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내용 요약) 

마르크스의 주장과 명제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란 한 방법이고, 이론적 사고 체계이며,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추종자들에게는 권위를 지닌 원전 총서들이다. 

그런데 이런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향 때문에 늘 난관에 봉착했다. 그 경향이란 이런 태도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 마르크스는 이렇게 주장했어야 했어’라고 자기들이 먼저 결정해 놓고서, 그 다음에 이미 선택된 관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마르크스 텍스트의 권위를 들이댔던 경향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진화적 발전 과정을 깊이 학습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절충주의의 문제점들이 더 증폭되는 것을 통제해왔다. 그런데 알튀세는 마르크스의 장점이 그 저서들에 있기 보다는,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어’라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도록 허용해 준 것에 있다고 봤다. 

하지만 알튀세의 이러한 발견은 위에서 언급한 ‘통제’가 결여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알튀세의 마르크스 해석에는 심층적인 마르크스 사상의 진화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


Chapter 15.  the structure of capital 자본의 구조 

Moreover the revival of Marxism requires a genuine willingness to see what Marx was trying to do, though this does not imply agreement with all his propositions. Marxism, which is at once a method, a body of theoretical thinking, and collection of texts regarded by its followers as authoritative, has always suffered from the tendency of Marxists to begin by deciding what they think Marx ought to have said, and then to look for textual authority for the chose views.


Such eclecticism has normally been controlled by a serious study of the evolution of Marx’s own thought.  M.Althusser’s discovery that the merit of Marx lies not so much in his own writings, but in allowing Althusser to say what he ought to have said, removes this control.

 

It is to be feared that he will not be the only theorist to replace the real Marx by one of his own construction. Whether the Aluthsserian Marx or other analogous constructs will turn out to be as interesting as the original is , however, quite another question.

1966 (51)

(Eric Hobsbawm, Revolutionaries, (London:Abacus), 1973,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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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European st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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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Meisner, The Deng  Xiaoping Era: An Inquiry into the fate of Chinese Socialism 1978-1994, (New York: Hill and Wang), 1996,  p.192  등 샤오핑 시대: 1978-1994 중국 사회주의 운명에 대한 연구

The social results of Market Reform :

"Without the industrial revolution that took place during Mao’s time, the economic reformers who rose to prominence with Deng Xiaoping would have found little to reform.p.192

 

(1)   마오쩌둥 집권 시기 이룩한 산업 혁명이 없었더라면, 등샤오핑의 경제개혁가들이 성취할 수 있는 개혁내용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산업화 정책이 이후 등샤오핑의 중국 경제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서방 학자들과 미디어가 마오의 계획경제를 비판하고 등샤오핑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과 대조시키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2)   메모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당시, 중국 제조업 규모는 벨기에 보다 적었고, 생산량도 벨기에의 5분의 1 정도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은 세계 6대 산업국가로 등극했다. 마오쩌둥 집권 시기 (1949-1976) 중국의 산업규모는 30배 증가했다.

1 5개년 계획 (1953-1957)은 매년  18% 성장했다.

문화혁명 기간 (1966-1976)에도 연간 10%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3)   P.191 각주 (7)

독일 경제성장율 33% (1인당 17%) (1880-1914)

일본 경제성장율 43% (1인당 28%) (1874-1929)

소련 경제성장율 54% (1인당 44%) (1928-1958)

중국 경제성장율 64% (1인당 34%) (1952-1972)

자료 출처: Data drawn from Simon Kuznets, Economic Growth of Nations: Total Output and Production Structu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4) 농업 정책 실천이 어렵다. 이론과 실제 차이. 

마오쩌둥은 소련 스탈린의 농업 정책을 비판했지만, 정작 중국의 농업도 제조업 발달과 비교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58년 마오는 스탈린 산업정책은 농업을 희생시키고 도시 산업화를 달성했다고 비판했다.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잡느라, 연못 물을 다 빼 버렸다"고 비난했다.


중국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1949-1978 기간 동안에, 중화학은 90배, 경공업은 20배 성장했으나, 농업은 단지 2.4배 성장에 그쳤다. 

그런데다 중화학 분야 발전은 농업이나 경공업의 기술적 변화의 필요에 기여하는 방향보다는 중화학 산업 그 자체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산업 부문간 불균형 발달의 원인은 중국 정부의 투자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 

"Yet the advice was not heeded in the actual world of Maoist China. Over the years 1949-78, the gross output of heavy industry increased 90-fold whereas light industry increased 20-fold and agriculture only 2.4-fold. 

Moreover, the heavy industrial sector developed in a manner that tended to serve the needs of heavy industry itself rather than the needs for the technical transformation of agriculture or the development of light industry. 

These imbalances were partly the result of state investment policies.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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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지: 문재인 정부 출범 시작 ~ 6개월 허니문 기간: 아시아 정치사,  몽고 역사


If you kill me, Jebe says, I'll only rot away in a plot of earth the size of your hand; but if you show mercy, I'll cut through oceans and mountains for you.


'He shall be named Jebe ['arrow-point'] and I will use him as my arrow.'


테무진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당신 손 크기만한 한 줌 흙으로 썩어 들어갈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려준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바다와 산을 가로질러 내달릴 것이오. 


테무진이 말했다. '그 이름을 제베 (화살 촉)로 개명하고 난 그를 내 화살로 쓸 것이다'


John Man, Genghis Khan: Life, Death and Resurrection, (London:Bantam Books), 2004, p.114





p.120

Jebe, Jelme, Subedei and Khubilai were raised on human flesh, they have

Foreheads of cast copper,

Chisels for snouts and

Awls for tongues

With hearts of iron and

Ships for swords they go,

Eating the dew and

Riding the wind.








Jebe (or Jebei, Mongolian: Зэв, Zev; birth name: Jirqo'adai (Modern Mongolian: Zurgadai), Mongolian: Зургаадай, Simplified Chinese: 哲别) (death: May 23, 1223)[1]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Noyans (generals) of Genghis Khan. 


He belonged to the Besud clan, part of the Taichud tribe, which was under Targudai Khiriltug's leadership at the time of Genghis Khan.[2] 


Even though Jebe was originally an enemy soldier, Genghis Khan recruited him and turned him into one of his greatest generals. Jeb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helping to expand the territory of Genghis Khan's empire.


[3] Despite playing a large role as a general for Genghis Khan, there are relatively few sources or biographies about his life.


[4] Jebe has been described as "the greatest cavalry general in history" for his unorthodox and daring maneuver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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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책이다. 이태준의 <서간문 강화>다. 고교시절 광주고 앞 계림동 헌책방에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500원지, 800원지를 주고 사서 봤는데, 그 전에 미처 몰랐던 글쓰기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생각을 우리 말로 표현하는 법에 대해서. 사실 인간 조건 상 생각하는 것이랑 말, 혹은 문장과 어떻게 일치를 시키겠는가마는.

헌책방 계림동 시절 이후, 토론토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이태준의 <서간문 강화>다. 


이제는 인터넷 발달로 시간과 공간이 축소되어, 삼일 일주일 이주 한달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 


동시 접속시대이다. 떨어져도 옆에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기술의 발전은 늘 좋음이 51%쯤, 나쁜 측면이 49%쯤이라고 해두자. 


무작위적으로 익명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면부지의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까지 샅샅이 알 수 있는 인터넷 시대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외국인이건 한국사람이건 그 사람의 sns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블로그 등)에 가보면, 그야말로 옛날로 치면 다 각본없는 소설들이니까. 


물론 그래봐야 유명인사, 셀리브리티의 공적 사적인 공연장에 불과한 곳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이 갖는 특질이다. 전자 편지 Email 이 등장할 때만 해도 종이 편지, 우표 등을 부치지 않아서 신기해했다. 외국에 있는 가족과도 쉽게 연락이 가능했으니까. 001, 002 국제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태준이 1943년 <서간문 강화>를 쓸 때만 해도, 아마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 같다.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이 인구 태반이었을테니까. 이태준 시절만 해도 편지를 읽거나 쓰지 못해 글을 아는 사람이 편지를 읽어주곤 했다.


아래 이태준 말이 눈길을 끌었다.  


"편지도 글이다. 글을 만드는 노력이 우선 싫은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모리 명문가라도 말로 하겠느냐 글로 하겠느냐 하면 으레 말로 하기를 취할 것이다."


1943년만 해도 '아무리"를 "아모리"라고 했다. 단어가 더 귀엽다.


10페이지. "한묵 翰墨 :문한 文翰과 필묵 筆墨 을 합쳐 놓은 말 )" 이라는 것이 있다. 그냥 편지와는 다르다. 선비와 선비 사이에 시문서화를 증답하며 예술과 학문으로 사귀는 편지를 가리킴이다."


그러니까 편지를 통해 서로 자신이 쓴 글을 주고 받으면서 토론, 논쟁을 하는 것을 '한묵'이라고 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나 헤겔, 마르크스식으로 표현하면 '다이어렉틱 Dialectic 둘이서 대화한다는 원래 뜻인데, 번역을 변증법이라고 어디서 해서 굉장히 어렵게 느껴진다)' 대화인데, 글로 하는 대화이다.


16 페이지 "편지는 문학이 아니라 실묭문이다" 이런 신념으로 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이태준은 말한다. 너무 글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남을 좋게 대하고 할 말을 분명히 전하라'는 것이다.


13 페이지. 이태준은 기술 발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전화만 보급된다면 편지란 소용없는 시대가 올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 생활 모든 각도에서 한문투의 양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편지에서도 그런 양식은 청산해 버리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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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cording to Robert Damton, Linguet is typical of the young men of "Grub Street" - men so desperate to attain the glory of the philosophes and so enraged at their inability to do so that ultimately they helped foment the Revolution


랑게(Linguet : 1736-1794)에 대한 한 해석: 로버트 댐튼의 경우,

랑게는 전형적인 가난한 저널리스트 작가들인 "그럽 스트리트"였다. 이 "그럽 스트리트" 작가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philosophes) 명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영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이러한 좌절감이 프랑스 혁명을 발발시키는데 일조했다. 


랑게 해석 (2) David Bell, Sarah Maza  데이비드 벨과 사라 마자 평가

: 랑게는 국가의 검열을 받지 않고서 재판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18세기 변호사들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법정 변론문은 여론을 형성하는 한 수단이었고 이는 결국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랑게의 정치적 내용과 그 시사점은 무엇인가? 핵심 주제는, 중앙집권화된 행정 국가의 발달 과정에 대한 것이다. 랑게의 문제의식을 해명하다 보면 프랑스가 어떻게 해서 근대 리버럴, 공화 국가를 형성해 나갔는가, 프랑스 국가 특질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랑게의 정치적 함축이 무엇인가?

19세기에 왜 프랑스는 미국과 달리 리버럴 공화적 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100년 이후에나 그것을 달성했는가?

미국 혁명은 고전적 공화주의 사상과 존 로크의 자연법 사상, 그리고 영국식 입헌주의 (British constitutionalism)을 결합시켜 리버럴-공화 국가를 건설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달성하는데 100년이나 더 걸렸다.


3. p.104 The Civic Republic 시민 공화정


랑게는 '군주제 monarchical leanings' 와 '공화주의 republican leanings' 경향을 동시에 주장했다.

랑게는 어떻게 공화주의를 자기 이론 체계로 들어들였는가? 그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부정의 injustice'를 바로잡을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지닌 주권 (sovereign power)의 형태가 무엇인가를 찾아나섰다.


이 질문에 대한 랑게의 대답은 (1) 아시아이 절대군주 (Oriental Monarchies)는 그 부정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봤고 (2) 시민 공화정 (civic republics)은 그렇게 할 '의지'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봤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공화주의 (그리스, 로마 제국 하에서) 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 남자 시민들이 정치와 군사 영역에서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 해당 공화정의 생존 여부는 그 남자 시민들의 '탁월한 능력 arete; virtue' , 즉 시민의 덕의 실천 여부였다. 


4.  gender-bias Anschuung ; 여성에 대한 편견 


하지만 이러한 덕 virtue 도 사치와 부패의 영향으로 '악'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따라서 시민 공화주의 사상가들의 주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남자 시민들의 덕성을 함양하고, 그 국가가 '독재 정치, 전제주의'로 퇴락하는 것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가였다. 


남자 시민들의 덕 (탁월함 virtue)은 공적인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했다. 이러한 국가의 공적인 일에 적극적인 참여을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들이 필수적이다. 첫번째는 남자 시민들이 재산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이러한 재정 자립을 통해서 국가의 안녕과 복지에 전념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두번째는 남자 시민들의 빈부 격차가 크지 않을 정도로 균등한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적 정부 기능을 파괴할 수 있는 급격한 권력 불균형이 발생하지 않는다. 


랑게가 주목했던 주제는 국가 시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주권 sovereignty'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이다.


덕 virtue 이 '악'으로 타락하는 경향을 막기가 힘들다. 역사적으로 현재도 그렇다. 


여성의 해방을 근대 계몽 특징으로 본 몽테스키외와 반대로, 랑게는 여성의 '덕'은 사치 때문에 남성들보다 훨씬 더 쉽게 악'으로 타락한다고 봤다. 랑게에 따르면 여성은 가사 일만 하는 게 좋고, 남성들은 공적인 일에 전념해야 국가가 생존가능하다.


"여성은 사치로써 한 국가를 통치한다. 그리고 전제주의는 그 사치와 여성을 통해 확립된다"


5. 랑게, 가부장적 가족 운영과 국가의 정치적 '건강'은 분리 불가능하다.


이러한 공화주의 원리들은 모두다 똑같이 " 잘 만들어진 군주제 " "건강한 군주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랑게 주장: '주권의 권위'를 루소 (Rousseau)의 '일반 의지 general will' 수준과 동일하게 묘사했다. 


6. 랑게는 군주제 주권과 공화주의 주권을 화해시켜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틀이나 주장을 만들었는가? 

그렇지 못해 보이지만, 그가 1767년에 출판한 '시민법(민법) 이론 Thèorie des loix civiles 은 이 두 가지 각각 특징적인 '덕 virtue'을 설명해보이려고 했다. 



7. 



 


사전적 의미 "Grup Street" : used in reference to a world or class of impoverished journalists and writers

The world of impoverished writers and literary hacks.

- 실제 영국 런던 거리 이름, 밀튼 스트리트 Milton Street 지명, 가난한 작가들이 모여살았음




출처: 
Title: Searching for a "New System" of Government: Linguet and the Rise of the Centralized, Administrative State 
Author(s): Amalia D. Kessler 
Source: Historical Reflections / Réflexions Historiques, Vol. 28, No. 1 (Spring 2002), pp. 93-117 
Published by: Berghah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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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1 19:45


민중의 집>  정경섭 지음, 2012, 레디앙 출판사

(*책들을 토론토로 보내주신 채훈병님, 손은숙 국장님과 이름모를 당원 한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읽은 순서대로 독후감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9월 27일)

책의 주제들은 독자들의 자기 관심에 따라서 촛점을 맞추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래 글 역시 내 주관적인 견해이다. 아래 소감은 책을 다 읽고 떠오르는 한 가지 주제이다. 물론 정경섭 저자도 이 질문을 책 곳곳에서 <민중의 집> 방문지에서 던지고 있다. 

<민중의 집>의 주제의식: 정치정당과 '민중의 집'과의 관계 설정, 어떻게 양자를 서로 상승작용하는 관계로 만들 것인가?  2000년~2012년 진보정당(한국 좌파라고 통칭될 수 있음) 운동은 2012년 총선을 전후로 대중적으로 파산선고했다. 

내적으로 정치철학의 부재, 그 통일성 수준의 저하, 철학과 정책노선에 따른 정파가 아닌 인적 관계로 뭉친 계파들의 당 장악과 타 정파 배제, 새로운 정치주체들의 발굴 실패, 외부적으로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차별성 형성 실패 (통진당 급조와 급파와 폭력사태는 민주당과 새누리당과 정치행태에서 차이없음을 드러냈고, 제 3의 정당 건설 가능성에 냉소를 보내고 있음) 등으로 향후 최소한 5년, 길게는 10년간 진보정당운동은 역풍 속에 전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리한 정치조건 속에서 <민중의 집> 기획과 실천이 1) 의회주의라는 냉소와 2) 등대정당이라는 비아냥이라는 잘못된 주장들을 깨부수고 다시 한번 당 건설과 그 토대 확장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폭발적인 투쟁들이 일어났지만 공장과 회사라는 공간을 뛰어넘지 못한 '경제주의적 노조 business unionism'의 한계를 극복하는 '지역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특히  대중적 정당을 지향하는 진보신당과 그 당원들은  입법과 행정 제도권력에 도전해야 하고 또 운영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민중의 집>의 프로그램들은 우선적으로 동네 입법 행정이라는 제도와 권력을 예비적으로 운영해보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두 가지를 우선 이야기해보자. 하나는 <민중의 집>과 같은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는 소위 '경쟁자들'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 한 가지는 동네에 있는 피아노 등 음악 사설 학원들, 요리 학원들, 외국어 학원들, 미술 학원들 (*한국 도시의 중요한 특성들 중 하나가 사교육 공간의 발달이다) 등이다. 다른 하나는 시의회,구청 (동사무소 등)과 같은 제도권력 기관이다. 

현재 <민중의 집>이 위 두 가지 경쟁자들과 경쟁해서 당장 몇 년 안에 승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꾸준히 경쟁(*이 말이 나쁜 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게 될 것임)해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지난 4년을 뒤돌아 볼 때, 노회찬의 <마들 연구소>도 심상정의 <마을 학교> 등의 개인 정치가의 정치사무소 프로그램들과 다르면서도 동시에 진보정당 당원들의 정치가로서 훈련장이 될 수 있는 <민중의 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특히 인구 10만 단위당 1명~2명 공직자 후보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새로운 좌파정당의 급선무라고 했을 때, 기존 보수정당들과의 경쟁 체제에 (단기적 2년~4년) 어떻게 '민중의집 (5년~10년 중장기적 운영)' 기획 이 2가지를 다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스웨덴의 경우 <민중의 집>은 초창기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 정당 (SAP)  http://www.socialdemokraterna.se/과 연관성이나 노조와의 유대관계와 달리,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집권당이 되고 제도가 안착함에 따라, <민중의 집>은 사회 생활공동체-자치기구, 공적 서비스 기구에 가까워지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토론할 필요성도 있다.  

지구당도 없는 상황, 또 지역 당협의 '물리적 공간'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 당 (*앞으로 건설될 당)의 급선무 무엇인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타 정당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구청(행정), 시의원(입법)에 대한 '감시' '비판' 즉 도전자적 입장을 취하는 일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고, 인적 재정이 투하되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일들과 <민중의 집>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당장에 2014년 지방선거가 돌아온다. <민중의 집> 프로그램의 정치적 성과는 짧아야 5년~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이 문제는 <민중의 집> 프로그램과 역할, 그 콘텐츠를 떠나서, 당 조직원들의 주체역량과 미래 계획 등 '조직적'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의 집> 저자 정경섭위원장도 계속해서 질문을 이 책 속에서 던지고 있다. 몇 가지 답들도 있지만, 아직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민중의 집>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원들이 읽어보고 같이 토론할 주제들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민중의 집: 정경섭 저>에는 크게 4개의 나라,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그리고 한국(마포) 이 등장하고, 각 나라 도시별로 적게는 1만명 인구에서 50만 도시까지 등장하는데, 한국 마포의 경우는 인구가 40만으로 엄청나게 큰 도시이고, 스웨덴의 <민중의 집> 규모를 감안하면 마포구에만 40개의 <민중의 집>이 건설될 수 있다.

독후감 2. <민중의 집>에 나온 '민중의 집' 이란 무엇인가? 형성, 발전, 쇠퇴, 그리고 새로운 진화들 

민중의 집의 포괄적 정의: "민중의 집 회원은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기부, 소비, 특별한 재능,재미있는 대화나 이야기라도 나누는 곳이다. p.100 (이탈리아)" 두번째, 정당과 <민중의 집>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그 정의는 "  더 이상 좌파의 공간은 아닐지라도 과거 가난한 지역 공동체의 복합 공간 (p.47) "이다. 또한 " 다양한 좌파-사회주의 정당들의 경쟁의 공간"이 바로 <민중의 집>이기도 하다.

 리프레디 지방 상호부조조합( SMS) 초기에는 이탈리아 사회당 PSI 강세,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 급진적 카톨릭 정당 등이 민중의 집을 운영했다.  ( p.107)  세번째, 민중의 집은 "정치와 밥, 영화, 음악, 춤을 제공 ( p.134)"하고, "이주 노동자들도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음식 가격을 함께 결정하는“ (p. 138) 사회 서비스 기능을 한다.  

<민중의 집>의 다양한 변형들과 진화들 : 형성, 발전, 쇠퇴, 진화 시도

스웨덴 Sweden의 경우, 초창기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상호부조 모임이었으나, 지난 100년간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활 공동체 공간, 특히 이주민 여성 실업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적 공간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p.179) 

더 나아가서 사회적 서비스 기능이 더욱더 부각되기도 한다. 스웨덴의 경우, 생활의 집 (House of Life) (p.266)이라고 불리우는데,  40여개 지역 단체들이 연합해서 소피엘룬드 민중의 집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들까지 누구나 다 이용하고 있고, 특히 문화적 공간, 또  실업자 재교육도 실시하기도 한다. ( p.267) “민중의 집이란 공간은 누구나 올라와 원하는 것을 펼칠 수 있는 열린 무대같은 곳이다” ( p.272)  

이탈리아의 경우, <민중의 집>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아르치'라고 불리우는 (ARCI: 이탈리아 문화 레크리에이션 연합 association)이 또 다른 형태의 <민중의 집>으로 존재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센터라고 불리우는 곳도 있는데, 이 곳에서는 빈집점거, 빈공장 점검 등 활동이 있고, 로마 근처에서 주로 1990년대부터 활성화되었다. 

이탈리아의 <노동회의소>  p. 73  노동조합 이전 민중의 집처럼 지역 노동자 조직 연결 공간, 고용 서비스 제공 역할 -> 이후 노조 운동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치르콜로 Circolo는 밀라노에서 유명한데, 밀라노에서는 정치보다는 문화 활동에 더 치중해서, <민중의 집>  간판을 내리고 치르콜로를 대신 올리기도 했다.   

스웨덴의 경우는 현재, 정당과 <민중의 집>관계나, 노조와 <민중의 집> 관계보다는, 지역 자치 공간과 사회적 서비스 기능을 담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스웨덴의 경우, 민중의 집 연합회 (533개 조직/  125개 민중의 공원) 가 특징적이다. 거기에다 민중의 집 운영과 프로그램 진행을 보조하는 <자회사> 존재한다. 이 자회사들이 영화, 놀이기구, 동물원, 문화 상품 행사 담당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스웨덴의 경우 적은 도시들에서 이미 <민중의 집>의 사회적 기능은 한국 구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모든 프로그램들을 상당부분 맡아서 수행하는 "사회 서비스" 기관인 셈이다. 
 
<민중의 집>은 스웨덴 니내샴 지역에서는 정치 선거  투표소로 이용 (Nynaeshamn)p.188-189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민중의 집>이 한국의 교회처럼 지역 주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공신력이 있는 준-공공 단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래스배드 Räsveds: 인구 1만 소도시인데도,  흑인, 터어키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을 <민중의 집>에서 제공하고 있다. 린케비 지역은 " 보수 진보등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정당과는 독립적인 관계이다. 이사장도 공화당 소속이다. 다른 민중의 집은 사민당과 가깝지만 여기는 조금 특별한 경우로, 사민당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당들도 참여하고 있다." ( p.209) 

 

이탈리아의 경우, <민중의 집>이 쇠퇴한 곳도 많았다. "정치가 없는 사회적 장소, 공산당이 2개의 민중의 집을 운영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술집이지 정당 정치활동은 하지 않는다." ( p. 58)   레오날도 인터뷰 "사람들이 카드놀이만 너무 많이 한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나태해졌다.  (p. 101) 또한 볼료냐 ( Bolgna: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좌파와 공산당원들이 많았던 유서깊은 도시임 ) 에서도 임대료를 내지 못해서 <민중의 집>이 폐쇄되고,  (p.123)
1990년대 이후 공산당이 쇠락해짐에 따라 민중의 집도 쇠퇴 (15-16개에서 3개로 감소)하게 되었다.  

최근 이탈리아 좌파들이 재건 공산당과 좌파생태자유 그룹으로 양분되었지만, 좌파부흥을 위해서 <민중의 집> 부활도 꾀하고 있다.  좌파생태자유 (Nichi Vendola: 니치 벤돌라 개인 인기 의존은 문제점 ) . 민주당과의 연정 이후, 이탈리아 좌파는 분열했고, 쇠퇴 조짐을 보여줬다 ( p. 68)   

<민중의 집>과 정당과의 관계

"스웨덴 노총이나 사민당은 다른 풀뿌리 조직에 비해 역할이 적다고 한다. 한때는 사민당 당원들과 노총의 조합원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 공동체를 꿈꾸며 설립했던 스웨덴 민중의 집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예테보리 p.250 " 

 "현재 스웨덴에서 민중의 집은 과거 민중의 집이 만들어지던 당시만큼 급진적인 공간은아니었다. 가령 이탈리아처럼 ‘여기는 좌파의 집’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민중의 집과 관련된 정당과 노총의 움직임은 중앙에서든 지역에서든 거의 포착되지 않았다. " (p.278) 

스페인 <민중의 집> 현주소

스페인 (Spain) 20세기 초반에  900개나 되던 민중의 집은 왜 사라졌나? 스페인 내전이후, 프랑코 Franco 독재자 민중의 집 파괴 책동.  

 “더이상 민중의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오래된 시골 마을에서는 우리당[스페인 사회노동당] 사무실을 민중의 집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당과 노조의 사무실이 나뉘고 이들 간에 멤버십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과거와 같은 민중의 집은 없다.” (p.330) 

한국 서울 마포 <민중의 집> 목표:  마포 민중의 집 당과의 관계

" 당 조직이 공식적으로 민중의 집 운영에 관여하는 것도 아니고 재정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의 정치적 성향이 민주의 집 사업과 접합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민중의 집 탄생 자체가 사회주의자의 아지트였다.) " p. 95

 마포 <민중의 집>의 경우는, 그 목표 설정은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치르콜로가 어떤  연대의 인프라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19세기 치르콜로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등장할 새로운 저항과 정치의 모태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밀라노: 치르콜로 아르치 벨레차 Circol ARCI Bellezza) ( 과제 p.142) 

3.

보충 후기: 약간 아쉬운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들어서 책 편집 과정에서 '주제들'을 먼저 배치하고 지은이가 답변하는 과정이 뚜렷했으면 더 좋았겠다. 예를들어서 <당>건설과 <민중의 집> 관계, 정경섭 저자가 이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는데, 답변들이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마포의 경우가 한 눈에 비교되게끔 ...

두번째 경우,마지막 장 마지막 페이지에 스페인 <사회주의자 노동자 정당>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Pablo Iglesias) 의 발언으로 책을 끝맺고 있는데, 정경섭 위원장의 소감을 난 더 듣고 싶었다. 조사와 탐방 이후, 머리 속을 맴도는 후기들. 

그리고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경우는 스페인에 사회주의와 마르크스 아이디어가 전달되는 과정 자체가 '프랑스' 번역을 통해서, 또 마르크스 사위 (폴 라파르그)가 파견되긴 했지만, 그건 인적인 관계였을 뿐, 스페인의 사회에대한 치밀한 분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예를들어서 스페인의 경우 안달루시아 (Andalusia)나 카탈로니아 (Catalonia)의 경우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전통과 활약이 강했다. 이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포함한 스페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을 스페인 (농촌 지역 다수) 사회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p.297 이하를 보면, 정경섭 저자도 안달루시아 (농촌)에서 민중의 집 1900-1939년 사이117개가 있었고, 가장 왕성했다고 했는데, 그 주체들은 누구였는지, 이들과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나 스페인 사회주의자 노동자당과의 관계는 실제로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이 궁금했는데, 잘 나와 있지 않아서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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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탈의 논문을 읽고 -  메모
내가 파악한  히틀러 등장 전후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실패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독일 당시 사민당 (사회주의자 사민당 )과 공산당, 그리고 사민당을 지지한 노조대표들은 나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정치적 적 앞에서 연대하지도 못했다.

2) 폰 파펜, 폰 쉴라이허, 히틀러 등 정치적 의도들을 파악하지 못한 채, 노조 대표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행동 개시를 통해서, 나치의 세력 확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정치적 대기주의에 경도되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채택하고 말았다. 
군부와 노동자들 사이에 시민 내전이 발발하지 않을까 두려워만 했지, 노조와 사민당 (혹은 공산당)의 강력한 연대에 근거한 단기적 중기적 정치 계획이 없었다.
 
브라운탈의 논문을 요약하면서 몇 가지 역사적 사진들을 덧붙여보기로 한다. 

논문 제목: The failure of socialist labor :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Gerard Braunthal,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1956), 339-353. 

어떠한 정치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브라운탈의 설명 :

바이마르 시대와 파시즘 시기 3가지 노동운동 노조 정치 이념들 (이데올로기)  
1)사회주의자 노동운동 (SPD 사민당:*사민당과 독일 공산당 KPD은 당시 사이가 좋지 않음) 
2)기독교 연합-카톨릭 사회 행동 (Christian union-Catholic social Action)
3)히르쉬 둥커 유니온 Hirsch Duncker Union (맨체스터 리버럴리즘 Manchester Liberalism) 

조직화 정도는 다음과 같다. 
아데게베 (전노총: 전국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 Alle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ADGB) -전국 조합원 숫자는 500만이었다. 

아에프아  AFA: (월급쟁이 자유 총연맹: Allgemeiner freier Angestelltenbund : 50만 조합원

아데베베 : ADBB : Allgemeiner –Deutscher Beamtenbund: 전국 공무원 노조 : 17만
3개 노조 총연맹은 전체 노동자의 25%를 대표했다. 

미국과 달리 독일 노조는 사민당(SPD)과 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1920년 우파 카프 푸취 ( Kapp Putsch)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원들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쿠데타를 막아냈다. 
“자유” 노조 총연맹들의 조합원들과 노조 대표들은 사회주의자였고 동시에 당시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다. 

당시 독일 정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가?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 민주주의가 위협받자, 사회주의 노동조합 운동의 열기는 식기 시작했고 거의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자본주의 대공황이 발생하자 조직 노동자들은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실업이 치솟았고 독일 경제 생존 자체가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폰 파펜 (Von Papen), 폰 쉴라이어허 ( von Schleicher), 히틀러 등 권위주의적 정권들 하에서 과연 사회주의자 노동조합들은 무엇을 했는가? 


(사진: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가운데), 오른쪽 폰 파펜이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파펜 쿠데타: 

1932년 7월 20일 독일 수상 프란쯔 폰 파펜이 오토 브라운 (사회 민주주의자)이 이끌었던 프러시아 연립정부를 축출했다. 이 보수적 폰 파펜은 이 사실을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폰 파펜은 장관 8명을 해고해버렸고 이 해고자들은 이 문제를 대법원에 소송했다. 폰 파펜의 쿠데타는 독일 파시즘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고 정치에서 ‘불법’이 횡행하는 출발점이었다. 


(1934년 1월 1일, 폰 파펜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부수상이 되었다. 그의 아내 마르타와 함께 베를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한 행사에 참여해,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 노조들은 이러한 폰 파펜의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는가?

소수지만 몇 개 공장들에서 평조합원들을 중심이 되어 작업을 중단했다. 지멘스와 이.게. 파르벤 베를린 노동자들은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준-군사조직체이자 사회주의 주도 방어 조직인, 철의 연대 전선 노동자들 역시 베를린에서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게베 (전노총)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에스.페.데)도 어떠한 행동 개시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실업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파업이나 정치행동은 노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업 증가와 정치적 패배주의가 얽혀서 결국 정치적 대기주의가 노동조합 대표들과 사민당 에스페데에 널리 퍼지고 말았다. 

철도 노조 역시 투쟁의지가 높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실업자들이 그 노조조합원들의 직장을 대체해버릴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폰 파펜의 쿠데타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놓고 노조 대표자들과 사민당 내부에서 그 의견들이 분분했다. 폰 파펜 쿠데타에 대한 의견 불일치 독일 전노총과 사민당의 정치적 대기주의를 부추겼다. 


(사민당 오토 벨즈, 나치 히틀러가 집권하자 저항하다가 결국  파리로 망명했다) 



1932년 7월 21일 독일 사민당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은 개시하지 않았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 전술을 채택했다. 다음 세 가지 이유들 때문이었다. 10일 후에 있을 7월 31일 선거에서 좌파 정당들이 다수당이 될 것이고 파시즘 지지는 잦아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두번째는 노동자들과 군대(라이히스베: Reichswehr)와의 충돌과 시민 내전을 예방하고자 했다. 세번째는 폰 파펜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막아낼 것이라는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31일 독일 총선 결과는 사민당, 전노총 대표들의 예측과 달리 나치가 제 1당이 되고 말았다) 


사민당 (SPD)은 독일 공산당의 총파업 제안 역시 거부했다. 그 이유는 독일 공산당이 나치가 1931년에 프러시아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두고 서로 협조했다는 것이다. 

사민당 대표 오토 벨스 (Otto Wels)는 유혈사태를 우려해 노조와 정당의 직접적인 행동에 찬성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들을 체계적으로 낮춰버렸다. 프랑크푸르트 노조 위원회 의장 오토 미스바흐 (Otto Misbach)는 성공하지 못할 정치적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다. 철강 노조 대변인이자, 프랑크푸르트 ‘사회주의자 정치부대 라이히스바너 Reichsbanner (검정-빨강-황금색  배너) 위원회 대변인인   물란스키 (Mulanski)는 노동자들이 데모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 발표만 해버렸다.

(검정-빨강-황금 3가지 색깔 배너. 통일, 권리와 자유를 상징함) 



 ‘철의 전선 (Eiserner Front) 집행위원들’ 역시 코커스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도 대부분 사민당 대표들과 노조 대표들은 즉각적인 총파업은 시민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반대해  라이히스바너 대표 칼 횔터만 (Karl Höltermann)과  월급쟁이 노동조합 (AFA) 대표  지그프리트 아우프호이저(Siegfried Aufhäuser)는 최소한  파업과 같은 데모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노조 대표단은 이들의 제안 역시 거부했다.


(철의 전선, 아아세너 프론트로 ! 1932년 슬로건) 


7월 20일과 21일 베를린 노조 대표들은 파업촉구 (provocateur)에 대한 경고조치를 내렸고, 합법노조를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폰 파펜의 행정 장관 8명 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세 차례 회의를 거쳤으나 그 결론은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이었고,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 반대였다.

그러나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총선에서 더 많은 의석을 얻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허약한 구조를 깨뜨리고 있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Gerard Braunthal)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나치의 총선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노조, 사민당에 1차 책임이 있다고 봤다. 

1932년 폰 파펜의 쿠데타 시기에 드러난 사민당과 노조의 ‘리더십’ 위기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파시즘 세력은 커져가는 반면에 노조와 사회주의자 사민당은 소수파 (행동파)와 다수 온건파로 분열되어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은 보류되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총파업 강행을 거부했고, 대규모 군중 시위 조직화 역시 거부했다. 이 같은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의 소극적 대처와 정치적 대기주의는 반파시즘 운동을 약화시켰다. 

2. 두번째 국면: 쉴라이허 정권  The Schleicher Regime 하에서 사민당과 노조대표들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폰 쉴라이허와 폰 파펜 )


1932년 12월 3일 폰 파펜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이었던 쿠르트 폰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승계했다. 쉴라이허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서 군대 장군들의 지도하에 노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군대와 노동운동(노동조합)을 결합시켜 히틀러 파시즘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쉴라이허 발상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군부는 폰 파펜, 괴링, 히틀러의 연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쉴라이허는 나름대로 나치 온간파와 강경파를 분리하기 위해서 온건파에 속하는 그레고 쉬트라세 (Gregor Strasser)와 협상에 나섰지만, 이후에 쉬트라세의 세력이 나치 내부에서 점차 힘을 잃어버려서 쉴라이허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쉴라이허는 노동조합(노동운동)과 사민당 (정치)를 분리시켜 노동 총연맹을 건설해서, 이를 중심으로 나치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짰다. 또한 길드 (Guild)를 강조해서 경제 체제를 길드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삼아 코포라티즘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수상 취임 5일 전,  1932년 11월 28일 쉴라이허는 아데게베 (전노총) 위원장 테오도르 라이파트(Theodor Leipart) 등 노조 대표들을 개인적 모임에 초대해 그를 격려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테오도르 라이파트 Leipart , 독일 전노총 대표) 


그러나 이러한 쉴라이허의 계략을 알아챈 사민당 (SPD) 은 전노총 대표 라이파트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노동조합과 정당을 분리시켜내려는 쉴라이허에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쉴라이허와 노조 대표들인 라이파트, 빌헬름 에거트 (Eggert) 사이에 정치적인 거래가 오고갔다. 폰 파펜 정권이 대규모 임금 삭감을 감행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대토지 계급 융커 Junker 에게는 혜택을 주자, 쉴라이허는 9월 5일 경, 이러한 폰 파펜 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신에게 제출해달라고 라이파트와 에거트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이러한 쉴라이허 제안에 화답하며, 주요 기업들의 사회화를 제안했고, 대규모 공공 노동 프로그램을 실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쉴라이허가 수용하면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계승하고 대부분 보수적인 행정 장관들을 유임시키자, 사민당과 다른 정당들은 쉴라이허 정권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3. 세번째 국면: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1933년 1월 28일에 폰 파펜 측근들은 쉴라이허의 사임을 요구했다. 1월 30일 역사적인 날이 오고 말았다. 대통령 힌덴브르크 (Hindenburg)는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아돌프 히틀러를 새 수상으로 임명하고 말았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 파울 폰 힌덴브루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메이데이를 경축하고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평가:  어떻게 해서 독일 나치 파시즘,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는가? 

독일 노조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정치 행동을 개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일을 나치 파시즘으로부터 독일을 구출하지 못했다.  총파업과 같은 즉각 행동을 반대한 독일 노조 대표들은 만약 총파업에 나섰을 경우, 군부가 노동조합을 탄압할 수 있다고 판단해버렸다. 할 가능성을 들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수상이 되었다. 

당시 사민당과 독일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권좌에서 곧 내려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노조지도자들은 반파시즘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독일 노조들은 1930년대 미국처럼 “뉴딜 New Deal”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스웨덴 노조들의 정치적 요구들도 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차이를 줄이고 모두다 반 나치즘 반파시즘 전선으로 나가도록 두 정당들을 독일 노조들은 추동하지도 않았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노동조합 조직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데모도 하지 않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다음 날, 1933년 1월 31일, 전노총 (ADGB)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정부 태도를 가진 노동자들 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고 오히려 노동자 이해에 반하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동 정부라 할지라도 노동운동과 노조를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오판했다. 그 이유는 ‘두려움’ 이다. 노조 대표들은 어떤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이러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오판을 한 것이다. 

1933년 2월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저항이 터져나왔다. 괴링(Göring)은 독일 좌파들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 준 군사조직인 SA와 SS (폭풍 부대: 쉬투름압타이룽 Sturm-abteilung :SA, “방위군 : 슈츠쉬타펠 Schutz-staffel )를 창설했다. 노동자 일부는 이러한 괴링에 저항했다. 또한 베를린 섬유 의류 노동자들과 인쇄 노동자들은 사민당과 공산당 (KPD)가 서로 협력해서 나치에 저항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은 이러한 두가지 요구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1933년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정당NSDAP) 는 승리했다. 10일 이후 독일 노조 대표는 노조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3월 5일 총선에서는 사민당을 지지했으나 그 이후 중립적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나치에 굴복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굴복적인 독일 노조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는 독일 노조를 파괴했고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1933년 3월 8일 베나우 (Bernau) 소재 노동조합 학교에 괴링 나치 준군사조직 SA와 SS가 침입했고, 노동조합 건물들에 난입하거나 노조 신문과 언론들을 탄압했다. 

이러한 나치의 노동운동과 노조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도 노동 운동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통일된 평가와 판단이 없었다. 심지어 허만 젤바흐 (Hermann Seelbarch)는 전노총 노조간부 학교 교장이면서 동시에 나치 당원이었다. (* 의심이 든다: 나치가 노조에 직접적으로 조직원으로 개입했을 수도 있다) 젤바흐와 같은 자들은 노조와 나치와의 타협을 유도해냈다. 히틀러의 정치 조언자였던 칼 쉬미트 (Carl Schmitt)의 측근이었던 후버(E.R.Huber)는 노조는 제 3 제국 (the Third Reich)의 협력과 조정 하에서 합법적인 공적 조직(제도)이라고 주장했다.
 


(1933년 5월 2일 베를린 엥겔스우퍼에 있는 한  노조 사무실에 침입하는 나치 폭풍부대 SA ) 


브루크너 (Bruckner)가 대표로 있던 ‘독일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NSBO’가 전노총 대표들과 임금 및 노동 현안들을 협의했고 통제했다. 라이파트는 전노총 대표 사임을 거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933년 3월 28일 AFA 는 나치에 굴복했고, 4월 6일 공무원 노조는 해산했다. 노동절 (MAY Day) 이름은 ‘국가 노동일 National Labor Day’로 개명되었다. 4월 15일에는 전노총 (ADGB)가 나치에 굴복하고 말았다. 4월 19일에는 완전히 굴복 단계로 발전했고,  나치의 지원하 5월 1일 메이데이를 환영한다고 공식 노조 홍보물에 발표했다. 

심지어 전노총은 나치당과 국가사회주의에 사회주의 요소가 있다고 인정했다. 결국 독일 노조들은 국가사회주의 나치에 완전히 포섭되었고 패배했다. “국가 사회주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임무는 전체 국가에 있다” 이런 식으로 노조의 나치 지지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 괴벨스, 나치는 이러한 노조의 굴복에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 정권은 5월 13일 테오도 라이파트, 그라스만 (Grassmann), 비젤 (Wissell)등 전노총 노조 대표자들을 체포했고, 노조 건물 등 재산들을 몰수해버렸다. 이러한 사회주의자 노조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유(리버럴) 노조들 역시 나치는 가만 놔두지 않고 탄압했다.

이후 나치 독일 노동 전선 (DAF)이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독일 노동자를 대표했다. 

그렇다면 1920년대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민당)은 왜 나치와 타협했는가? 대공황 국면이 닥치자 노조는 도덕적 해이되어 경제적 이기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나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총파업과 같은 행동을 전혀 개시하지도 못했다. 나치가 민주적 제도인 ‘노조’를 파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게라트 브라운탈은 이러한 진술들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당시 전노총을 비롯한 노조 대표들은 사민당과 협력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주적 조직이었던 노조도  내부로부터 썩어들어갔기 때문에, 나치와 같은 정치 세력이 등장했을 때 독일을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해내지 못한 채 오히려 히틀러에 굴복하고 말았다. 독일 민주 체제 (정치)와 독일 노동 운동이 강력하게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33년 1월 1일, 나치주의. 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엔.에스.베.오가 독일 총선을 앞두고 베를린에서 데모를 하고 있다. 독일 노동자들의 나치 참여 ) 




참고: NSBO: 국가 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시초는 1927년 베를린을 중심으로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이 민주-기독교 노조에 대항해 건설했고, 1928년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이 만들어졌다. 1931년 1월 15일 나치의 “독일 제국 공장 세포 조직”이 탄생했다. 이들은 “공장속으로 ! Hinein in die Betriebe : HIB !”라는 구호를 내걸고 프로파간다와 폭력 등을 사용해 조직을 키워나갔다.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 완장 :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와 나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결합되어 있다 ) 


1933년 5월 2일, 나치를 지지하지 않는 모든 노조들은 불법화되었고, NSBO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조직)만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 전선 (Deutsche Arbeitsfront : DAF)가 며칠 후 만들어졌고, 1935년 독일 노동 전선 (DAF)이 NSBO를 합병했다. 


(DAF 총책임자, 로베르트 라이 1890-1945) 



 


(독일 노동 전선 DAF 깃발: 나치를 상징하는 스와스티카 Swastika 와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바퀴가 섞여져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 2014년 10월 29일 90세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 암허스트 소재,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나치 :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 나치오날-조찌알리스티셰 도이체 아르바이터 파타이 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약칭 NSDAP)  

나치가 독일 총선에서 의석수를 증가해 나가는 과정

1. 1930년 9월 14일 총선 결과 :
총 577석 중, 과반은 289석 (정부 수립 가능)




2.  1932년 7월 31일  독일 총선, 총 608석에서 과반은 305석 기준.

폰 파펜 쿠데타 이후, 제 1당이 된 나치 (히틀러) 당. 230석을 얻었다. 사민당은 제 2당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3. 1932년 11월 6일 독일 총선
584석 중에 과반은 293석, 제 1당은 나치 196석, 제 2당은 사민당 121석, 제 3당은 공산당 100석이었다. 




4.  1933년 3월 5일 독일 총선

나치 (히틀러)가 288석을 얻어 제 1당이 되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축소되었다.



5. 1933년 11월 12일 총선, 야당들은 총선 참여가 금지되고, 나치 1당만이 참여했다.
661 석 중, 나치 당이 661석을 다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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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5 17, 프랑스 리용에서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내가 천성이 게으르기도 하고 여러 일들이 겹쳐서 편지쓸 겨를이 없었다. 미안하다......


입장은 경제적 -독단주의임을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만약 마르크스 당신이 원한다면, 사회 법칙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법칙들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양식을, 법칙 발견을 성공케하는 과정들을 함께 탐구해보자.

 

그러나 휴우’, 놀랍게도, 선험적 독단주의(교조주의) 소용없게 후에는 우리가 사람들을 그런 교리를 가르치는 꿈에도 꾸지 말자. 그리고 우리가  당신네 나라 사람인 마틴 루터가 저질른 모순 빠지지 말자. 마틴 루터는  카톨릭 신학을 타도하고 나서 곧바로 교회 파문 제도 도입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토대를 만들어버렸지 않느냐

지난 300 동안 독일 사람들은 루터가 조잡하고 수준낮게 놓은 일들을 다시 거꾸로 돌리느라 애썼지 않느냐.  


우리들은 후대 다른 사람들에게 루터와 같은 쓰레기를 남기지 말자. (*해설: 비록 우리가 애써서 만들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후대 사람들이 정리정돈해야 무질서이고 혼란이다. )


물론 모든 의견들을 대중 앞에 내보이자는 당신 생각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훌륭하고 충실한 논쟁을 해보자. 세상 사람들에게 지적이면서도 멀리 내다보는 관용을 보여주자. 그러나 우리가 단지 (사회주의) 운동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불관용과 편협함의  지도자들은 되지 말자. 새로운 종교의 선구자인체는 하지 말자. 비록 종교가 논리학의 종교이고 이성의 종교라도 해도.


우리 모두 다함께 모여서 모든 저항들을 독려하고, 모든 배제주의와 모든 신비주의를 철저히 비판하자.   문제라도 해결되고 토론되었다고 간주하지 말고, 우리가 최종 근거를 제시했을 때도 필요하다면  아이러니하고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토론을 다시 시작하자.


이런 조건들이 갖춰지면 즐거이 마르크스 당신과 같이 어울려 토론할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같이 의견을 교환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 당신 편지 속에 행동 시기라는 문구에 대해 생각을 말해야겠다.

실제로는 충격 지나지 않지만, 예전에는 혁명이라고 불렀던 급습(  coup de main)’없이는 어떠한 개혁 불가능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는 같다.


나도 견해를 이해하고 정당화해서 기꺼이 토론하고자 한다. 역시 오랫동안 견해를 견지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서 견해는 완전히 폐기했다. 우리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런 급습(혁명;충격)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공을 가져온다고 공언한 수단들은 실제로는 의존하고, 자의적인 의지, 간단히 말해 모순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혁명적 행동을 사회개혁 수단으로서 전진 배치시켜서는 안된다.  


내가 문제를 푸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느  경제적  결합체가 사회로부터 분리시켜놓은 부를 어느 다른 경제 결합체가 다시 사회로 되돌려놓게 함으로써 문제를 풀겠다.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을 통해서 소유론을 소유(제도) 반대하게 함으로써, 당신 독일인들이 코뮤니티라고 부르는 것을 건설하고,  당분간 자유 평등 실현에 정치활동을 제한시킬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약간의 지체는 있겠지만 여전히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들을 구비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가 선호하는 방식은 소유(재산:property) 서서히 불질러 태우는 것이지, 바쏠로뮤 (St.Bartholomew)에서  토지 소유주의 밤을 재현함으로써 오히려 소유(재산)제도를 더욱더 새롭게 강화시켜버리는 식은 아니다




출처:http://bit.ly/1U8q9a3


 

영어->한글 번역: NJ원시




소유 (재산)은 도둑질이다. 이 문장이 담긴 프루동의 책




기획: 마르크스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독서법과 프로젝트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의 '파업'의 의미를 폄하했던 프루동을 평생 비판했다. 

프루동은 당시 프랑스와 유럽 대륙의 노동자들, 수공업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의 '소유론'과 '무정부주의적 정치 실천'을 끊임없이 비판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70년이 흐른 지금, 7세대, 8세대가 지나온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논쟁점들과 그 생각의 '지형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프로동이 옳다, 아니 마르크스가 옳다는 '이미 결론난 게임'이 아니라, 그 토론 과정들을 공평하게 무대 위로 올려보자. 


* epistoloary (편지형식)  1: of, relating to, or suitable to a letter 2. 2: contained in or carried on by letters 3. 3: written in the form of a series of le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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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읽는 총량보다는 읽고 난 후에 '메모'와 기록에 더 신경써야겠다. 급반성하다. 기억력만 믿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자료들을 한국말로 번역해서 요약하거나 통째로 옮겨놓지 않으면, 31일 후에는 20%만 남고 80%는 다 도망가버린다는 것 아닌가? (에빙하우스의 망각 커브에 따르면). 요즘 비-영어권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영어자료나 해당 언어로도 보관해야 하고, 한국에 필요한 것은 일일이 다 번역해서 다시 한국어로 기록해야 한다. 영어나 다른 언어들도 그렇지만, 한국어 역시 성장과정에 있다. 또 한국말로도 완벽하게 어떤 생각들을 표현하고 싶기도 하다. 이건 고등학교 때부터 갖게 된 오래된 생각이다. 생각과-언어와의 완벽한 일치에 대한 '이상'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에빙하우스의 '망각 커브'를 보고, 이제는 읽는 것보다는 쓰고 기록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겠다.  

(다짐) 

1. 시사적인 신문은 읽은 다음에 번역해서 메모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2. 책은 이제 많이 읽으려는 것보다 읽은 것을 정리하는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라.



출처: The World of Psychology (심리학의 세계), Edit. Samuel E.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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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빙하우스의 ‘망각 커브’

20분 후에 읽은 총량의 58%만 기억하고, 1시간 이후에는 44%만 머리에 남는다.

이후로 ‘잊어버림’ 속도 비율(망각율) 더뎌진다. 1 지나면 34% 남고, 6 지나면 25%, 31 후에는 21%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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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주역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당통은 35세, 데물랭은 34세, 로베스피에르는 36세였다.왜 그들은 갈라서야했고, 결국 권력과 생명을 뺏아야했는가? 당통은 1793년  공공 안전 위원회 (the committee of public safety)의 '테러' 정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자코뱅 클럽의 상징 로베스피에르와 혁명 군사전략가 카르노는 외국군대들의 침입과 프랑스 내부 반동혁명 위험성 있다는 이유로, 당통의 견해에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실권자는 카르노, 대중적 상징은 로베스피에르> 


1794년 4월 5일, 결국 당통, 그리고 혁명 대변인이자 달필가 데물랭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영화 "당통"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당통과 데물랭을 설득하려는 장면들, 그리고 데물랭에 대한 '연민'이 잘 묘사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유럽국가들, 프러시아(독일)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의 침략과 내부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공공 안전 위원회'의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전략가인 카르노에게 있었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탁월한 대중연설과 의회에서 토론과 수사학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상징'이었다. 대중적 지도자이자 스타였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테러'정치는 교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러 정치의 대표적 사례는, 마라(Marat)의 명령과 책임으로 알려진 '9월 대학살'이다. 1792년 9월 1일 1100명의 죄수들이 처형된 바가 있다. 베르다(Verdun)를 반혁명군이 점령하고 파리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군들이 정치죄수들을 처형시켜버렸다.  1793년 9월 '컨벤션'이후 이러한 테러 정치는 제도화되었다.  


벨록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가 당통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대중들이 '테러' 정치를 원한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과신했다. 그래서 당통을 그냥 죽게 내버려둔 것이었다. 


<당통은 단두대로 끌려가면서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다"라고 외쳤다>



1794년 4월 5일 당통과 데물랭 등 29명의 지롱드 파는 처형당했다. 1794년 봄은 이렇게 잔인했고, 여름 역시 피냄새는 가득했다. 단대두에 끌려가면서 당통은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다"고 외쳤다. 로베스피에르는 다가오는 여름의 비극에서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당통을 스스로 버려버린 것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4월 이후, 공공안전위원회의 테러 정치와 그 군사적 시스템을 고쳐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공공안전위원회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카르노에게 있었다.  6월이 테러는 지속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공공안전위원회의 권력핵심부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했다. 7월 마지막 주, 테미도르 (Thermidor)의 2번째 주,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독재 권력 남용과 오용'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감옥 관리자는 로베스피에르의 '투옥'을 믿지 못해, 그를 '죄수'로 투옥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이 에피소드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지지받고 있었고, 파리시민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들은 호텔 드 빌 (de Ville)에 모여 공공안전위원회 타도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을 위해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식 '서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망설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 이후, 왜 공공안전위원회 타도 시도를 하지 않았는가?>


로베스피에르가 그런 '반란' 서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반란이 '인민 주권론'과 '인민의 일반 의지'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명'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차에, 공공안전위원회의 지원 하에, 의회 군대가 들이닥쳐 로베스피에르와 그 친구들을 체포했다. 1794년 7월 28일 오후 7:30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쓰(Saint-Just) 와 레바(Lebas) 등 21명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아니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후, '테러 정치'는 서서히 끝을 맺었다. 벨록(Belloc)의 평가대로,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공공안전위원회의 정치 테러의 '도구'에 불과했던가? 


<감상> 

프랑스 혁명 선언문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조항들을 보면, 당통, 데물랭, 로베스피에르 등의 죽음이 아니러니하다. 


8항에 보면, 처벌을 위해서는 반드시 '법적 근거'를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형 등 중형을 실행할 때는 '법 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혁명 선언'과 자신들의 죽음, 혁명동지들의 처형은 서로 어긋나버린 것 같다.


혁명동료의 관점에서 보면, 11항에 나온대로,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목숨을 내걸고 '혁명'을 한 동지들끼리 그런 자유로운 정치 토론을 했는가? 외국군대의 침략, 반혁명 가능성 하에 11항과 같은 정치 행위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이상적이었을까? 


2천년 넘게 존속해온 '왕권'을 타도하고, 그들을 단두대에 세운 그 '정치적 열기' 속에는 늘 '죽느냐 사느냐,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런 정치적 선택 속에서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통, 데물랭, 마라, 로베스삐에르가 스스로 내세원 '인민주권'과 '인민 의지'는 시대정신으로서 '부패한 독재 왕권'을 타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권력 사용'과 '인민의지'의 실천에서는 불완전했을 것이다. 





자료: 영화 "당통 Danton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UU7DEqOEfdM



 (단두대로 끌려가는 당통과 지롱드 Gironde 파) 




데물랭과 막시밀리온 로베스피에르, 학창시절


(로베스피에르는 학창시절, 루이 16세 앞에서 헌사를 낭독한 적이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P4iii_T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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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sse;Cameron;Hill;Petrovich. Europe In Review. Chicago:Rand McNally & Company.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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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oc,Hilaire, The French Revolution.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66.

(written in 1911)

Lefebvre, Georges. The French Revolution volume 1 :from its origins to 1793.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1962


연구과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와 프러시아,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등 인접 유럽국가들과의 전쟁과 외교 관계 연구.

 


당통 (Danton : 26 October 1759 – 5 April 1794 : 35세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 6 May 1758 – 28 July 1794 : 36세)

카르노 (Lazare Carnot 13 May 1753 – 2 August 1823 : 70세

데물랭(Desmoulins : 2 March 1760 – 5 April 1794 34세

마라 (Jean-Paul Marat, May 24 1743 - July 13, 1793 5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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