와는 재작년 화촉을 밝혔다.
조 변호사는 춤을 잘 추고 색소폰의 고수라고 불릴 만큼 흥이 있는 사람이다. 시간 나는 틈틈이 재즈나 트로트, 철 지난 대중가요를 색소폰으로 연주한다. 후배 검사들은 “조직폭력배들에게는 가장 악질적인 검사였을지 몰라도 후배들에게는 호탕하면서 따뜻하고 유머가 넘친 선배”로 그를 기억한다. 그는 후배 검사가 사건을 맡으면 항상 과거 비슷한 사건을 들려주며 수사에 참고하도록 배려했다. 그는 “검사생활을 잘하기 위해 업무와 관계된 사람 외에는 만나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우고 지켰다”며 “그러다 보니 뭘 배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후배들과 함께 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검사 시절이나 지금이나 새벽 4시면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나쁜 놈 잡는’ 일이 몹시 좋아 한시라도 빨리 출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오랜 습관이라고 한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1990.12.2 한겨레 보도.
조승식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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