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ctopus /
함께 사는 친구 K가 들려준 가족 이야기다.
K는 가난한 집안의 삼형제 중 둘째다. 맏형은 그래도 나름 버젓한 직장인인데 아래 둘이 골치다. 심성들은 착한데 어영부영하다가 사회에 제대로 편입을 하지 못했다. 그중에 막내동생이 제일 골치다. 고딩 시절 엄마 장롱에서 K의 대학 등록금을 훔쳐 가출한 사건 이래 막내는 20년 내내 돈에 쫓기는 도주의 인생을 살았다.
IMF 시절, 90년대 말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는 경기 부양을 시키느라 카드 회사에 특혜를 마구 주었고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 발급받기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연회비 없어요 하나 하세요' 하고 카드 아줌마들이 천막 아래서 손짓해 부르곤 하였다. 당시 조그만 회사 말단 직원이었던 막내는 평소엔 조용하지만 남들이 추켜 주면 일시적으로 호탕해져서 혼자 술값을 다 계산해 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해서 빚이 삼사백만 원 생겼다. 직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이 정도야 갚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현금이 없어 카드 여러 장을 만들어 돌려막기를 하다 보니(카드깡이라고 한다) 1, 2년 사이에 빚은 저 혼자 힘으로 무럭무럭 잘 불어나 사천만 원이 넘었다. 손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한 돈이 무려 열 배로 뛰어 목을 조르니 귀신이 곡하고 넘어갈 노릇이었다.
카드에도 사회적 생명이 있다. 카드는 하나하나 죽어버리고 추심회사에서 독촉전화도 뻔질나게 왔을 것이다. 자세한 경위는 모른다. 어쨌든 막내는 혼자서 끙끙 가슴앓이를 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또 가출을 했다. 회사도 나가지 않고 몇 주 동안 여관방 구석에 틀어박혀 숨어 지냈다. 그동안 집에서는 막내가 실종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직장 다니는 맏형은 시간을 내지 못하니까 늦깎이로 대학원 다니던 K가 홀로 경찰서를 다녀오고 막내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며칠간 회사 근처며 집 주변을 훑고 다녔다. K도 돈이 없어 이동 중에 택시 한 번 타지 못했다. 지친 다리를 쉬러 찻집 같은 곳에 들르지도 못했다. 밥을 사먹을 때도 싼 식당을 찾느라 몇 배를 더 걸었다. 며칠 돌아다니다가 며칠 쉬고, 또 며칠 다니다 며칠 쉬고 하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막내는 공포와 고독을 견디지 못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막내가 돌아와 기쁜 것도 잠시, 자초지종이 밝혀지며 반갑잖은 빚더미도 함께 왔다. 며칠 뒤 K의 어머니는 K를 불러 통장을 하나 건네 주며 '해지를 좀 시켜 달라'고 했다. K 어머니는 문맹이라 은행에 볼일을 보러 가질 못한다. 국졸인 K 아버지는 재래시장 관리인을 하고 국민학교도 다 못 다닌 K 어머니는 식당 설거지며 아파트 청소 일을 했다. K 어머니는 그렇게 번 얼마 안 되는 돈을 쪼개고 또 쪼개 식구들 몰래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왔다. 아마도 결혼 날짜를 앞둔 K에게 주려고 모은 돈이었던 것 같다.
올해 5월, 부산저축은행 부도 피해자인 한 가난한 파출부 할머니의 탄원서가 한겨레에 실렸다. 위험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은행 직원의 권유만 듣고 가입한 후순위채권 1천 4백만 원과 예금 1천만 원을 하루아침에 날리게 된 할머니는 이렇게 통곡했다. "나는 그저 내가 평생 동안 모은 돈을 은행에 맡겼을 뿐입니다. 나라에서 은행이라 하여 평생을 모은 내 평생의 세월을 믿고 맡겼습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내가 모은 돈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된다는 상상도 못했습니다...내 돈을 돌려준다면 나는 발가벗고 춤도 출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 내가 저금한 돈을 빼앗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가슴이 뛰다가도 한에 눈물이 납니다. 나는 그 돈 포기 못합니다. 내 평생의 세월이 담긴 그 돈은 나와 남편의 생명같은 돈입니다. 내 돈 돌려주세요. 나는 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http://bit.ly/smmL9K
K 어머니의 심정이 이랬을까? K 어머니가 안 먹고 안 입고 피땀으로 모은 돈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구좌에 그만큼의 숫자로 옮겨졌을 텐데, 이 공포스런 박탈과 이동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대학에 못 보낸 것도 안타깝고 늘 마음에 맺혀 있던 막내아들이 빼앗아 간 것일까? 아니면 무분별하게 신용을 남발한 금융회사가, 아니면 그런 정책을 시행한 정부가 빼앗아 간 것일까? 여하튼 빚의 절반은 그렇게 갚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돈이 변제될 때까지 막내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경제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다. 원래 무뚝뚝하고 팍팍한 식구들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더 생겼다. 자기를 찾아다니느라 생고생을 한 K한테도 살가운 말 한 마디를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막내는 친척 형의 휴대폰 대리점에서 근무하게 되어 형편이 좀 나아졌다. 장가를 들어 아이도 둘 낳았다. 재개발을 기대하고 융자를 받아 낡은 집도 하나 사 두었다고 한다.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는 문제 때문에 자동차도 한 대 뽑았다. 은행 거래나 전화 명의는 아내의 이름으로 해결했다. K 아버지는 아들한테 돈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헤프다고 틈만 나면 야단을 쳤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이룬 남자의 책임감이라는 것은 많은 경우 당장 눈앞의 물질로 표현되지 않으면 가정 생활이 너무 막막해지지 않는가?
야.. 이제는 별 사고 없이 살아가나 싶었는데, 작년에 갑자기 막내가 또다시 가출했다는 연락이 왔다. K의 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몇 번 날아왔다. "내가 못나서 미안해, 미안해, 죽을 거야. 나 없어도 OO 엄마한테 잘 해줘..." 상황을 알아 보니 막내가 대리점에서 본사에 납입할 돈을 돌려 써버리고 사라졌다는 거였다. 그 외 여기저기서 꿔다 쓴 돈을 합치면 또 기천만원이었다. 10년 동안 경제적 상승이 전혀 없었던,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빚도 없는 최저생활자 K가 또다시 막내동생을 찾아 길거리로 나섰다. K는 "지난번에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서 이젠 이력이 붙었다. 대충 어느 여관일지 짐작이 간다"며 웃었다. 장담과는 달리 찾지는 못했지만...
막내는 또다시 몇 주 후에 스스로 돌아왔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가족들이 눈에 밟혀서 죽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돈이 얽혀 있는 친척들 간에 대판 싸움이 났다. 몇몇끼리는 죽을 때까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할 관계가 되었다. 막내가 줄곧 휴대폰을 꺼놓고 전화를 받지 않자 대리점 친척 형은 만만한 K에게 계속 독촉 전화를 걸어 호소했다. 맏형이 일부를 갚았고, 또 근 10년 쪼개고 쪼개어 약간의 저금을 만들어 놓은 K 어머니가 이번에도 K를 시켜 두번째 통장을 깼다. 이 빚도 청산되기까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막내는 몇 달 후에 대형마트 운반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은 병탈이 많았다. 집을 내놓았지만 당연히 요즘 같은 때 팔리지 않는다. 차는 팔았다. 아주 가끔씩 돈을 좀 빌려달라고 K에게 전화가 온다. 원래는 맏형한테 꾸곤 했지만 이제는 차마 볼 낯이 없어서 연락을 못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세까지 합쳐 한 달에 팔구십만원으로 간당간당하게 2인 가계를 유지하는 K도 십중팔구 여유가 없다. 단 몇십만원이라도 갑자기 마련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잡힐 집도 차도 소득도 없고, 그런 돈을 꿀 친구도 없고, '신용불량자도 한 통화면 빌려줘요' 하는 러시앤캐시 무과장한테 전화를 걸기는 너무 무섭다. '채무'는 통장과 통장 사이의 숫자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통으로 실재한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은 한 가닥 자존심이 무너지고, 그 소리를 들어 주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상처가 패인다. 일흔이 넘은 부모님들은 두 차례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집으로 날아오는 낯선 고지서 한 장에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다.
K의 가족은 그야말로 "회복하는 경제 통계와 후퇴하는 인간의 삶"(<글로벌 슬럼프> 51쪽) 속에서 살아왔다. 김대중 정부가 IMF를 극복했다지만 그 일환으로 찍혀나온 카드들은 대란을 일으켜 무수한 신용불량자들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소득은 2만 불을 넘었지만 부동산은 폭등했고 막내가 그랬듯 너나 할것없이 전세 끼고 집 한 채 더... 투기에 뛰어들었다. 카드깡을 하듯이 아파트깡을 했다. 그렇게 2백만 하우스푸어가 양산됐다. 10억 가까운 재건축 아파트 한 채를 사놓고 나서 주부들은 은행 융자빚을 갚기 위해 마트 종업원으로 일하거나 지역 통계조사원 알바를 뛴다.
K의 막내동생, 그리고 K의 삶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몸도 여러 군데 고장날 것이고 노동력도 점점 저하된다. 나도 막내나 마찬가지로, 용기도 없으면서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함께 사는 친구 K가 들려준 가족 이야기다.
K는 가난한 집안의 삼형제 중 둘째다. 맏형은 그래도 나름 버젓한 직장인인데 아래 둘이 골치다. 심성들은 착한데 어영부영하다가 사회에 제대로 편입을 하지 못했다. 그중에 막내동생이 제일 골치다. 고딩 시절 엄마 장롱에서 K의 대학 등록금을 훔쳐 가출한 사건 이래 막내는 20년 내내 돈에 쫓기는 도주의 인생을 살았다.
IMF 시절, 90년대 말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는 경기 부양을 시키느라 카드 회사에 특혜를 마구 주었고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 발급받기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연회비 없어요 하나 하세요' 하고 카드 아줌마들이 천막 아래서 손짓해 부르곤 하였다. 당시 조그만 회사 말단 직원이었던 막내는 평소엔 조용하지만 남들이 추켜 주면 일시적으로 호탕해져서 혼자 술값을 다 계산해 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해서 빚이 삼사백만 원 생겼다. 직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이 정도야 갚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현금이 없어 카드 여러 장을 만들어 돌려막기를 하다 보니(카드깡이라고 한다) 1, 2년 사이에 빚은 저 혼자 힘으로 무럭무럭 잘 불어나 사천만 원이 넘었다. 손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한 돈이 무려 열 배로 뛰어 목을 조르니 귀신이 곡하고 넘어갈 노릇이었다.
카드에도 사회적 생명이 있다. 카드는 하나하나 죽어버리고 추심회사에서 독촉전화도 뻔질나게 왔을 것이다. 자세한 경위는 모른다. 어쨌든 막내는 혼자서 끙끙 가슴앓이를 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또 가출을 했다. 회사도 나가지 않고 몇 주 동안 여관방 구석에 틀어박혀 숨어 지냈다. 그동안 집에서는 막내가 실종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직장 다니는 맏형은 시간을 내지 못하니까 늦깎이로 대학원 다니던 K가 홀로 경찰서를 다녀오고 막내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며칠간 회사 근처며 집 주변을 훑고 다녔다. K도 돈이 없어 이동 중에 택시 한 번 타지 못했다. 지친 다리를 쉬러 찻집 같은 곳에 들르지도 못했다. 밥을 사먹을 때도 싼 식당을 찾느라 몇 배를 더 걸었다. 며칠 돌아다니다가 며칠 쉬고, 또 며칠 다니다 며칠 쉬고 하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막내는 공포와 고독을 견디지 못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막내가 돌아와 기쁜 것도 잠시, 자초지종이 밝혀지며 반갑잖은 빚더미도 함께 왔다. 며칠 뒤 K의 어머니는 K를 불러 통장을 하나 건네 주며 '해지를 좀 시켜 달라'고 했다. K 어머니는 문맹이라 은행에 볼일을 보러 가질 못한다. 국졸인 K 아버지는 재래시장 관리인을 하고 국민학교도 다 못 다닌 K 어머니는 식당 설거지며 아파트 청소 일을 했다. K 어머니는 그렇게 번 얼마 안 되는 돈을 쪼개고 또 쪼개 식구들 몰래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왔다. 아마도 결혼 날짜를 앞둔 K에게 주려고 모은 돈이었던 것 같다.
올해 5월, 부산저축은행 부도 피해자인 한 가난한 파출부 할머니의 탄원서가 한겨레에 실렸다. 위험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은행 직원의 권유만 듣고 가입한 후순위채권 1천 4백만 원과 예금 1천만 원을 하루아침에 날리게 된 할머니는 이렇게 통곡했다. "나는 그저 내가 평생 동안 모은 돈을 은행에 맡겼을 뿐입니다. 나라에서 은행이라 하여 평생을 모은 내 평생의 세월을 믿고 맡겼습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은행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내가 모은 돈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된다는 상상도 못했습니다...내 돈을 돌려준다면 나는 발가벗고 춤도 출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 내가 저금한 돈을 빼앗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가슴이 뛰다가도 한에 눈물이 납니다. 나는 그 돈 포기 못합니다. 내 평생의 세월이 담긴 그 돈은 나와 남편의 생명같은 돈입니다. 내 돈 돌려주세요. 나는 그 돈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http://bit.ly/smmL9K
K 어머니의 심정이 이랬을까? K 어머니가 안 먹고 안 입고 피땀으로 모은 돈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구좌에 그만큼의 숫자로 옮겨졌을 텐데, 이 공포스런 박탈과 이동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대학에 못 보낸 것도 안타깝고 늘 마음에 맺혀 있던 막내아들이 빼앗아 간 것일까? 아니면 무분별하게 신용을 남발한 금융회사가, 아니면 그런 정책을 시행한 정부가 빼앗아 간 것일까? 여하튼 빚의 절반은 그렇게 갚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돈이 변제될 때까지 막내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경제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다. 원래 무뚝뚝하고 팍팍한 식구들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더 생겼다. 자기를 찾아다니느라 생고생을 한 K한테도 살가운 말 한 마디를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막내는 친척 형의 휴대폰 대리점에서 근무하게 되어 형편이 좀 나아졌다. 장가를 들어 아이도 둘 낳았다. 재개발을 기대하고 융자를 받아 낡은 집도 하나 사 두었다고 한다.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는 문제 때문에 자동차도 한 대 뽑았다. 은행 거래나 전화 명의는 아내의 이름으로 해결했다. K 아버지는 아들한테 돈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헤프다고 틈만 나면 야단을 쳤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이룬 남자의 책임감이라는 것은 많은 경우 당장 눈앞의 물질로 표현되지 않으면 가정 생활이 너무 막막해지지 않는가?
야.. 이제는 별 사고 없이 살아가나 싶었는데, 작년에 갑자기 막내가 또다시 가출했다는 연락이 왔다. K의 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몇 번 날아왔다. "내가 못나서 미안해, 미안해, 죽을 거야. 나 없어도 OO 엄마한테 잘 해줘..." 상황을 알아 보니 막내가 대리점에서 본사에 납입할 돈을 돌려 써버리고 사라졌다는 거였다. 그 외 여기저기서 꿔다 쓴 돈을 합치면 또 기천만원이었다. 10년 동안 경제적 상승이 전혀 없었던,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빚도 없는 최저생활자 K가 또다시 막내동생을 찾아 길거리로 나섰다. K는 "지난번에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서 이젠 이력이 붙었다. 대충 어느 여관일지 짐작이 간다"며 웃었다. 장담과는 달리 찾지는 못했지만...
막내는 또다시 몇 주 후에 스스로 돌아왔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가족들이 눈에 밟혀서 죽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돈이 얽혀 있는 친척들 간에 대판 싸움이 났다. 몇몇끼리는 죽을 때까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할 관계가 되었다. 막내가 줄곧 휴대폰을 꺼놓고 전화를 받지 않자 대리점 친척 형은 만만한 K에게 계속 독촉 전화를 걸어 호소했다. 맏형이 일부를 갚았고, 또 근 10년 쪼개고 쪼개어 약간의 저금을 만들어 놓은 K 어머니가 이번에도 K를 시켜 두번째 통장을 깼다. 이 빚도 청산되기까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막내는 몇 달 후에 대형마트 운반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은 병탈이 많았다. 집을 내놓았지만 당연히 요즘 같은 때 팔리지 않는다. 차는 팔았다. 아주 가끔씩 돈을 좀 빌려달라고 K에게 전화가 온다. 원래는 맏형한테 꾸곤 했지만 이제는 차마 볼 낯이 없어서 연락을 못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세까지 합쳐 한 달에 팔구십만원으로 간당간당하게 2인 가계를 유지하는 K도 십중팔구 여유가 없다. 단 몇십만원이라도 갑자기 마련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잡힐 집도 차도 소득도 없고, 그런 돈을 꿀 친구도 없고, '신용불량자도 한 통화면 빌려줘요' 하는 러시앤캐시 무과장한테 전화를 걸기는 너무 무섭다. '채무'는 통장과 통장 사이의 숫자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통으로 실재한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은 한 가닥 자존심이 무너지고, 그 소리를 들어 주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상처가 패인다. 일흔이 넘은 부모님들은 두 차례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집으로 날아오는 낯선 고지서 한 장에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다.
K의 가족은 그야말로 "회복하는 경제 통계와 후퇴하는 인간의 삶"(<글로벌 슬럼프> 51쪽) 속에서 살아왔다. 김대중 정부가 IMF를 극복했다지만 그 일환으로 찍혀나온 카드들은 대란을 일으켜 무수한 신용불량자들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소득은 2만 불을 넘었지만 부동산은 폭등했고 막내가 그랬듯 너나 할것없이 전세 끼고 집 한 채 더... 투기에 뛰어들었다. 카드깡을 하듯이 아파트깡을 했다. 그렇게 2백만 하우스푸어가 양산됐다. 10억 가까운 재건축 아파트 한 채를 사놓고 나서 주부들은 은행 융자빚을 갚기 위해 마트 종업원으로 일하거나 지역 통계조사원 알바를 뛴다.
K의 막내동생, 그리고 K의 삶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몸도 여러 군데 고장날 것이고 노동력도 점점 저하된다. 나도 막내나 마찬가지로, 용기도 없으면서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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