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이란
고인돌이란
고인돌이란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을 묻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선사시대 무덤이 대부분이다.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괴석형 덩이돌 밑에 돌을 고여 지상에 드러나 있는 즉 고여 있는 돌이란 뜻인 지석묘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고인돌의 다른 이름
고인돌을 민간에서는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는 것에서 독배기, 바우배기 등 독바우로 부르고 있으며, 받침돌이 고이고 있는 기반식 고인돌의 경우 괸바우, 암닭바우로, 덮개돌의 형상을 따라 배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로 부르고 있다.
민간신앙과 관련된 이름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이 많아 장군바우라 부르고 다른 이름으로는 주암(舟岩)(배바위), 구암(龜岩)(귀암, 거북바위), 칠암(七岩)(칠성바위), 지석(支石)(괸돌, 고인돌) 으로 부르고 있다.
고인돌 출현 - 기원전 1200년 전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의 연대와 형식간의 선후에서 추정하거나 자연과학적인 연대측정 자료를 응용해 시기를 파악하는 추세이다. 과학적인 분석결과와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 볼 때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기원전 12~11세기경에 축조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종전의 기원전 12세기 설에서 단군릉 발견 이후 고인돌을 단군조선과 관련지어 절대연대에 의해 기원전 4000년 후반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이 연대는 전자상자성공명법(ESR), 열형광법(TL), 핵분열흔적법(FT) 등을 이용한 절대연대 자료를 근거로 들고 있다.
고인돌 소멸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전반에 해당하는 유물의 출토로 기원전 3~2세기설이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인돌은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1,000년 동안 만들어진 청동기시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고인돌 소멸- 선진 문화의 수용
고인돌은 왜 소멸되었을까?. 고인돌의 소멸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고인돌 후기의 사회는 지배계층의 등장과 외부로부터 선진문화의 수용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지배계층인 수장층의 등장은 기존의 각 지역을 배경으로 한 지배집단간의 이합집산에 의해 급격한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농경의 시작
농경지 확보를 위한 전쟁에서 얻어진 소산물로, 사람들의 신분이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집단안의 사람들간에 지배와 피지배층으로 다양한 계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진행되고, 한편으로는 합법적으로 정복 전쟁이 수행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의 고인돌보다는 봉분이 있는 나무널무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무덤에서는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으며 청동제 무기로 소속 집단을 강제적으로 제압하거나 의기류로 집단의 모든 의식 행위를 집행하는 것으로 이용되었다.
즉 정치와 제사를 관장하는 제정일치의 사회의 최고의 지배자임을 과시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고인돌과는 다른 무덤을 선택하게 되었다.
선진 문화의 수용
선진문화는 철기문화이다. 고인돌이 축조되는 시기의 청동기는 무기류가 주를 이루고 있고, 과장되거나 커져서 의기화되는 반면에 철기는 무기보다는 농경구 등 실생활용구들을 많이 제작하게 된다. 이 철제 농경구는 석기로 하던 작업양보다는 3~4배 가량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 도구이다. 이 농경구를 이용한 농경지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게 된다.
고인돌 축조에 따른 많은 인력 동원과 노동력의 손실은 당시 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인돌이란 무덤의 축조보다는 농업생산에 치중한 수장층 계급에게는 더 많은 생산력이 요구되었고, 그에 잉여생산물을 축적해야 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에서 고인돌 축조는 낭비이고 소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인력은 생산 활동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많은 인원이 필요없는 나무널무덤이나 움무덤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 분포한 고인돌과 거석문화
고인돌을 비롯한 거석문화의 분포는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지역,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에워싸고 있는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음
유럽의 고인돌과 거석문화
유럽의 거석문화는 모두 대서양 동안을 따라 길게 집중 분포되어 있음
북유럽의 고인돌
발트해 연안인 스웨덴 남부부터 덴마크, 네델란드 북부, 독일 등지에서 발견
서유럽의 고인돌과 거석문화
프랑스가 그 중심을 이루면서, 그 남으로 포르투칼과 스페인, 서쪽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 이르고있음
지중해 연안의 거석문화는 가장 큰 섬인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섬, 프랑스 남부인 프로방스지역, 이탈리아의 동남부반도, 아프리카 북부인 알제리, 지중해 동안인 시리아 등 곳곳에서 거석문화들이 존재
흑해연안의 고인돌은 러시아 까프까즈지역에 집중 분포
아시아지역의 고인돌과 거석문화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등 주로 인도양과
태평양 인근에 위치한 지역에서 발견
동북아시아 지역
한국, 일본 구주 북서부지역, 중국 절강성과 요령성지역에 분포
중국의 고인돌 분포수
절강성에 50여 기, 요령성에 700여 기가 분포
일본의 고인돌
고인돌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큐슈지역의 나가사키, 사가, 후쿠오카현에 집중되어 있는데, 약 600여 기로 추산하고 있음
일본의 고인돌은 우리나라와 달리 큰 것이 2∼3m 정도이고, 작은 것이 1m 내외여서 전체적으로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이 특징
탁자식은 존재하지 않고 소형 덮개돌 밑에 받침돌을 괸 기반식 축소형이 많음
지배자의 무덤
대부분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거대한 덮개돌을 채석하여 옮기는 것을 일반인들이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서이다.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을 가져야 하고, 이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음식물 등 보상할 수 있는 경제적인 부의 축적이 있어야 하며 또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해야 하는 사회적인 배경과 문화적인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고인돌을 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
고인돌이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이라는 것은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어 모두 지배자의 무덤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인돌이 떼를 지어 있기 때문에 혈연을 기반으로 한 집단의 지배자와 그 가족들의 공동 묘역으로 보는 것이다.
혈연집단의 무덤
고인돌을 혈연집단의 무덤으로 보는 것은 고인돌이 떼를 지어 있고, 대부분이 열을 지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열을 지어 있는 것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집단의 공동 묘역으로 볼 수 있다.
전사자의 무덤
고인돌의 무덤방안에 간돌검이나 간화살촉 끝부분 편들이 발견된 예가 많다. 그 출토 위치가 머리 쪽에 많으나 배 부분도 있어, 집단 간의 전쟁에서 희생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출토된 유물과 사람 뼈에 박힌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전투적인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사람의 공훈묘(功勳墓)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머리가 없는 사람 뼈의 발견이나 일본에서 머리에 박힌 청동과 간돌검편이 발견된 바 있다.
https://dolmen.or.kr/sub.php?PID=020107
화순 고인돌 유적
화순 고인돌 공원과 거석문화
미상
화순 고인돌 유적 대표 이미지
화순 고인돌
세계유산 화순고인돌 유적(화순군청)
1 개요
거대한 돌을 옮겨 만들어 놓은 기념물의 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핸지, 이스터섬의 모아이 등과 같이 형태를 가지든 안가지든, 하나이든 여러 개이든 간에 큰 바위는 우리를 압도한다. 이러한 것들을 거석문화라고하며, 우리나라의 고인돌도 여기에 속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은 한반도 남부의 화순, 고창 등의 서해안 지역이다. 특히 화순 도곡 일대에서는 보검재 계곡을 따라 약 5km에 결쳐 고인돌 6백 여기가 모여 있다. 이곳은 발견 당시부터 숲속에 위치하여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고, 이웃한 효산리에서는 화순의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깨던 채석장도 확인되었다. 이런 이유로 화순의 고인돌은 고창, 강화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고인돌의 구분
고인돌은 크게 보이는 외형에 따라 나뉜다. 기본적으로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만드는 것이다. 덮개돌이 두꺼운 바둑판과 같이 네모난 직육면체인 것을 ‘바둑판식’ 혹은 ‘기반식’이라고 한다. 탁자와 같이 넓고 얇은 판석을 덮개돌로 쓴 것은 ‘탁자식’이라 한다. 여기에 무덤방의 위치나 고임돌의 형태가 합쳐져, 고임돌 없이 큰 돌만 올라가 있는 ‘개석식’과 주변에 돌을 돌린 ‘위석식’ 등으로도 나뉜다.
탁자식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를 땅 위에 고임돌로 세워 돌방을 만들고 주검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모습으로 흡사 탁자와 같이 생겼다. 고인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판석 위에 올려진 거대한 덮개돌의 고인돌은 사실 판석의 일부가 사라져 두 개만 남은 것이다. 탁자식 고인돌로 가장 유명한 것은 강화도 고인돌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삼거리, 고천리, 오상리, 교산리 등에 위치하고 있는 강화 고인돌은 주로 고려산 북쪽 산기슭에 127기가 하나하나 흩어져 있다. 강화 고인돌은 산기슭에서 평지까지 어디에든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모두 해발 100m 이상의 높은 곳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특히 고천리 고인돌은 해발 350m 근처에 있어 우리나라 고인돌 중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바둑판식은 땅 아래에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주검을 묻고 땅 위에 고임돌을 낮게 놓은 상태에서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바둑판식과 비슷하지만 고임돌 없이 덮개돌만 얹은 것이 개석식이다. 최근 조사된 400톤이 넘는 덮개돌을 가진 김해 구산동 고인돌이 여기에 속한다. 위석식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여러 매의 판석이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로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무덤이다.
3 화순의 고인돌
화순 대신리 감태바위 고인돌군에는 덮개돌이 없어지고 고임돌만 남은 것에서부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까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모여있다. 이웃한 도곡의 고인돌군에는 덮개돌의 무게가 100톤 이상이 되는 것들도 여러 개인데, 이 가운데 핑매바위라고 불리는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7.3m, 폭 5m, 두께 4m로 무게는 280여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리 고인돌군의 발굴조사 결과, 과학적인 연대측정으로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고인돌이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 화순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효산리의 채석장이 조사되어 당시에 어떤 방법으로 돌을 자르고, 옮겼는지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
화순 효산리 고인돌 채석장은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하는데, 그 아래에 화순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아무래도 큰 돌을 산 위에서 끌고 내려오는 것이 아래에서 끌고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이곳 채석장에서는 덮개돌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깨뜨렸던 흔적과 깨다만 덮개돌도 남아 있어 당시의 기술을 살필 수 있다.
덮개돌을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쓸 돌을 찾아내거나 커다란 암반에서 떼어낸다. 암반에서 때어낼 때는 바위 결을 따라난 조그만 틈에 깊이 홈을 파고 마른 나무말뚝을 박아 넣어 고정시킨 후,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가 물을 먹어 부피가 커지게 한다. 이렇게 하면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 결을 따라 깨어지게 된다. 떼어낸 돌은 나무 썰매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거나 통나무로 받쳐서 줄로 끌어 옮기는 방법으로 채석장에서 무덤을 만들 곳까지 옮기게 된다. 무덤을 만드는 곳에서는 땅을 파거나 편평한 돌을 짜맞추어 상자와 같이 무덤방을 만든 뒤, 주변에 흙을 쌓아 올려 경사가 완만하게 둔덕을 만든다. 그리고 내부에 돌칼 등 부장품과 시신을 안치한 뒤, 덮개돌을 둔덕으로 올려 자리를 잡고, 둔덕의 흙을 제거하여 무덤을 완성한다.
고인돌의 외형을 보여주는 덮개돌은 모양이나 크기가 다양하다. 보통 10톤 미만의 돌을 덮개돌로 사용하지만 가장 큰 김해 구산동 고인돌의 경우 300톤이 넘는 초대형의 것들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실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1톤의 덮개돌을 약 1.5킬로미터 옮기는 데 16~20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5 고인들의 의미
고인돌은 일종의 ‘거석문화’에 속한다. 거석문화는 큰 돌을 숭배하는 일종의 믿음인데,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확인된다.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이나 선돌과 같은 것이 거석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들이 존재한다. 대체로 거석문화는 농경과 관련되는데, 고인돌의 덮개돌과 같은 거대한 돌을 옮김으로서 마을의 노동력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거대한 고인돌은 거대한 권력자의 무덤이라 생각된다. 거대한 돌을 옮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하고, 더 많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 당연하게 더 큰 무덤이 된다. 즉 고인돌의 크기를 통해 당시 농경사회의 노동력을 평가할 수 있고 그 노동력은 생산력과도 비례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거대한 고인돌은 거대한 권력을 나타낸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거대한 고인돌에서도 이렇다 할 만큼 권력을 상징하는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인돌은 개인적인 지배자가 아닌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진 마을 공동체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마을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마을의 성원이 모여서 만들어낸 기념물인 것이다. 그리고 계층이 분화되고 권력이 집중되면서 집단의 힘은 개인에게로 집중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거대한 외형을 가진 고인돌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의 나무널무덤으로 바뀌게 된다는 의견도 있다.
6 세계 속의 고인돌
거석(Megalith)이란 구조물이나 기념물 자체 혹은 그 일부로 사용된 돌을 말하며, 거석문화는 돌을 이용한 구조물을 총칭한다. 한반도에서는 큰 돌을 이용한 고인돌이나 선돌이 이에 해당되고, 작은 돌을 이용한 돌널무덤이나 돌무지무덤도 포함된다.
큰 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인류사에서 일반적인 현상이고, 당연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고인돌과 유사한 무덤이 확인된다. 유럽에서는 대서양 동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데, 북유럽의 발트해 연안인 스웨덴 남부부터 덴마크, 네델란드 북부, 독일 등지에서 발견된다. 서유럽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남으로 포르투칼과 스페인, 서로 영국과 아일랜드에 이른다. 흑해연안의 러시아 까프까즈 지역에서도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중해의 이탈리아에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가 분포하며,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폴리네시아지역에서도 한반도와 유사한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웃한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어 동북아시아 지역은 고인돌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동북지역에 주로 분포하는데, 석붕(石棚)이나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도 한다. 주로 높은 언덕에 이정표처럼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경우 한반도 남부의 영향으로 고인돌이 만들어지는데, 형태는 고인돌이지만 그 아래 묻혀있는 것은 독무덤인 경우도 있어, 토착 문화와 외래 문화가 섞이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인돌와 유사한 것들이 많이 보이며, 유럽에서도 고인돌이나 선돌이 자주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그 수가 많은데 한반도 남부에 약 3만여 기, 북부에 1만5천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여 세계 고인돌의 40퍼센트 이상에 해당한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거의 대부분이 무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지배자나 권력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고인돌은 농경 공동체의 풍년에 대한 기원과 수확에 대한 감사를 하늘에 표현하기 위한 농경기념물의 성격이나 주변 집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전쟁기념물과 같은 것들도 많이 확인된다. 물론 존경하는 지도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추모기념물로서의 무덤도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다. 또한 거석기념물 자체가 태양숭배와 관련되었거나, 고인돌과 같은 유적이 폴리네시아를 비롯한 대양 인근에 분포하는 점에서 해양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거대한 돌을 이용한다는 것은 인류 보편의 행위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각 지역, 각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인돌 역시 시간에 따라 권력자의 무덤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세계유산 화순 고인돌 특징
세계유산 화순 고인돌 특징에대해 알려드립니다.
화순고인돌 둘러보기
세계유산 화순 고인돌유적은 1995년 12월 2일 목포대학교 이영문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유적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을 따라 596기의 고인돌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발견당시 숲속에 고인돌이 묻혀 있는 비교적 원상 그대로였고, 고인돌의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였다. 주변환경은 영산강 지류인 넓은 평야가 있는 지석천과는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계곡에 고인돌이 있고, 인근 마을안 뿐만 아니라 주변 평지와 구릉에도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국가 사적 제410호로 지정되었고, 거점 지역별로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 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군(140기), 대신리 발굴지(46기) 등 군집별로 밀집 분포하고 있다.
1효산리 모산마을2백제고분3괴바위 고인돌4관청바위 고인돌5월곡 2재6달바위 고인돌7보검재8팽배바위 고인돌9감태바위 고인돌10감태바위 아래 여러형식의 고인돌11대신리 고인돌12대신리 지봉마을
괴바위 지구관청바위 지구달바위 지구핑매바위 지구감태바위 지구대신리 발굴지고인돌 채석장
괴바위 지구
괴바위 고인돌지구는 고양이 형국인 괴바위 고인돌을 중심으로 47기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괴바위로 불리는 이 고인돌은 원래 5개의 고임돌이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바둑판식고인돌이며 지형적으로 고양이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65m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바라다 보이며 평지를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길이 530cm, 폭 360cm, 두께 300cm인 초대형 덮개돌이다.
이렇게 주변에서 보이는 고인돌과는 달리 규모가 크고 잘 다듬어졌으며 약간 높은 대지상에 조성한 점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제단적 성격이 강하며 주변의 고인돌은 무덤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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