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자유 개념은 역사적으로 늘 변화 진화 투쟁해 오고 있다. 좌파는 우파보다 자유주의를 더 알아야한다.

맑스 이야기만 하면 식상하고, 맑스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하고, 현대적 해석을 해야할 때, 구절이나 소개시켜주고 그러면 재미도 떨어지고 해서, 유럽에서 원형 자유주의자라고 일컫는 존 로크의 사례를 들고 마칠까 한다.

 

한국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의회의 발생과 역사를 모르면, 왜 서구좌파들이 의회주의에 당하고 있고, 그 제도와 법률투쟁에서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본다. 의회주의 비난하고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은 이제 없다고 본다. 


존 로크는 세계사에서 등장하는 (유럽 중심으로 씌여진 이 모든 세계사 교과서) 1688년 제 2차 영국혁명 (소위 명예혁명)을 가능케 한, the Old Whig (올드 휘그당) 당의 정치 수장 쉐입즈베리 (Shaftesbury) 의 정치적 이론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제임스 티렐 (Tyrrell)이라는 이론가와 더불어 소위 옥스포드 출신의 당대 내노라하는 엘리뜨였다.  이 세 사람이, 당시 왕정복고를 외치는 보수당 (the Tory)과 맞서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 올드 휘그당의 정치적 목표는 영국 의회의 권한을 왕실보다 더 크게 하는 것이었다. 


1669년 경, 존 로크가 쓴 카롤리나의 기본헌법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에 보면, 존 로크가 영국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을 명시했는데, 500 에이커(Acre: 1 acre는 1227평) 이상 토지(61만 3천 500평)를 소유한 영국 중농 신사 (the English Gentry 계급)로 제한합니다. 그리고 투표 권한이 있는 자는 50 에이커 이상의 토지(6만 1350평)를 소유한자로 국한시킨다. (1 에이커는 소 한마리가 해 떠서 질 때까지 경작할 수 있는 넓이의 땅이다)


초창기 근대 유럽에서 (정치적) 자유 개념은 '토지 소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를 논할 때는 반드시 '민사' 소유권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소위 여러가지 시민혁명이라고 기술되는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시민 혁명 등에서, 자유개념이란, 그리고 의회의 형성과정은, 이렇게 철저히 토지 등 자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자료를 무시하고, 아주 거칠게 말해서, 아주 근본적 입장 취하자면, 2007년 지금 한국이나 미국, 영국, 17세기와 무슨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에 입성하는 자들의 계급 계층적 성격을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국회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본 떠 이식된 제도이다. 앞으로 아마 100년은 이 의회라는 귀신과 물귀신 작전을 써가면서, 좌익이 악몽을 꾸어가면서 '자유'의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게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왜? 누구를 위해서? 이 물음에 대답하면서, 그 자유의 내용과 함의를 다르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싸움이야 말로 바로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놓인 지겨운 싸움인 것이다.



2008.07.07 12:53

"자유" 는 "좌빨"의 엑기스!... "촛불데모"가 준 자유는?

원시 조회 수 952 댓글 12

?

촛불데모는 우리에게 무슨 자유를 가져다 주었는가?

(자유는 정치적 좌파에게 가장 고귀한 이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어, 인생 끝나도 개념정의 못하고 갈 단어 "자유"에 대한 메모


1. 자유는 무엇인가? 누구의 자유인가? 자유의 주체를 밝히는 게 현대 정치 좌파가 할 일!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다' '스스로 자기 삶의 출발점과 여정 그 결과를 책임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새롭지 않다. 누구나 "난 자유인이다. 난 자유롭고 싶다"고 일상에서 외치지 아니한가? "명바귀가 퇴진해야 내가 자유롭다. 안전한 쇠고기, 광우병 위험이 없는 쇠고기를 먹고 싶다. 이런 마음의 자유 (권리를 포함하는)도 있다. 어쩌면 자유는 궁극적으로 좌파가 실현해야 하고 발전시켜야 할 정치적 목표이고 가치이기도 하다. 


자유는 어떤 고정된 달이나 해가 아니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별, 우리의 정치적 욕구 (Desire)이다. 이 욕구는 말 정의가 재미있다. 욕구는 De (떨어지다 멀리) + Sire (star: 별)로 구성되어 있다.  [요새 욕망정치라는 말을 자주 쓰던데, 정확한 단어 사용은 아니다. 새로운 욕구의 발견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는게 맞다고 본다] 영어 단어의 어원을 언급한 이유는, 욕구란 저 멀리 떨어진 별처럼 저기 반짝여 우리에게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같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단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자유는 수많은 별이며, 자유는 우리의 정치적 욕구이다.


2. 자유를 만끽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정치적 자유주의(Liberalism, 최근의 Neo-Liberalism)에서 '자유' 개념은 이윤추구를 자기 운동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자유와 연결될 때가 많다. (물론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복지국가 체제에서는 부분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자본과 정치적 자유 사이에 여러가지 매개 장치들이 있다) 이러한 자본의 자유는 일하는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자유정신의 발현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일하는 맨 정신의 노동자의 그 정신을 피폐해 왔고, 하고 있고, 앞으로 그럴 확률이나 개연성도 높다. 이러한 자본이 생활하는 장소, 촛불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자본의 자유를 허용하는 시공간이 바로 "시장" (한국의 5일 장터의 의미가 아닌) 의 자유이다. 그 이윤 마진 크기의 최대화 극대화라는 시장원리를 자유 정신으로 삼고, 그것을 사회구성원리, 다시말해서 전체 사회구성원의 삶의 원칙으로서 수용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다. 

3. 자유와 평등에 대한 오해


자유도 평등도 순수한 개념어는 아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한정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단어 자유, 평등을 쓰더라도 '시 공간이 다른 주체들의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자유, 평등' 개념을 지시할 때가 많이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평등, 우애(연대)의 구호는, 당대 프랑스 부르조아 (영국과 프랑스 사례는 다르다. 프랑스 경우, 영국과 같은 18 ~19세기 산업 자본가 계급보다는, 도시 상공인, 변호사, 언론인,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등을 지칭)의 자기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표출했다. 그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프랑스의 전 여성, 노동자, 소농, 비-프랑스인, 유색인종, 소작인 등의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와 평등은 대립항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평등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빠뜨리고 있다. 혹은 그 자유와 평등을 대립항으로 놓고, 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자유를 더 강조하고, 공산주의는 평등을 자유보다 더 중시한다고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질문을 정확하게 던져야 하고, 누가 그 질문을 어떤 사유틀로 던지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론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맑스가 초지일관, <자본>에서 비판한 것은 부르조아 '자유, 평등, 박애' 개념이 '공허하다' '비어있다' 혹은 '허구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 교환이 발생하는 게 노동력 판매 시장이기 때문에)'라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대립된다고 주창한 적은 없다. 


4. 소극적 형식적 자유 개념도 '투쟁'과 '살벌한 전투'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초기 맹아 자유주의의 이론가 존 로크(Locke)로부터 최근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를 주창하는 사람들까지 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곤 한다. 이러한 자유-평등 대립항 만들기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가 만든 게 아니라, 그 자유주의자들의 이론틀에서 유래한다. (신)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 다시말해서 사회, 법, 국가, 관행 등 개인의 사유재산, 신체, 시민권리를 박탈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다. 이게 소극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자유개념이다.  봉건제 왕권 타도 (전국의 토지는 왕실과 왕의 사유재산이다라는 명제)할 때는, 이 소극적 자유주의자 자유개념이 라디컬하고 진보적인 성격을 띤다. 물론 한국 87년 항쟁처럼 절차적 민주주의 (직선제 쟁취 등) 가치들과 소극적인 자유개념도 역사적 정치상황 하에서는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개념이 되지만.


한나라당이 TV 토론회 (MBC 손석희 100분 토론, KBS 생방송 토론 등)에서 나와서 하는 경제관련 정책을 보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면 안된다. 불가피한 예외 빼고. 혹은 국유화나 공공서비스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사유화시키자. 경쟁을 강화시키자"는 논리 역시, (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한나라당식 '자유' 개념은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투쟁은 다 제거하고, '자본가'와 '시장'의 자유만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내부에서 '국가'와 '자본'의 관계 형성은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5. 소위 실질적 자유 개념은 다양하고, 채굴되지 않거나 가동되지 않은 원석. 새로운 자유 개념을 만들어 정치적 상식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좌파의 임무!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란,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생산해놓고도, 자기네들이 집을 지어 놓고도, 자기 집도 못가지고, 하루 8시간도 부족해서, 3시간씩 잔업하고, 그렇게 15년을 살아야 대도시에서 15평, 20평 아파트 하나 겨우 장만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자유인가? 아 내가 자유롭게 일하고, 자유롭게 결정해서, 내 자유정신을 믿고 실천해서, 우리 공동 자산(생산수단이든지 1차 원료든지, 자연이나, 도로 등)을 특정 5%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90% 이상 되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집단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자유보다 훨씬 더 나을 있지 않겠는가?


이외에도 자유는 여러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야 이세상에서 정말 자유롭고 싶다면?" "자유를 만끽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는?" 이런 포괄적인 철학적인, 그렇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물음이 정치적 좌파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루 7시간만 일하고, 1시간은 새로운 진보정당 정치에 참여할 자유, 주말은 일하지 않고, 자기 계발 시간을 확보할 자유, 자기가 일해 놓은 것을 반성하고, 남이 뭐라고 간섭하고 더 일해라 너는 이모양이야 이것 밖에 안되느냐는 식의 핀잔만 듣고 사는 노예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삶의 자기 결정권을 가질 자유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2008년 정치적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고 지키기 위해서 밤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새벽별, 달님보기 운동, 비맞기, 물대포 끌어안기, 각종 다종 다양한 난이도의 '허들'을 뛰어넘는 시험을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노동시간보다 데모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6. 자유,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문제와 결부된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자유를 외치다가 산하한 분들이 많다. 열린우리당 386처럼, 원희룡처럼 그 자유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의 자유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명박처럼 한미간의 '자유 무역'이 자유의 핵심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유 개념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투쟁하는 것이다. 촛불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 정치 투쟁은 정치적 개념 투쟁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 촛불데모는 단지 개싸움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개념 벽돌로 우리 집을 지을 것인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투쟁은 과거 미래 투쟁과 동시에, 3차원으로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투쟁은 동물이 밥 놓고 싸우는 밥그릇 투쟁만은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3차원의 투쟁을 동반한다. 우리는 통합민주당 386들과 한나라당내 차기를 노리는 소장파 원희룡처럼, 과거에 한 때, "자유여, 민주여 만세"를 외친 사람들을 그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침팬지, 오랑우탄, 원숭이 아기들은 다들 비스무리하게 보인다. 그와 같은 이치이다. 그들도 한 때 분명 '자유'를 외쳤다. 독재에 맞서는. 그러나 지금 그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를 흔쾌히 박수치고 있는 것이다.


7. 자유 개념은 역사적으로 늘 변화 진화 투쟁해 오고 있다. 좌파는 우파보다 자유주의를 더 알아야한다.


맑스 이야기만 하면 식상하고, 맑스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하고, 현대적 해석을 해야할 때, 구절이나 소개시켜주고 그러면 재미도 떨어지고 해서, 유럽에서 원형 자유주의자라고 일컫는 존 로크의 사례를 들고 마칠까 한다.

 

한국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의회의 발생과 역사를 모르면, 왜 서구좌파들이 의회주의에 당하고 있고, 그 제도와 법률투쟁에서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본다. 의회주의 비난하고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은 이제 없다고 본다. 


존 로크는 세계사에서 등장하는 (유럽 중심으로 씌여진 이 모든 세계사 교과서) 1688년 제 2차 영국혁명 (소위 명예혁명)을 가능케 한, the Old Whig (올드 휘그당) 당의 정치 수장 쉐입즈베리 (Shaftesbury) 의 정치적 이론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제임스 티렐 (Tyrrell)이라는 이론가와 더불어 소위 옥스포드 출신의 당대 내노라하는 엘리뜨였다.  이 세 사람이, 당시 왕정복고를 외치는 보수당 (the Tory)과 맞서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 올드 휘그당의 정치적 목표는 영국 의회의 권한을 왕실보다 더 크게 하는 것이었다. 


1669년 경, 존 로크가 쓴 카롤리나의 기본헌법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에 보면, 존 로크가 영국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을 명시했는데, 500 에이커(Acre: 1 acre는 1227평) 이상 토지(61만 3천 500평)를 소유한 영국 중농 신사 (the English Gentry 계급)로 제한합니다. 그리고 투표 권한이 있는 자는 50 에이커 이상의 토지(6만 1350평)를 소유한자로 국한시킨다. (1 에이커는 소 한마리가 해 떠서 질 때까지 경작할 수 있는 넓이의 땅이다)


8. 초창기 근대 유럽에서 (정치적) 자유 개념은 '토지 소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를 논할 때는 반드시 '민사' 소유권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소위 여러가지 시민혁명이라고 기술되는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시민 혁명 등에서, 자유개념이란, 그리고 의회의 형성과정은, 이렇게 철저히 토지 등 자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자료를 무시하고, 아주 거칠게 말해서, 아주 근본적 입장 취하자면, 2007년 지금 한국이나 미국, 영국, 17세기와 무슨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에 입성하는 자들의 계급 계층적 성격을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국회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본 떠 이식된 제도이다. 앞으로 아마 100년은 이 의회라는 귀신과 물귀신 작전을 써가면서, 좌익이 악몽을 꾸어가면서 '자유'의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게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왜? 누구를 위해서? 이 물음에 대답하면서, 그 자유의 내용과 함의를 다르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싸움이야 말로 바로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놓인 지겨운 싸움인 것이다.


9. 촛불 데모에서 왜 대의제 '의회정치'나 '대통령제도'가 작동되지 않고 무기력한가? 


 답은 복잡하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다수 '평민'의 '시민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소영, 강부자, 3% 땅부자들이 더욱더 부자가 될 '자유'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시민들이 '의회'도 '대통령제도'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그렇지만, 자유도 역시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촛불데모는 '무슨 내용의 자유'를 만들어내고 획득하고 있을까? 



 

최한솔 1.00.00 00:00

공력이 대단하십니다 ;_; 저는 단순히 '내가 나일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합니다. 호혜적 이유로 타인의 자유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요. 결국, 미친듯이 주변과 싸워대는 결말이 기다리더군요 -_- 왜이리 내 삶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싶어하는 남들이 많은지.

 댓글

원시 1.00.00 00:00

TJL 님이 쓴 <'자유'에 대한 착각과 '분배'란 말에 대한 거부감에 대하여 [3] TJL > 글 보고 답 글 형식으로... 또, 촛불데모에 참가하신 분들...그냥 맘 편히 촛불데모가 가져다 준 <자유>가 뭘까요? 위에 제 글과 상관없이요. 걍 아무렇게나 붓가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답 좀 주세요~

 댓글

ochlos 1.00.00 00:00

긴 글...싫습니다. 글이든 말이든 ...짧게...!

 댓글

노엣지 1.00.00 00:00

원시님 요즘삘받으신듯.잘 읽었습니다.갑자기 유투노래 듣고싶어지네요.디 자 아 아아 이어

 댓글

허이꾸! 1.00.00 00:00

원시 님.. 생각좀 해보고요... 사무실에서 눈치! 눈치!  

수정 삭제  댓글

카프카의 K 1.00.00 00:00

원시님 도배금지~ --a

수정 삭제  댓글

원시 1.00.00 00:00

여러분 도와주세요 "촛불데모가 준 자유" 머예요? 한 줄로 써주세요  

 댓글

그냥 서민 1.00.00 00:00

차도는 '차만'다니는 길이 아님, 광장은 시민들이 모이는 곳임. 촛불은 밤에 켜야 멋짐. 야참은 삼각김밥이 괜찮음. 밧줄만 있으면 버스도 끌고다님. 막으면 돌아가면 됨. 음 그리고...

 댓글

TJL 1.00.00 00:00

잘 읽었습니다. 전 그저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혼동되게 마케팅(?)되고 있다고 여겨져서 써본 글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또 길게 썰을 풀어주시네요. 촛불데모가 준 자유라면, '정치적 무지 강요'에 대한 자유랄까요?

수정 삭제  댓글

파애 1.00.00 00:00

비판할 자유. 제가 정말 평범한 언니야들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리는데, 대개가 그렇거든요. 대통령이나 정부가 하는 일을 그냥 믿고 따라야 하는 줄 알았다고들 얘기해요.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는게 국민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국익에 큰 해가 된다고 은연중에 믿어온 거 같다고. 비판할 자유, 믿지않을 자유, 불복종할 자유. 어느 정도였냐면 처음 가두집회한 다음날 왜 시민들이 청계광장 뒤로 나와서 경복궁역 앞 점거한 적 있죠. 그날 전경들이 총을 탕탕 쏠 거 같아서 무서웠대요. 거리로 나가본게 처음이라고..^^ 그렇게 하라는 대로 하는게 익숙했던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는게 무서워요. 진보신당 진짜 잘해야 할듯..

 댓글

최한솔 1.00.00 00:00

너무 모호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으로 존재할 자유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등떠밀어서 나온게 아닌, 자기 발로 걸어나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나요? 대책위가 '지도'하고자 했을때 사람들의 반응이 기억나네요

 댓글

원시 1.00.00 00:00

파애님과 한솔님 공통얘기가, 비판의 자유, 자기 목소리를 낼 공간을 찾는다. 외부 지시나 동원보다는 스스로, 혹은 커뮤니티와 더불어, 친숙한 집단과 같이 일체감을 느끼고 싶다. 이거네요?   내 목소리! 를 찾아서...네요.



Comment +0

새로운 진보를 말하기 전에 "진보"라는 말의 의미를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진보개념] 손석희-노회찬 인터뷰 중에서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04-20 21:13:07 조회 : 801 


진보라는 말이 나왔길래 잠시 생각해봅니다. 


⊙ 노회찬 /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 진보라는 말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 이 시대 진보는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봐야된다고 보는데 민주노동당이 추구하고 있는 진보적 가치라는 것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분단문제 해결에 있어서 평화, 절대적 평화적 방식과 또 이 평화를 조속히 실현하는 문제,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조 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지향하는 것, 특히 사회적 재분배를 통한 평등의 실현을 중시하고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나 여러 가지 반인권적인 제도와 관행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가치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손석희 시선집중 프로그램> 



 노회찬 사무총장님이 쓰고 있는 <진보>라는 것은, 정치적 가치로 좁게 쓰였다. 


우리는 진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이고, 어떠한 고민을 더 해야 하며,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번째, '진보'라고 했을 때는, __________보다 낫다 _________보다 향상되었다. 라는 말로도 쓰이고, 예를 들어서 낫보다는 트랙터가 벼베기를 더 빨리 할 수 있고 많이 할 수 있다.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 기술의 발달 결과로, '진보'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석유를 써야 하는 트랙터 도입으로 엔트로피와 공기 오염은 증가함으로 뭐 그게 '진보'냐? 라고 다른 각도의 '진보' 기준을 가져다 댈 수도 있습니다. 이 논의는 다른 논의이므로 여기서 배제하고요. 


진보는 '역사적으로 ____________발전했다."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그럼 '진보'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지금 세계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가는데 (종착역) 그런데, 이런 진보의 방향과 역행하는 사회 세력은 누구냐? 이런 부분을 염두해 둬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진보'의 반대 세력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문제> 진보의 기준이 뭐냐는 것이 우선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엄밀하게 정의하고 '진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 발전기준이 뭐냐? 이런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 부담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진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이성'이라는 강한 전제 위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이성>이라는 주제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어떤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은 할 수 있으니까요. 두번째 노선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이성이나 어떤 역사 진보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도, 사회정의나 자유/평등/자립/통일 등 사회정치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그 운동의 기본적 이념은 윤리적 전제들을 깔고 있기 때문에, '진보'와는 다른 형태로 이념에 대한 정당화 연습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윤리라는 것은, 고정화된 삼강오륜과 같은 어떤 도그마가 아니라, 물질적-정치적 구조 변동이나 문화적 의식의 변화와 동시에 움직이는 인간의 판단의 기초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대안> 잠정적으로 전 '진보'라는 말을 가급적 구체적인 정치 용어로 바꿔서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주장과 정치적 서술들에 대한 윤리적 정당화 작업 역시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과학 science >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합니다. 독일 말 번역어 Wissenschaft (인문과학, 자연과학 다 합친 말, political science 이런 것도 다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민중적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럼 산수나 '자연과학'과는 어떻게 다른 '과학'인지를 말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맑스-레닌주의 연구소 만들어 놓고 저질러진 실책을 다시 범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요새는 그 '과학 과학 하시던' 분들이 다 어찌된 게 한나라당 가 있고 (김문수 일당) 그 보좌관에다, 또 반대로 __대장님을 외치던 분들은 '열린 우리당 꼬마 수령님들'이 되어있더군요. 


그 과학의 결과 자칫잘못하면, 80년대 자칭 '과학적 사회주의'이름하에 지난 소련사회주의가 범했던 정치적 범죄 (특히 외교나 유 에스 알 내 소수민족 탄압은 거의 사회주의 이념과 정반대로 실천함...그 증거는 도서관 1 트럭분 책도 넘음)을 묵과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사회과학에서는 과학이라는 말보다는, '증거' '논거' '통계' '사회적 필드 조사', 그리고 그 전제들을 문제삼는 '윤리학' '관점' '직관'등으로 대체되어 있고, 이런 주제들을 더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80년대는 데모하느라고, 소련이나 중국 북한에서 수입된 것, 혹은 일본 공산당원들이 보던 책 번역해서 봐서 정신없이 무반성적으로 거기 씌여진 '단어'를 외웠지만, 이미 그런 단어들은 지난 100년간 세계사와 국제 정치사를 반영하기에는 너무 그릇이 적고 개념들은 폭발되었다고 봅니다.


 아직도 과학 외치시고, 그 과학이라는 형용사를 '사회주의'와 결합시키려는 분들은 오히려 '생물학' '천문학' '물리학' '지구과학' 등이나 '수학'을 배우셔가지고, 수학적 사회주의, 혹은 생물학적 사회주의 이런 단어를 쓰는게 낫다고 봅니다. 아예 정확하게 '예측'을 해버려야지요. 공리를 사용해서, 순서도로 알고리듬 만들어서, 답이 똑 떨어지게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과 동기, 규범을 수반하는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사회과학에서 '연역적 가설모델'은 분명 한계를 지닙니다.




Comment +2

  • 요즘음 좌파와 우파의 기원부터 변화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도 어떻게 생겼고 변화해왔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당마저 정체성이 없는 것을 추구하고 정치철학에는 나오지 않는 중도라는 말을 당연하게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자유와 자유방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또한 근대국가의 출발에 대해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국가라는 것을 빼고 정치철학과 이념을 뺄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합니다.

    과학에 대한 공부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오류를 뛰어넘어 그의 성찰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줍니다.
    양자역학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진화론의 한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마르크스의 성찰은 오히려 진보좌파를 진부한 집단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과학기술이 변했고, 신자유주의도 좌파와 우파적 기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 자연과학 (양자역학, 진화론 한계와 의미) 등과 마르크스 성찰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것인가요?

저 이딸리아 플로렌스(Florence) 지방에 살던 마키아벨리는,조선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침략한 이후, "강성 이딸리아 " 구호를 외치고 <군주론>과 <리비에 대한 긴 강의 Discourses on Livy: 리비는 로마 제국 역사 연구가>를 썼다. 


많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즘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하고 비정한 정치행태라고 오해한다. 또는 마키아벨리즘을 권모술수 정도로 단순화시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석은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되었다. 


역사가 리비 Livy 에 대한 긴 강의라는 책 "Discourse on Livy"에서 마키아벨리는 "머리가 하나인 군주보다, 머리 숫자가 여러개인 민중 people 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권모술수 군주론>이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보존과 번성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도시국가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정치적 제안이다. 민주주의 이론사에서 마키아벨리는 이태리 도시국가 수공업 장인들과 상인들을 정치 주체로 포함시킨 정치사상가로 파악한다. 15세기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원형이라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마키아벨리는 왕, 귀족, 상업 자본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중산층 장인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소자영업자들을 이태리 도시국가 시민 주체로 간주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여러 머리들이 한 개 머리를 지닌 군주보다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현대에 발전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흩어진 시민들의 정치적 지혜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민주적 리더십' 아닐까? 





.





2011. 03. 11. npp 게시판. 

Comment +0

1924년 동아일보 1월 2일자 신문인데. 헤겔을 유심론, 그와 반대되는 것을 유물론으로 대립시키고 (*사실 이 둘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데, 저렇게 둘을 대립시키는 것은 그냥 조야한 이해임. 호남 영남 가르는 것처럼, 남한 북한 가르는 것처럼) 


동아일보 사설은 민족정신을 실현할 방법으로서 '사회진화'를 주장하는데, 그 사회진화의 밑바탕이 '인간의 인격'이라고 보고, 이러한 전제 하에서, 민족들하 '단결하라' '응집하라' 100년의 대계를 세워라. 이렇게 나아갔다는 것인데요.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헤겔(특히 우파적 해석, 독일 민족 정신을 강조한 보수 우파의 논리)와 유사합니다. 


미디어나 뉴스가, 철학,사회학,정치학,경제학 연구서는 아니지만, 주요한 개념어들을 나열하면서 '민족정신'을 강조한 대목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사회진화론까지 나오고. 이걸 누가 썼는지 궁금한데, 필자가 나와있지는 않네요.


동아일보가 '유물론'을 곡해했다는 것보다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 보통 유물론이나 유물사관(역사관)이라고 했는데, 당시 독일에서 마르크스 해석의 권위자인 엥겔스와, 그 엥겔스 이후 카우츠키가 해석한 유물론이 아마도 일본이나 조선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위에 제가 쓴 게, 동아일보가 유물론을 잘못 이해했다는 말의 취지는, 동아일보 사설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당시 여론에 인식된 '유물론' 자체와, (제가 생각하는) 마르크스 생각이나 실제 그의 주장이나 방법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현상이 마치 자연현상처럼 어떤 '철칙'이 있는 것처럼 서술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상은, 다윈 Darwin 의 <진화론>을 수용해서, 마르크스 자신도 물론 자본주의 사회 형성과정을 '진화'라는 개념틀로써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를두고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의 공통점이 '변증법 dialectics 인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자연과학에서 '법칙'개념과 사회나 사회현상, 혹은역사에서 '법칙' 개념은 서로 다르게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마르크스나 사회주의자들의 '유물론'(materialism 이라는 단어를 마르크스는 실제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이 마치 정신이나 도덕이나 정서 이런 것들을 다 하이타이나 비누로 다 세척해버린 것처럼 이해하는 것도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독해입니다. 


유물론이야 요새는 그냥 일상 생활의 상식이고, 아이들도, 생물학, 지구과학, 화학, 물리학 배우고 그러니까요. (미국처럼 창조론이 과학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민족적 경륜 제 1 - 민족 백년대계의 요 )


하나의 민족의 계획이 필요하다는 주장. 그런데 1924년 조선은 무계획 상태다고 진단. <조선민족의 장래에 대한 계획이 무엇이냐?>고 누가 우리에게 물을 때에...교육과 산업의 진흥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삼노라...라고 대답한다면...


동아일보.

.



민족 전체의 의견이 하나의 행위 혹은 운동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응집해서 하나의 몸체(유기체로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주장. 단결하라는 주장임. 이게 가장 오래된 진리 (낡은->이라고 씀)이고, 이 진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동아일보 주장.

.




.당시 맞춤법은 "우리는 이러고잇슬수업는" 소리나는대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발음 및 표준화 작업의 역사...





당시 동아일보 주장은 1) 유물론자 비판 2) 헤겔 유심론 비판 3) 사회진화에서 (심리적 원인이 중요), 사회진화의 정도가 유고할수록, 인격적 이상의 세력이 사회의 진화의 도정을 결정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인격적 이상" 이 무엇인가? ...를 <동아일보>가 말해야 하는데, 그게 뭐인지 애매하다 

.



.





Comment +0

TV 다큐멘타리를 보다가. 내가 살았던 공간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참 모르는 것도 많고 새로 공부해야할 주제들도 많다. 조선시대 정치의 특성, 왕권과 신권과의 관계, 조선 왕조 관료제 사회의 특성에 대해서. 윤휴의 사형집행. 주자학에 대한 비판. 


윤휴는 양명학의 테제였던 "다른 일을 하더라도 가는 길이 같다, 이업이동도 (異業而同道 )"를 조선에서 실천했다면, 노론과는 다른 질서를 만들고, 조선군주제 사회에 또다른 정치체제 (Regime)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하에서 정치적 상대자들은 다양해졌고, 내부적으로 다양한 직업들은 노동자 의식들을 더 분화시켰다. 그래서 주체적 조건을 고려한 정치적 조직양식은 '직업 동맹'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런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윤휴가 공부한 양명학 테제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15세기에 우리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선언이 있었던 셈이다. 






Comment +0

아래 한병철의 글처럼, '자본 capital' 혹은 '자본주의 capitalism'을 악마화하거나, '이성'을 갉아먹는 뛰어넘을 수 없는, 채찍을 든 '수퍼맨 사탄'으로 개념 정의하거나 전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특히 현실 인류의 삶에 대한 진단 도구로서는 무능하다.

- 1차,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서유럽 이성의 파탄 선언을 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데카르트,갈릴레이,뉴튼의 세계관에 있다고 판단한 에드문트 훗설 Husserl 보다 라디컬하지 못하다. 이 기사만 봐서는 그렇다.

- 그리고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자본이 주인이고 소비자는 노예가 된다는 이러한 한병철의 진단은, 세상을 바라보는 '급진적 뿌리'에서는 노자, 장자의 통찰력에 비해서는 무디고, 다이나믹 (기성 전통적 사고방식을 파괴하는 dialectics)이 약하다.

- 독일 학계의 어떤 계보, 예를들어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rdorno)의 <계몽의 변증법 >이라고 어렵게 번역된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의 역설적 대화와 운동" 이런 내용이나, 68세대 3 M (Marx, Mao, Marcuse) 중에 하나인, 허버트 마르쿠제가, 유럽과 미국-캐나다에서 노동자가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대안의 혁명세력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외부인 (국외자: outsiders)가 '부정적인 (비판적인) 사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들, 즉 대학생, 외국인 노동자, 가정 주부, 도시 빈민, 흑인 등이야말로 '반란'과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라고 했다. 기존 공산당과 사회주의의 고루함과 45년 이후~70년대 초반까지 보여준 소련 사회주의의 '패권주의'와 '교조주의'에 염증을 느낀, 신 사회운동가들은 그 마르쿠제의 신-주체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했다.

한병철에게서는 이러한 신-주체, 그가 진단한 '자본'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정치적 함의가 빈곤하고, 비역사적이긴 하지만, 만약 그 윤리적 도덕적 진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가 했던 작업처럼, '자본주의'의 진화적 전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주체들에 대한 탐구는 아직 빈곤하다.

- 아울러 인간의 '욕구'나 '열정 passion' 은 부정적이거나, 한병철처럼 수동적이거나 극복되고 윤리학이나 철학으로 세탁되어야 할, 정화되어야 할 "문제아" 단어들이 아니다.

자본이 내놓은 상품들, 그거 다 불량식품들이고, 먹지 말고, 소비하지도 말 것인가? 난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혹은 특정 생산양식의 진화발전 과정에서, 부단한 비판 능력을 기르고 있다고 본다.

그의 글에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유, 비-역사적 사유가 엿보인다. 이건 학계와 대학교 학문 분과의 전문화에 따른, 종합능력의 결여와 연결되어 있어 보인다. 




기사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caf4328030645898d3861ebb7730021

Comment +3

  • BlogIcon 2016.03.20 15:03 신고

    비판을 했으면 그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셈. 자기 주관대로 쓰지 마시공

  •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공유 더보기
    댓글
    1
    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입력 : 2017.03.21 20:23:00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피로사회> 등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로 유명한 독일 거주 철학자 한병철 교수(베를린예술대)가 독자 강연에서 막말과 기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다.

    한병철 교수의 책을 내온 문학과지성사와 강연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 교수는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타자의 추방> 출간 기념강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주최측이 준비한 야마하 피아노의 소리에 깊이가 없다며 수시로 연주를 중단하고 불만을 표시하는가 하면 질문하는 독자에게 “입을 다물라”거나 “참가비 1000원을 줄 테니 나가라”는 등 막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편함을 느낀 일부 독자는 강연 도중 자리를 떴으며 한 교수는 강연 중 편두통이 심하다는 등 건강 이상을 호소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에는 “그날 강연회장에서의 일은 거의 폭력 수준이었다. 저자가 명성이 있다거나 외국의 철학자라거나 하는 것은 그의 언행에 어떠한 면책 사유도 되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앉아있으면 뭔가 다른 마무리가 있기를 기대했다” 등의 반응이 올라와 있다.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문학과지성사는 지난 17일 공식 사과문을 내고 “강연자의 여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출판사의 크나큰 과실”이라고 밝혔다. 처음부터 한 교수의 건강 문제를 파악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연회는 강연자의 제안으로 시작해 합의하에 진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 교수는 2010년 <피로사회>가 한국에 번역 출간된 후 크게 주목받았다. 이후에 내놓은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등의 책들도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거 괜찮다. 이런 우직함에서 '창조'를 보다. 스티브 잡스 흉내보다 백배낫다. 브랜든 스탠튼 사진작가가 뉴욕에서 1만명을 길거리에서 인터뷰하면서 물었다. "살면서 자기한테 좋았거나 특별했던 그런 사건들은 무엇인가? unique " 


- 낯선 사람들 사진찍기와 대화 시도, 브랜든 사진작가 자신도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이 사진 촬영을 하게 해줄까? 긴가민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브랜든이 취지를 몇 분 동안 설명해줬더니,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내밀한 개인적인' 자기 이야기들을 하더라는 것이다. 브랜든 페이스북에 뉴욕 사람들 인터뷰와 사진을 올렸고, 1천 600만 사람들이 '관람'했으며, 440만 명이 그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다.


사진작가에서 정치의 '진수'를 보다. 철학은 70억 인구의 심장에 담긴 이야기들을 '개념'으로 추출해내 자기 성찰의 기초자료로 쓰는 실천이다. 정치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자기 잠재력의 실현으로 될 수 있는 법,제도,관행,대중적 의식들을 만들어 내는 '집합적' 노력이다.


출처: 미국  PBS 텔레비젼

사진작가: 브랜든 스탠튼 (Brandon Stanton ) 


페이스북 주소: 



질문자 : 야 이거 놀랄 일 아니냐? 길거리 낯선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당신과 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브랜든 : 이야기할 때마다 그렇다.



브랜든: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야 낯선 행인들이 사진이나 찍게 해주겠어?' 의심도 했다.




지금까지 사진도 많이 찍고 대화도 많이 나눴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행인들에게 다가가서 몇 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대도 하고 그런다.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는, 행인들이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정말 개인적인 내밀한
 이야기들도 있다.













Comment +0

2010.01.08 08:25

[노회찬 인터뷰1] 지하철 2호선 H 용접한 노회찬, 서울시장 출마하다

원시

 서울시 지하철 2호선 H빔 용접 공사한 적이 있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서울시장 출마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 - 노회찬이 뽑이 잘된 어록   

 

<당원이 라디오>,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을 만나다  < 1>  다시 듣기인터뷰 후기

  

인터뷰 날짜 2009. 12. 28.  

 

진보신당 당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님을 모시고 2010년 선거와 서울시장 선거준비 이야기, 진보신당 창당 후 당에 대한 평가, 앞으로의 계획들, 요즘 주제가 되고 있는 진보대연합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 노회찬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노회찬: , 노회찬입니다. 반갑습니다.

 

질문자: 오늘 바쁘셨죠? 오늘 하신 일은 뭡니까?

노회찬: 오늘 대표단 회의가 오전에 있었고요, SK브로드밴드 노조관계자들과의 면담과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질문자: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서울시장 출마를 하셨는데, 삼성 X-File 선고 공판 이전에 출마 선언을 먼저 하셨지 않았습니까? 위험요소가 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말하면 배짱지원처럼 보이고요.

노회찬: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재판을 의식해서 재판 전에 출마선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출마선언을 하면서) 재판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변호사들과 상의를 했는데 ‘출마와 재판은 무관하다’라고 저에게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다행히 좋은 판결이 나왔습니다만, 설령 원치 않은 결과가 나왔다 하더라도 2심 항소심이 있기 때문에 피선거권은 유지되는 것이고, 따라서 출마의 뜻은 변함없이 견지할 생각이었습니다.

 

질문자: 서울시장 출마선언 이후 하루 중에 많이 생각하는 키워드가 있습니까?

 

노회찬: 제 키워드는 당선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와, 그냥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사람 만나는 느낌도 다르고 정책을 펼치거나 싸움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릅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대표님의) 그러한 결의나 각오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서울시장 선거 출마 선언하실 때 연설문을 동영상으로 보았는데요.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노회찬 대표께서 예전에 용접공으로 일도 하시고, 노동운동도 하셨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용접공 할 때 월급을 얼마 받았는지 기억하십니까?

 

노회찬: , 제가 83년도에 처음 받은 월급이 일당 5,000원이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 H빔을 용접할 때는 제가 한 6,500원 정도 받았습니다. 최고로 센 편은 아니었어요. 그 당시 혼자 생활하는데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동료들보다는 세게 받은 편이었죠.

 

질문자: 용접공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노회찬: 당시 상황으로서는 평생을 지하에서 노동운동을 해야 했는데, 생활의 문제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취직해야 한다라는 문제, 그리고 활동할 때 기술이 있어야 사업장 내에서 지위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용접을 선택했습니다.

 

NIKON | E5700 | Normal program | Pattern | 1/22sec | F/3.9 | 0.00 EV | 37.7mm | ISO-100 | Off Compulsory | 0000:00:00 00:00:00


                                 

   (서울시 지하철 공사 H빔 용접을 담당했던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질문자: ,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인데요, 제가 당 게시판에 흑백사진을 찾아 올렸는데 (대표님의) 고등학교 때 사진입니까?  (같이 사진을 찍은) 친구 이름은 생각나세요?

 

노회찬: , 이 친구는 지금 목사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질문자: 지금 이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내성적이고 정치는 안하시게 생겼는데요.

 

노회찬: 그렇죠, 그 나이에는 정치 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요. (웃음)

질문자: 굉장히 범생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요.

노회찬: (웃음) 저는 원래 범생이인데 세상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지요.

질문자: 노동운동이나 반독재운동 그런 거 안하셨으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노회찬: 글쎄요,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하고싶은 것은 많았죠. 공부도 더 하고 싶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오지에 가서 봉사하고 싶었는데 그런 계통의 일을 했을 수도 있겠죠.

 

 

질문자: 이 사진을 보고 100분 토론의 손석희씨가 말한 것(손석희 씨가 동안이라는 주장 - 옮긴이 주)에 대해 반론을 좀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빵 분위기가 아닌데요?

 

노회찬: , 젊을 때는 누구나 다 그렇죠. 손석희씨도 결국에는 호빵이 될 겁니다. 하하.

 

질문자: 336번에 대해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회찬: , 잊을 수 없지요.

 

질문자: 홈페이지 세상사는 이야기에 동영상을 올려 두었습니다. 노 대표님 어머님께서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 336번이 수감시절의 번호 같은데요. 그 때가 언제, 어떤 일 때문에 수감생활을 하신겁니까?

 

노회찬: 1989 12월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고, 그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고요. 92 4월에 출소를 했는데 서울교도소구치소와 안양교도소를 거쳐서 청주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 때 수번이 336번이었죠.

 

질문자: 동영상을 보면서 노 대표님이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정말 진실되게 다가오는데요. 지금 어머님께서는 부산에 계십니까?

 

노회찬: 서울에 계시고요, 어저께가 어머니 생신이셨어요.

 

질문자: 선물은 뭐 드리셨습니까?

 

노회찬: 화초와 꽃을 좋아하셔서 화분을 하나 드리구요, 집에서 입는 조끼도 하나 해 드렸습니다.

 

김문수 현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 3의 물결> 권해진보정당 동참 거부

 

질문자: 지금은 한나라당 소속인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는데요. (김문수 지사가) 노회찬 대표님께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권유했다고 했는데요, 한국에서는 인맥, 지연, 선후배관계 이런 것들 때문에 철학이나 이념, 정치적 이상의 친구보다는 지연과 학연 등의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급을 피하기도 하는데요. 앨빈 토플러 책은 언제 권유 받았고, 당시에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진보정당을 포기하고, 한나라당으로 간 김문수 현 경기지사, 노회찬 대표에게 앨빈 토플러 책 권한 적 있어

노회찬: 당시 김문수 현 지사는 진보정당을 하겠다고 우리 당에 참여한 상태였어요. 이미 그 때 생각이 좀 바뀌기 시작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교도소 면회를 와서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묻길래 제가 맑스 선집을 읽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가 토플러 책을 몇 권 가져왔는데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책을 넣어주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었고 그 후에 제가 92년 출소를 해서 진보정당 안하겠다고 김문수 현 지사가 얘기를 할 때 진보정당 같이 하자고 강하게 권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 문제를 돌보며 살겠다고 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질문자: 노회찬 대표가 90년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진보정당을 하게끔 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노회찬: "인생관, 역사관, 철학의 산물이다." 거창하게 얘기하면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고요. 저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생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질문자: 어떤 한계를 느꼈습니까?

 

노회찬: 학생운동이라고 하면 지식인운동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반독재민주화운동은 지식인 중심이었거든요. 광주항쟁 때 군홧발에 여지없이 밟히는 것을 보면서 일부 지식인들의 엘리트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 역량이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노동운동에 투신을 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한국사회가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싸움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용접도 배웠던 것인데요.

 

 87년 이후 민주화는 부분적으로 진행이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제 많은 주변 동료들은 운동을 떠났습니다. 잘못된 사회주의 국가가 망한 것이지, 사회주의적 이념과 이상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당시에 생각을 했고요한국사회의 현 단계에 필요한 것은 민주화운동이 자주적으로 성장해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없이는 노동운동도 같이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정치세력화의 방편으로서 진보정당에 뛰어든거죠. 진보정당을 한 두번하고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보면서 이게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고, 수십 년 걸쳐서 발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두번 실패했다고 자기 인생 스케쥴에 맞춰서 운동을 하고 안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진보신당에 계신 분들이 과거 민중당,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에서 지도자급에 있었던 사람들이 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으로 이적을 했는가, 그 원인이 뭔가 라는 것에 대해 이런 내용의 질문을 많이 하셨기 때문인데요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서요.

1부 마지막 순서로 노회찬 대표님의 연기력 테스트를 한번 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아이리스 보셨습니까

노회찬: 그게 tv에서 방영될 시간에는 제가 tv앞에 있기가 힘들죠.

 

질문자: 대사 중에 아이리스라는 것을 군사자본 내지는 한국의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적 음모그룹 이런 걸로 묘사가 되어있던데 혹시 정치적으로 해석하셨는가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노회찬: 제가 드라마 내용을 몰라서..

 

질문자:그럼 1부 마지막 질문은 이것으로 드릴께요. 대표님이 생각하실 때 가장 좋았던 노회찬 어록, 그리고 내가 볼 때는 이거 좀 실패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회찬: 여러 말들이 있었는데요. 성공과 실패로 보진 않습니다만, 국정감사 할 때 서울고법원장을 앉혀두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 이렇게 다그쳤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 말에 고법원장도 수긍을 할 정도로요. 그래서 기억에 남구요. 아쉬웠던 대목은 성소수자 문제 가지고 한번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주제는 아니었고 다른 걸 비유하면서 얼떨결에 얘기가 나왔는데, 본뜻과 다르게 전달될 소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많이 상처받은 분들도 계셔서 사과를 드렸습니다

  



 

제작: 새로운 데모연구회

자료조사, 섭외, 편집: 꿈책, @여수, 박원규, 한재필, 다온혜윰  

기술지원: 클라시커

진행: 원시

음악: 하트

<당원이 라디오> 참여http://cafe.daum.net/new-demo  

 

Comment +0

강신주 <노숙자 부끄러움 마비> 컬럼 논리적 오류들


살아 생전에는 난 소피스트(지식 판매원)일 뿐이다. 반면 철학자는 수많은, 아마도 수 만명의 소피스트들의 시행착오 속에서 1명 정도 나온다. 철학자가 할 일은 세 가지이다. 절대적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신과 대화하거나, 현존 인구 70억과 대화하고 역사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마지막으로 이 두가지가 넘사벽이면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의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지혜의 원천은 70억 인구의 공통 희로애락애오욕에 대한 추출이며 그들의 생활에 대한 개념화와 문장화(명제)이다. 그런데 이 작업이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쉬운 일인가? 다시 말하면 철학자란 과연 탄생할 수 있는가? 인구의 90%가 글자를 모르고 책을 못 읽던 시절, 인구의 0.01%도 안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 중에 간혹 철학자가 나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살아 생전에 안녕하지 못했고, 정신적 탄압과 외압에 노출된 사람들이거나,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철학자들과 지금 우리 시대의 철학자가 같은가? 역사적으로 철학자는 대부분 남자들었는데, 그 시대가 지금 딸-바보 아빠 시대와 같은가?


강신주의 첫 번째 오류는 ‘나는 일개 소피스트일 뿐이오’ 라고 자기를 소개하지 않고, ‘나는 철학자요’ 하고 강연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못되어도 철학의 뜻을 조금 아는 사람들이면, 70억 인구의 지식과 경험들 속에서 지혜를 추출해 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고된 노역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부끄러움 (치욕?)’이란 슬픈 감정인데,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볼 때 ‘아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남들이 나를 비난하겠지?’ ‘아 부끄러워라. 쥐 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 머리 속에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와 소피스트(지식 판매원)의 차이를 무시해버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인가 아닌가? ‘요새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고 해버리면 그건 철학자가 가져야 할 ‘두뇌’가 ‘심장’이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신주의 두 번째 오류는 에세이의 논거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서울역 노숙자, 정신 마비,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스피노자 <부끄러움:치욕/수치> 개념들을 세탁기 빨래감 넣듯이 막 쏟아넣었다. 그런데 정작 강신주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생을 관성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이걸 마비라고 진단), 마비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 (일종의 회개의 계기)를 만들어서, 스스로 정신과 감정을 마비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자. 이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회개하라’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서울역 노숙자를 논거로 들었는가? 강신주는 강연회에서 “자본주의 돈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외치고, “공부못하면 서울역 청소부된다” 이렇게 학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치면 안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특별한가?는 차치하고, 평소에 강신주 주장을 고려해보면, 서울역 노숙자들이 정신이 마비된 강시(좀비)라고 규정하거나 그런 비유는 자기 모순이다.


노숙자가 사회적 약자인데 강신주가 이들을 ‘정신이 마비된 자’라고 비난해서 강신주 주장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노숙자(홈리스)는 사회적 악이고 정신적 마비 현상인가? 서울역 노숙자들 상당수가 97년 IMF 긴축 통치 후에 급격히 늘어난 생계형인 경우가 많다. 노숙자 발생 원인, 진단, 해법은 다양한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 


숫자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논리적으로만 따져보자. 노숙자들 가운데는 서울역을 해인사로 간주하고 ‘스님’ ‘비구니’처럼 살아가는 자발적인 행려자들도 있다. 이 숫자가 극소수라도, 그들이 서울 시민들이 먹을 수도 있는데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을 먹고 산다거나, 팔리지 않은 제과점 빵을 얻어 먹고 산다면, 오히려 생태계에 기여하는 사람들 아닌가?


위 가정에 따라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러한 자발적인 노숙자가 5천만 인구 중에 20%에 육박해서 1천만명이 전국적으로 생겨난다면 ‘사회적 재생산의 마비’이지만, 어느 사회나 ‘정상?’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균적이고 평범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사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수녀님의 비율, 스님 비구니의 비율, 신부님의 비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자발적인 노숙자 (홈리스) 역시 그 비율이 지극히 적지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임을 자처하는 강신주의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노숙자 (홈리스)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화 인류학적, 경제학적 연구를 알아보지 않고, 도덕,바른생활 교과서처럼 ‘노숙자는 정신이 마비된 강시이다’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정신적 마비 사례를 잘못 들었으니, 혹은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강신주의 에세이 전개는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오류는, 스피노자가 말한 부끄러움(pudor:shame)과 삼가다 (verecunida:modesty)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스피노자는 ‘부끄러움’를 일종의 ‘슬픈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기쁘거나 행복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들을 남들이 비난하거나 야단쳤을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풀이 죽고 기운도 빠지고 슬퍼지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부끄러움’을 타인과의 사회생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으로 규정했다.


강신주는 신문 칼럼에서 <부끄러움>을 ‘치욕:pudor: shame'으로 ’verecundia'를 ‘수치’로 번역하고 분류를 했다. pudor와 verecundia 는 모두 ‘부끄러움 shame : 수치심'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스피노자 <윤리학> 영어번역판에서는 <Pudor 부끄러움>과 < Verecundia: 부끄러움->삼가다:modesty>를 구분하는데, 이 <Verecundia:modesty: 부끄러움>의 의미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장 가까운 단어는 ’삼가다‘이다. 우리가 보통 ’행동을 삼가다‘ 혹은 ’행동을 신중히 하다‘, 또는 ’마음 가짐을 삼가다‘라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verecundia:modesty>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삼가다: modesty>는 뜻을 함축하고 있고, 부끄러움 혹은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하기 전에 ’아 내 행동이 행여 부끄러운 행동은 아닐까?‘하고 예방조치를 해주는 것이 바로 <verecundia: modesty: 삼가다>이다.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떤 특정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있다. 그 역할 기대를 충족시키면 명예로운 사람이 되고, 충족시키지 못한 불명예로운 혹은 부끄러운 수치스런 존재가 된다. 그러한 역할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미연에 방지해주는 게 바로 이 <마음가짐과 생동을 삼가다 : verecundia: modesty>이다. 스피노자는 <삼가다 modesty> 반대말로 <부끄러운 줄 모름: 존경심이 없이 시건방짐 :impudentia: impudence>이라고 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수치>의 두 가지 단어, pudor와 verecundia를 빌어온 강신주의 노숙자 개념 규정에 따르면, 노숙자는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불명예 시민인 것이다.


이런 노숙자 개념이 정치적으로 좌파건 우파건 간에 지배자 관점에 서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박근혜의 용어대로 ‘노숙자는 다 정상이 아니고,’ 강신주 진단대로 하면, ‘노숙자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즉 부끄러운 행동을 해놓고도 그게 부끄러운 행동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impudentia’ 자이다.


그러나 노숙자도 단순하지 않다. 아주 거칠게 두 가지 범주로, 자발적인 노숙자와 비-자발적인 노숙자로 분류해본다고 할 때, 전자는 차치하고, 후자의 경우에도, 그 원인들은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틀로 해명되지 않는다.


강신주가 철학자건 소피스트건, 노숙자의 사회적 역사적 심리학적 원인들에 대한 규명을 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진단해 버리는 것은, 수 많은 연구 도구들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회적 역할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다.


 (스피노자, 유리알을 갈고 닦다)


네 번째,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 마음과 행동을 삼가다: verecundia:modesty>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사회 안에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선생으로서 학생으로서 대통령으로서 장관으로서 대리로서 과장으로서 부장으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불명예로운 시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역할’을 주는가? 또 그 ‘기능과 역할’ 수행을 평가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 스피노자의 두 가지 <부끄러움>은 사실 맹자의 <수오지심>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들의 <부끄러움> 개념은 사회가 농경제와 같이 변화의 속도가 자연의 시계에 맞춰져 있거나,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때, 강력한 사회적 규범 자격을 가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단순한 자급자족 경제 공동체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역할 판단 ‘기준’이 단순할 수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고모도 이모도 형도 누나도 동생도 제수씨도 형수씨도 처제도 다같이 논에서 일하고 밭에서 일하고 한 마을에 모여살 때와, 이들이 다 제각각 미국 한국 중국 베트남에 흩어져서 다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 갈 때, <부끄러움>의 내용과 측정 기준은 누가 어떻게 설정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 강신주건 소피스트 강신주건, 신문 칼럼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상의 관성과 타성에 빠져, 자기가 하는 일이 부끄러운 행동인 줄 모르는 자들이여 ! 회개의 기회를 얻어 마비당한 부끄러움을 부활하라!”는 강력한 처방전이다. 그런데 강신주의 처방은 시대착오적이다.


맹자나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개념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 개념들의 지시 대상 역시 아주 구체적이다. 맹자는 왕이나 군주를 대상으로 <수오지심>을 항상 간직하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열거한 감정들은 반드시 정신의 통제 하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적인 요소나 감정에 의해 좌지 우지 되지 않고, 신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의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의 행복이며,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고 해도, 고귀한 것이 쉽게 얻어지지 않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개념은 맹자의 <수오지심> 정도의 높은 지위, 이론적 체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그 <부끄러움>의 실천 주체는 노숙자(홈리스)가 아니라, 맹자에게는 군주나 왕, 혹은 왕의 후보자들이고,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의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자들이다. 스피노자와 맹자에게 당신이 말한 <부끄러움>이 노숙자(홈리스)를 대상으로 하고자 한 말이요? 라고 물은다면, 맹자는 <연목구어>라고 답했을 것이고, 스피노자는 “닦던 유리나 닦게 해주시오”라고 ‘삼가’ 말을 아꼈을 것이다.


서미현 선생님의 글: (페이스북에서) 

타임라인에 강신주씨의 칼럼에 대한 성토가 보이길래 호기심에 기사를 클릭했다. 강씨의 노숙자 비하 발언이 문제가 된 듯하다. 사실 강신주의 글을 주의깊게 읽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쓰길래 그렇게 잘 나가는 인기강사가 됐나 갑자기 궁금했다.


노숙자는 정신적 '마비' 상태에 있다 -> 어떻게 노숙자를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 (그에게 감정을 되살려 주어야 한다) ->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이란 단편을 보면 인간은 수치심을 가질 때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수치심은 인간의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 마비된 사람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 노숙자는 마비 상태에 있다 -> 어떻게 노숙자를 인간으로...(...무한루프)

즉 강씨의 논리를 따라가면 노숙자는 영원히 마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파탄에 이른다. 이쯤 되면 완전히 강씨는 XXX가 아닌가?!??


찾아보니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이 칼럼들을 모아서 강신주는 <강신주의 감정 수업>이란 책을 냈다. 책의 컨셉은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가지 감정들을 48편의 세계문학 고전들과 매치시키고 저자의 감성적인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유명인의 신문 연재 칼럼을 묶어 낸 책에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척 보기에 책의 컨셉이 솔깃하다거나 왠지 그럴듯한 숫자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 책은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강씨가 스피노자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48편이나 되는 세계문학을 어떻게 다 읽었겠는가? 태반이 아전인수, 견강부회일 가능성이 높다. 숫자 48을 맞추기 위해 별의별 짜집기를 다 해야 한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은 그의 유명한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의 맨 끝에 배치된 단편으로, 영어 산문 강독수업의 단골 메뉴다. 예전의 영문학 번역자들은 <사자들>이라고 번역하곤 했는데, 덕분에 나는 소설을 읽기 전까지 이게 아프리카의 사자들인지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들인지 도통 몰랐다. <분노의 포도>에서 포도가 포장도로의 포도인지 보라색 포도인지 책을 안 읽고는 알 수 없듯이.. 아무튼 강신주가 이 책을 읽었다면(안 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는데) '마비'라는 단어를 이 칼럼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비'(paralysis)는 <더블린 사람들> 전체의 핵심 키워드다. (조이스 자신이 그 단어를 제 소설집의 주제라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약간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건 강신주가 이야기하는 '개인의 정신적 불활성 상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식민지 아일랜드-더블린의 질곡,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지적, 정서적, 물질적 상황 전체를 가리키는 비유로 본다.


<죽은 사람들>의 주인공 가브리엘은 친영파 영문학 교수다. 칼럼에서 강신주가 "순수한 마이클과 달리 자신은 너무나 속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문장은 과도한 일반화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가브리엘이 수치심을 느낀 계기는 아내의 죽은 옛 연인 마이클이 그저 '아내의 첫사랑을 가져간 순수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마이클은 17살에 죽을 때까지 가스공장에서 일했던 하층계급 소년이었고 영국물을 잔뜩 먹은 '개화된' 더블린이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의 힘이 강한 골웨이 지역에 살았다. 조이스가 사용하는 단어 '마비'와 '수치심'에는 계급적, 역사적, 정치적 함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소설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강신주처럼 거칠게 일반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마비'라는 한 단어만 따로 적출해서 '노숙자'에게 갖다붙이는 견강부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불쾌한 것은 강신주의 이 칼럼이 '노숙자의 마비상태 vs 중산층의 각성'이라는 단순하고 무신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강신주가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런 구조를 의도했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가브리엘이 어떤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하긴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짜내서 글을 쓰다 보면 별의별 짓을 다 하게 되어 있다... 내 경험으로 그렇다.


p.s. 강신주의 노숙자 비하 발언만 보자면, 단순한 무신경이나 부주의나 개념 부족이 아닐 수도 있다. 도올 같은 사람들을 롤모델로 삼아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저런 식의 지르는 도발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발을 해야 일단 눈길을 끄니까. 뭐 도발은 좋은데, 도올과 다른 점은 글의 중후반부가 너무 지리멸렬해서 이 용감한 도발이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신주 컬럼:


 http://mone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834413&ctg=1700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중앙선데이] 입력 2012.04.07 23:10 / 수정 2012.04.09 17:00

Comment +18

  • Godot 2014.01.21 15:57 신고

    <강신주의 감정수업>의 부제(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에 스피노자는 대경(어쩌면 대노)할 것이라는 글을 쓸까 하였는데, 선생님의 글로도 충분할 듯 보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Cloud9 2014.01.22 06:23 신고

    아.. 이 새벽에 불면증에 시달리며 소일삼아 뒤적이던 인터넷에서 난 왜 이 글을 보고야 말았는가...

    제목: 깔려면 제대로 까라..

    부제: '<노숙자 부끄러움 마비> 칼럼 논리적 오류들' 의 오류들...

    (1) 철학자가 할일 세가지..
    // 절대적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신과 대화하기 -> 정치가랑 무당이네
    // 현존 인구 70억과 대화하거나 역사적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대화하기 -> 산타클로스??? 그 말고 누가 감히 도전이라도 할 수 있는 미션인가...?
    // 자기 내면과 대화하기 -> 나도 내 내면과 대화하는데? 내 후배 인디밴드 들도 매일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데? 시인은? 소설가는? 미술가는? 그럼 우리모두 철학잖가?
    결국 철학자의 필수 미션은 왕이나 신과 접선하거나, 루돌프사슴 비슷한거라도 하나 장만하거나, 술이라도 진창먹고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에 비루하게 살아가는 내 자신의 속내라도 들여다 보면 미션 클리어인가?
    근데 그럼 지식판매원이랑 뭐가 다르지? 실천은 하나 없는데?

    (2) 지혜의 원천은 70억 인구의 공통 희로애락애오(구)욕에 대한 추출이며(...)
    갑자기 웬 지식자랑? 근데 왜 하필 칠정이냐... 퇴계와 고봉 선생이 참 좋아하겠다만은 성리학이 무너진지 언제인데... ㅉㅉ

    (3) 인구의 0.01%도 안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 중에 간혹 철학자가 나왔다.
    와~~ 대단하네 말그대로 철인이네 철인. 근데 어째 단군설화처럼 신비화되간다. 철학자가 그렇게 위~대하시고.. 고~매하시고.. 그런 사람들이 이었나?

    (4) 강신주의 첫 번째 오류는 나는 일개 소피스트일뿐이오라고 자기를 소개하지 않고 나는 철학자요 하고 강연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와~ 강신주가 소피스트였구나? 근데 누구 맘대로? 아~ 70억 인구의 지식과 경험들 속에서 지혜를 추출해내지 못해서??? 산타클로스 걔가 제격이래니까 철학은... 고작 인구 30만명(많이 잡아 50만) 밖에 안된 아테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철학자 아니구나.. 근데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동네에서 놀지 않았나? 활자기계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서 철학은 불가능한 건가? 동양의 지식을 몰랐던 서양철학자나 마찬가지의 동양철학자들은 철학자 아니구나..

    (5) 강신주의 두번째 오류는 에세이의 논거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 서울역 노숙자들이 정신이 마비된 강시(좀비)라고 규정하거나 그런 비유는 자기 모순이다.
    "에세이의 논거가 부실하다는 점"에 대한 논거들은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그런지 당최 보이지가 않는데..?? "평소에 강신주의 주장과 서울역 노숙자들이 정신이 마비되 강신(좀비) 라는 비유가 자기 모순" 인 이유좀 얘기좀 해줄래? 혼자만 알지 말고...
    근데 "서울역의 자발적 행려자?" 이건 좀 웃겼다.. 그런사람 한명만 데리고 와바.. 그럼 형이 시원하게 다 인정해준다..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을 먹고 사는게 오히려 생태계에 기여하는 사람들 아니냐고? 그럼 쓰레기로 음식만든 인간들은 생태계와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냐?

    (6) 자발적인 노숙자 역시 그 비율이 지극히 적지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 강신주의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그런사람 한명만 데리고 오래니까.. 아님 동영상이라도 따던가.. 서울역에 정말 그런 수녀님같고 신부님 같은 사람이 있어? 제발 데리고 와봐.. 아~ 단 한명이라도 그런 사람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냐고? 난 신이 아니니 단정은 못하지..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런사람 있을 수 있다치자 그래서? "백마는 말이 아니다" 이건가? 대단한 명가 나셨어.. 근데 그런식으로 따지면 본인 글에 나오는 수많은 오류들은 어쩔건가? 정말 인류인구가 70억명이야? 우리나라 인구가 정말 5천만명인가?

    (7) 세번째 오류는 스피노자가 말한 부끄러움(pudor:shame) 과 삼가다(verecunida:modesty) 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오~ 드뎌.. 잘난척 폭발.. 좀 배웠다 이거지.. 확실하게 배운놈 티 내주는 센스!! 에혀 이거 너무 길다.. 그러니 그래 니 말대로 강신주가 수치심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잘못 해석했다 치자.. 그럼 "강신주가 잘못알고 있다" 하면 될껄 왜??? "따라서(...) 강신주의 노숙자 개념 규정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불명예 시민인 것이다." 라고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덧씌우는 거지? 마녀사냥하냐? 강신주는 저런 의미로 노숙인을 정의하지 않았다는거 잘 알잖아? 개념적용을 잘못한것과 부당한 개념정의는 구별하자 좀...

    (8) 노숙자도 단순하지 않다. 아주 거칠게 두 가지 범주로 자발적인 노숙자와 비 자발적인 노숙자로 분류해본다고 할때 (...) 후자의 경우 그 원인들은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틀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래 강신주가 잘못했네 "백마는 말이 아니라나까" 인류역사상 수천-수억명에 이를 노숙인들을 모두 싸잡아 비난했으니... 그러니 앞으로 그런 단어 쓸 때는 "2013년 서울지역 역 등지에서 안하무인 혹은 막무가내의 행동을 하는 일부 노숙인" 이라고 아주 과학적이고 정밀한 수치로 말하라고 해야겠다... 글쓴이의 철학자의 정의처럼...

    (9) 네번째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래 이 부분은 진짜 복잡하게도 쓴다. 별거 없는데...) (...) "그런데 두 사람 다 그 <부끄러움>의 실천 주체는 노숙자가 아니라, 맹자에게는 군주나 왕, 혹은 왕의 후보자들이고,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의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자들이다. 스피노자와 맹자에게 당신이 말한 <부끄러움>이 노숙자를 대상으로 하고자 한 말이요? 라고 물은다면" (...) "스피노자는 닦던 유리나 닦에 해주시오" 라고 삼가 말을 아꼈을 것이다."
    아오.. c 욕나오네.. 노숙자 무시하냐? 노숙자는 정신의 평화를 즐기면 안되냐? 정녕 인류 역사상 단한명의 노숙자도.. 그렇게 강조하던 비-자발적 노숙자들 중에도 정신의 평화를 즐길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냐? 정말? 그럼 그들은 왜 비-자발적 노숙을 하는건데? 체험 삶의 현장? 빈곤체험?

    (10) ps에서 고백하네 "도올 같은 사람들을 롤모델로 삼아 벤치마킹 하는 과정에서 저런 식의 도발을 의도적으로..."
    에혀 허무하다. 마지막에 이르니 자기 고백을 하네. 결론은 강신주 잘 모르네. 그냥 저 칼럼 하나 읽고 강신주의 정신적 사상적 개념을 한번에 이해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 하고자 했으나 내가 볼땐 제대로 뻘타다.. 강신주의 책이나 강연을 조금만 집중해서 들으면 그가 도올 같은 부류(?) 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텐데.. 도발을 해야 일단 눈길을 끄니가? 그래 아주 싸구려 소피스트 규정은 끝까지 가는구나..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좀 알고 까면 좋았을텐데 말야.. 이건 뭐 고구마보고 당근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이런 글에 혹시나 내가 찾던 날카로운 비판지점이 있지나 않을까 끝까지 읽은 것도 억울하고 억울함의 끝에 오는 어이없고 황당함에 이런 새벽에 댓글을 다는 나도 미친놈이다. 근데 그거 아니? 강신주는 한달 기준으로 75번, 하루 평균 2.5번의 강연을 전국을 돌면서 7~8년 정도 했다. 때론 무료로 때론 돈받고 서울이든 지방 소도시든 여건이 되고 체력이 되면 어디든 가서 자본주의 극복과 인간성 회복을 외치고 다녔다. 물론 네 입장에선 잘못된 사상 강연이겠지.. 근데 자본주의 극복 입으로 되는건 아니다...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지는 되돌아보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철폐를 외치면서 삼성같은 대기업 제품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고 쓰고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말 궁금하다. 깔려면 제대로 까자. 제발~~

  • 손님1 2014.01.24 18:32 신고

    칼럼을 다 읽고 나서 강신주씨의 글의 취지는 이해가 갔지만 썩 못마땅해하던 독자입니다.
    미처 알지 못한 부분까지 시원하게 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을 보다 보니 이런 글도 있네요.
    https://www.facebook.com/haeryong.park.313/posts/649266595114505

    • 예 페이스북 글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현재 한국은 짐승들이 사는 사회이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더럽고 추하고 역겨우며 사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난할 수 있지만 부끄럽고 파렴치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사람이 신처럼 살 수 없지만 짐승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 근시 2014.02.03 17:22 신고

    글 읽었습니다.
    cloud9님의 댓글에 대한 원시님의 반론 혹은 이견은 없으신가요?

  • 태가남 2014.04.14 04:42 신고

    생태계에 기여하는 사람들 아닌가? -> ㅋㅋㅋㅋㅋ 대단하십니다!

    • 현재 한국은 짐승들이 사는 사회이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더럽고 추하고 역겨우며 사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난할 수 있지만 부끄럽고 파렴치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사람이 신처럼 살 수 없지만 짐승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 현재 한국은 짐승들이 사는 사회이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더럽고 추하고 역겨우며 사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난할 수 있지만 부끄럽고 파렴치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사람이 신처럼 살 수 없지만 짐승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 글은 좀 못쓰시는것 같네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어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 읽고나니 그냥 배운티 내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글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강신주라는 사람은 잘 모르겠고..반박글은 쓰고 싶은데.."나도 이만큼 배웠소"하는것 같기도 하고..논거가 상당히 빈약해 보입니다. 강신주 철학자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비평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이 강합니다.

    • 무엇을 억지로 끼워 맞췄던가요?
      고생이 많으세요~

    • 전 철학을 배우지도 않았고..잘 알지도 못하지만..강신주 철학자가 말하고자 하는바가 이해가 되더군요. 왜 전체 문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어느 한부분만 잘라 비난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는거구요. 끼워 맞추는 느낌은 어딜 콕집어 그렇다는게 아니고 철학을 잘 모른는 제 입장에서 글을 읽고 전체적으로 받은 느낌이 그렇다는걸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비평의 잣대는 본인에게도 엄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름발이를 비난하는 자는 똑바로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강신주 철학자는 본인의 얘기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잘못 살고 있다고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옳은 길을 알려주고 제시할뿐이죠.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 글을 못쓰신다는 말은 사과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산/님의 판단기준이 있는 것이고, 또 그 말도 일리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비판이 '강신주 비난'이라고 이해하셨는데요, 철학 정신이란 바로 이렇게 비판도 하고 또 대화도 하면서 더 좋은 생각들을 찾아 나가는 과정입니다.

      대학에 철학과가 있긴 하지만, 다루는 범위는 좁습니다. 지구 70억이 다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끼워 맞춘다" 이런 말보다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생각해 보고 뒤돌아 볼 게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제 메모장에다 이렇게 댓글까지 남겨주시니 고생이 많으십니다.

실천은 반드시 특정 입장을 동반한다. 국정원, 국군 사이버 사령부의 온라인 심리전 수행도 '온라인 민주주의'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 한국 보수파의 '민주주의 관점'이 올바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민주당이 부족한 점이 바로 박근혜와 이명박세력을 '반 민주적'이라고 부르지만, 정작에 박근혜와 이명박의 '민주주의 관점'의 문제점들을 정치적으로 명료하게 각인시키지 못했다. 


박근혜와 이명박에게 '어떤 민주주의의 실천'이냐고, 국정원 국군사이버 사령부의 온라인 심리전투가 어떤 '민주주의' 실천인지를 스스로 밝히도록 해야 한다. 박근혜도 국정원 온라인 개입이 잘못이며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면, 그에 그치지 않고, 박근혜의 '민주주의관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현재 언론에서 여론장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온라인 일상을 한번 보자. 온라인 공동체에서도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죄를 규정하고 벌을 가한다. <죄와 벌>이라는 단순한 책임 의무관계를 실천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회 현실과 변화된 삶의 현장이다. 온라인 현실이 우리들의 중요한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몸의 일부와 사회생활의 한 부분이 된 현실 속에서, 사회규칙들과 규범들이 어떻게 변화발전되는가? 그리고 그 변화 발전 속에서 기존 '민주주의 관점'은 또 어떻게 변화되고 실천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자료 (1) 우연히 본 한 온라인 홈페이지


http://theacro.com/zbxe/notice/707221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