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영원한 제 2인자" "임자", 당신들이 말한 "풍운아" 김종필이 "빌어먹을 자식"으로부터 받은 무궁화장 훈장,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박정희와 같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자행한 김종필의 판단은 시대착오였다. 1960년 이승만 독재자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한국 시민들의 항쟁 정신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였다. 2017년 냉전의 섬을 해체하자던 문재인의 발언을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욕한 김종필의 발언 역시 시대착오였다. 김종필의 정치 시작과 끝은 시종일관 시대착오적이었다. 


평범한 외국 시민들도 '넌센스'라고 말하는 70년 남북 분단과 냉전의 섬을 해체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제 2의 박정희, 박근혜, 김종필이 코리아 정치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 시민들이 모두다 시험공부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정치에 참여하는 길 밖에 없다.

 

2017년 5월 5일 김종필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면서 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을 비난했다. 그 이유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김정은을 만난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김종필은 '버르장버리 없다'고 문재인을 비난했다.


김종필이 홍준표를 대선 후보로 지지하면서 문재인을 비난하는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난 뭘 봐도 "문재인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재인이가 얼마 전에 한참 으스대고 있을 때 한 소리가 있어. 당선되면 김정은이 만나러 간다고. 이런 놈을 뭐를 보고선 지지를 하느냐 말이야. 김정은이가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자식. (홍준표를 바라보며) 꼭 되어야겠어. 홍준표 "네 꼭 되겠습니다"


<후기> 김종필에게 무궁화장을 추서한 문재인 대통령은 너무나 통이 큰 인자한 정치인인가? "빌어먹을 자식"에게 받은 무궁화장 훈장 




난 뭘 봐도 "문재인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재인이가 얼마 전에 한참 으스대고 있을 때 한 소리가 있어. 당선되면 김정은이 만나러 간다고.






이런 놈을 뭐를 보고선 지지를 하느냐 말이야.







김정은이가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자식.

(홍준표를 바라보며) 꼭 되어야겠어.

 









홍준표 "네 꼭 되겠습니다"




2017.05.05 YTN 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lYSoBrsoDCQ

Comment +0

정치적 비유법의 달인 김종필이 남긴 폐해 - 거짓말과 정치적 은유, 훈장 추서 반대


- 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공약실천과 무관하게 "아버지가 이룩한 경제성장, 이 근혜가 복지로 되돌려 드립니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2010년 경 진보정당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민주당으로 다 모여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은 박근혜에게도 질 수 있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아니다 다를까 실제로 박근혜는 박정희 하에서 일한 바 있는 김종인을 내세워 마치 민주노동당 정책집을 베낀 것 같은 복지정책을 들고 나왔다. 새로울 거 하나도 없다.20세기 사회복지국가를 이룩한 유럽,캐나다에서는 보수당이 모조리 전부 '사회복지 국가론'을 당론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이후, 또 아니다 다를까 박근혜는 공약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 2012년 이후 연구주제는 당연히 '반동 혁명 counter-revolution'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실천되는가였다. 내 관심사는 박근혜와 박정희의 차이점과 동일성이었다.  이것도 너무 자명하고, 수준도 난해하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싸운 세대는 이승만-419-516-유신체제까지 공부했다 하지만, 제도적 공간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것까지는 많이들 공부하지 못했다. 2000년 이후 한국에 진보정당이 들어선 이후, 한국 경제사 정치사 문화사는 굉장히 중요한 학습주제이자, 투표에서 득표와 긴밀히 연결된 블루칩이다. 


- 1963년 2월 18일 뉴스 1면이다. 김종필씨는 박근혜와 육영수의 못된 점을 비판하고 인터뷰하고 별세했지만, 김종필 본인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주장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답변해주지 않고 떠나갔다. 


- 세계 시민들은 다 안다. 한국처럼 시민들이 정치 데모를 잘 하는 나라는 70억 인구들 중에 몇 안되는 톱 클라스라는 것을. 


그런데 정당 정치나 국회의원 선출 제도는 세계 하위권이다. 이 격차는 어디서 생겼는가? 왜 정치인들은 거짓말하는 존재로 시민들에게 각인되었는가? 그 극명한 출발점이 박정희의 거짓말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거짓말을 극렬 조장하고 협력한 육사 8기 김종필과 김형욱 등의 516 군사 쿠데타 부역자들이다. 


- 2018년이라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부터 1963년 10월 17일 대선까지 정치 권력 공백기를 국민들이 감당하고 인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도 안되는 2년의 시기 동안, 한국경제를 원조 해준 미국, 군사적 동맹 미국 케네디는 무엇을 한 것일까? 건설 부동산 자본가 출신 트럼프를 생각해보면 상전벽해다.


- 박정희 516군사 쿠데타에 동조한 당시 육사 5기 주축 장교들과 해병대 장교들은 '민정 이양'을 주장하고, 박정희-김종필-김형욱 세력과 대립했고, 비밀막사에서 격론을 펼치다가 열받아 권총을 꺼내들고 죽이네 살리네까지 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준비하고 일으킬 당시부터 권력장악을 목표로 했다고 난 본다. 정치 권력 공백기 2년 동안 박정희는 끊임없이 언론전을 수행하고 (이후락을 특임해 언론 접촉면을 늘렸다) 거짓말 전술을 펼쳤다. 


- 박정희가 대놓고 거짓말 전술을 펼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은 (1) 어떤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윤보선 민주당 구파 우두머리도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난 이후, 민주당 신파 장면을 물러나게 한 이후, 윤보선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고 한다.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의 분열이 한 축이다.


(2) 당시 한국 정치에 지금보다는 훨씬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했던 미국 민주당 케네디 정권의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방조와 침묵


(3) 416 항쟁 이후, 민주당이 국민들의 개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점, 경제 자립 노선은 더디고 민생은 더 나빠졌고, 보릿고개 넘지 못하는 국민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4) 군부 내부 반대세력 제거. 장도영 이북출신, 나이도 박정희보다 어린 참모총장을 정치적으로 구워 삶았다. 장도영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결국 박정희 쿠데타 성공으로 이어졌고, 장도영도 본인 기대와 달리, 박정희에게 이용당하고 폐기처분되었다. 


- 1963년 2월 18일, 박정희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내세워, 실제로는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을 발표한 셈이다. 너무 속이 보이는 빤한 '민정 불참 조건들' 나열이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일부터 '군인은 다시 군대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대통령 2번만 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67년 대선에서 다시 당선되자 마자, 삼선 개헌 악법을 만들었다. 

1971년 삼선되자 마자, 통일 내세워, 영구 집권 총통제가 그 핵심인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다 거짓말이었다. 


보릿고개 밥먹여 준다는 자칭 '산업화의 아버지' 박정희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고, 배고픈 한국인들을 거짓말로 잘 요리한 사람들이 박정희와 총명아 김종필이었다. 

그 이후 한국정치와 정당정치는 거짓말이 밥이 되고, 밥이 거짓말이 되는, 독일 철학자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술처럼, 밥과 거짓말의 대화 (dialectics)가 한국 현실에서 삶이 되었다.


1963년 2월 18일자 박정희는 약속했다. 거짓말을 약속했다.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 (불참)'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가 거짓말을 같이 만들어낸 김종필에게도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임자 조그만 참아, 경제건설 끝나면 임자 차례야' 김종필의 인고의 시간은 끝이 없을 줄 알았다. 2인자 김종필도 박정희의 거짓말을 밥먹듯이 진짜 먹고 살아왔다. 김형욱과 다른 운명을 위해서는.


-1979년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1026 사건이란, 정치적 동료에게 거짓말을 하면 어떠한 말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026 이전에 김종필은 쿠데타 동료, 육사 8기 동료 김형욱을 잃어버렸다. 김형욱을 누가 죽였는가? 516 군사쿠데타 동료 박정희 지시였다. 이게 다 거짓말같은 역사의 진실이란 말인가?


김종필 전총리가 은유법에 능한 이유가 다 무엇이겠는가? 어떠한 경우에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지 않으면,친구도 동료도 다 죽이는, 살아 남기 힘든 정치 현장에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은유의 발전은 두 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는 끊임없는 실천적 학습에서 비롯된다.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끊임없는 거짓말 사용이다.


김종필씨가 정치적 비유와 은유를 많이 쓰고 잘 썼다고들 하는데, 그런 배경에는 박정희와 함께 만든 거짓말이 짙게 깔려있다.




Comment +0

1. 머스키 미 국무장관의 비밀전문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sbs 뉴스 보도를 보고 난 소감) 1980년 5월 21일 광주 도청앞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7일 광주 도청를 사수하던 시민군 진압 명령자는 전두환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머스키 비밀전문 공개로 인해, 1997년 한국 법정이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때, 그 논거는 바로 전두환이 5월 25일 광주도청 최종진압 작전 결정 회의에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 등과 같이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97년 대법원 논거에 따르면, 전두환은 내란목적 살인의 공동책임자들 중에 한 명에 불과하고, 전두환이 단독 '명령 책임자'는 아닌 셈이었다. 이번 머스키 미국무장관의 비밀전문 공개로 5월 27일 광주도청 최후 진압 명령자가 전두환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 sbs 장훈경 기자 보도 요지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청 최후 진압 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 당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에드먼드 머스키가 한국 중국 일본에 있는 미국 대사들에게 보낸 비밀 전문 기록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머스키 비밀 전문에는 '군의 실력자 전두환 장군이 군사작전이 필요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미국 시각 5월 25일 오전 9시. 


광주 도청에 남아 있던 광주시민군들과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면 계엄군의 도청진압이 시작되면 합참의장이 미국에 먼저 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2. 518 광주 항쟁 당시, 북한군 투입설을 발표한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5.18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 된 전 씨가 1980년 6월 4일, 주한 미 상공회의소 기업인들과 만찬을 했는데 광주에 관한 질문을 받자 "22명의 신원 미상 시신이 발견됐는데 모두 북한의 침투 요원으로 보고 있다"고 답한 걸로 보고됐습니다.


뉴스 출처: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758089


(에드먼드 머스키 Edmund Muskie : 1980년 5월 8일 ~ 1981년 1월 18일까지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하에서 미 국무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조작과 왜곡


[끝까지판다] "북한군 투입설 배후는 전두환이었다" 5.18 미 국무부 전문 탐사보도 (풀영상)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8.05.15 10:10-

<앵커>

SBS 탐사 보도팀은 지난 1년 동안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또 여러분께 전해드렸습니다. 5·18 38주년이 되는 이번 주에는 미국 국무부 비밀 전문에서 SBS 탐사 보도팀이 확인한 새로운 사실들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14일)은 먼저 최종 진압 작전은 누구의 지시였는지 또 광주의 북한군 투입설을 처음 퍼뜨린 사람은 과연 누군지에 대한 내용인데 비밀 전문이 지목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 명이었습니다. 전두환 씨였습니다.


장훈경 기자가 단독 취재했습니다.


<기자>


전두환 씨는 80년 5월 당시 자신은 보안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나 발포 명령에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전두환/SBS 인터뷰 (2003년 2월) : 군은 지휘 계통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지. (중앙)정보부 부장이 아무리 세도 작전 지시하면 절대 안 움직입니다. 군대라는 건 지휘 계통에 의해 딱 움직이는 거요. 나는 계엄사령관 부하요.]


지난해 낸 회고록에서도 80년 5월 27일 최종 진압 작전은 이틀 전인 25일, 작전이 결정되고 난 뒤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SBS가 확인한 5.18 당시 미국 국무부 비밀 전문은 최종 진압 작전의 책임자로 전두환 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국 시각 5월 25일 오전 9시 머스키 당시 미 국무장관이 한·중·일 대사관 등에 보낸 비밀 전문에는 '군의 실력자 전두환 장군이 군사 작전이 필요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보고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마지막 협상 시도가 실패하면 진압 작전이 시작될 예정인데, 이 경우 합참의장이 미국에 먼저 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재의/5·18기념재단 조사위원 : 5·18 기간 중에도 한국 문서에는 거의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등장을 안 하죠.

 왜냐면 그동안 제5공화국을 지나면서 대부분 이름을 지워버렸던 것 같아요. 그런데 미국 문서에는 그대로 지금 남아 있는 거죠. 그런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봅니다).]


다음 날인 한국 시각 26일 오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난 뒤 국무장관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 27일 0시쯤 진압 작전이 시작된다고 보고합니다.


이 보고 이후 미국 시각 5월 26일 오전 7시 머스키 국무장관이 전파한 '한국 상황 보고서'입니다.


전두환 장군이 상황을 끝내기 위한 광주 진입에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합참의장이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27일 0시부터 계엄군 투입을 한다고 알렸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 전두환 씨가 주장하는 부분들은 자신이 했던 역사적 책임, 사법적 심판을 피하기 위한 거짓이라는 게 확인됐다(고 봅니다).]


신군부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오던 미국의 정보망은 전두환 씨의 결심으로 최종 진압 작전이 결정되고 수행된 과정을 구체적이고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조창현, 영상편집 : 김준희)    

























------------------------------------------------


▶ [끝까지판다②] "'5·18 북한군 투입설' 전두환이 첫 언급"


<앵커>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주에 북한군이 투입돼 폭동을 선동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거짓 주장은 지금도 일부 극우 인사들이 계속 퍼뜨리고 있는데, 저희가 미국 국무부의 비밀 문건을 분석해봤더니 북한군 투입설을 공식석상에서 처음 거론한 인물도 전두환 씨 였습니다.


박세용 기자입니다.


<기자>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 있다" "북한 특수전 요원이 개입한 걸로 추측할 수 있다" 전두환 회고록 1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법원이 지난해 허위 사실로 인정해 회고록에서 삭제하라고 결정한 부분입니다.


5.18 북한군 개입설은 전 씨 회고록에 모두 18번 등장합니다. 대부분 지만원 씨 같은 극우 인사 주장을 인용한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SBS가 확인한 미 국무부 비밀 문건에는 이 주장을 전 씨가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5.18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 된 전 씨가 1980년 6월 4일, 주한 미 상공회의소 기업인들과 만찬을 했는데 광주에 관한 질문을 받자 "22명의 신원 미상 시신이 발견됐는데 모두 북한의 침투 요원으로 보고 있다"고 답한 걸로 보고됐습니다.


전 씨는 또 "5.18의 책임은 김대중에게 있으며 그를 기소해서 이걸 입증하겠다"고 강조한 걸로 적혀 있습니다.


[이재의/5·18기념재단 조사위원 : 마치 북한군들이 실제로 들어온 것처럼 그때 당시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죠. 그때 전두환 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자체를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인데.]


북한군 투입설은 80년대 중반 신군부가 5.18의 진상을 왜곡하기 위해서 안기부와 국방부를 중심으로 유포한 걸로 드러났는데 그 시작은 전두환 씨였던 겁니다.


그러나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미 국무부 비밀 문건에도 "5.18은 공산주의가 배후에 있지도 않았고 북한군 투입 사실도 없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전두환 씨 발언에 관한 국무부 문건 내용에 대해 전 씨 측은 "대통령이 되기 전 일이라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영상취재 : 조창현, 영상편집 : 정성훈)


------------------------------------------------


▶ [끝까지판다③] '전두환이 최종진압 작전 지시', 왜 중요한가?


<앵커>


5·18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해서 보도해 드리고 있는 장훈경 기자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Q. 5·18 당시 美 국무부 비밀문서는 어떤 자료? 


[SBS 장훈경 기자 : 1980년 5·18 전후로 미국 국무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이 주고받은 비밀 전문인데, 비밀 해제가 돼 열람할 수 있게 된 자료입니다. 최근 광주지검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의 객관적 증거로 "실제 발포가 있었다"는 내용의 미국 문건을 제시했는데, 같은 국무부 자료에 포함됐던 겁니다. 국내의 5·18 관련 기록들은 그동안 사라지거나 왜곡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런 조작이 불가능한 미국 국무부 문서는 진상 규명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Q. 전두환 최종 진압 작전 지시, 왜 중요한가?


[SBS 장훈경 기자 :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 씨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하면서 최종 진압 작전을 결정에 대한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죠. 이때 근거가 전 씨가 작전 이틀 전 계엄사령관,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회의에 참여한 신군부 인사들이 최종 진압 작전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을 지게 된 겁니다. 

분명히 결정 주도자가 있을 텐데 그건 못 밝혔고 사법적 책임도 정당히 지우지 못한 거죠. 전 씨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는 자신이 참여했던 회의는 최종 진압 작전이 결정이 된 이후여서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까지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진압 작전을 전두환 씨가 결심하고 그에 따라 작전이 수행됐다는 미 국무부 문건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758089&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Comment +0


May 5 at 2:16am · 


아직 1980년 518 광주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라고 확정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침략자 이름은 확정되었는데, 518 시민 학살자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전두환이 국민의 군대를 이용해 시민을 학살했다는 혐의만 있지, 아직 전두환은 도요테미 히데요시가 아니다.


전두환이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광주 시민들을 초기에 박살해라는 '대명 Grand Order'를 내렸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아직도 발포 책임자로 확정 판결되지 않았다. 전두환 재판은 반드시 다시 열려야 한다.


PD 수첩 송일준 피디가 광주 MBC 사장이다. 두 편의 광주 다큐멘타리 제작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 정치 공부가 될 것이다.


#전두환_발포책임_재판_다시하자_문재인_국민청원_필요하다_끝까지_전두환_자연사하기_전에_재판은_다시_열려야한다.






























Comment +0

신문 기사: "막스 베버 전공자인 김 교수에게 있어 근대의 핵심은 종교와 정치의 분화, 학문의 분화, 개인의 분화(개인화) 등 ‘분화’이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분화가 덜된 사회다."


몇 가지 주제들 (1) 종교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기도 한다. 특히 1647년~1688년 영국 제 1차 혁명, 2차 혁명(명예혁명) 주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의 다원성 인정, 그리고 종교와 정치 (행정)의 분리, 의회 권력의 분화 (왕권과 땅 토지 대지주들의 의회 권력분화 및 경쟁) 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유럽 국가들은 '정치' 권력과 '종교(기독교)'의 분화 및 분리를 경험했다. 엄청난 피의 댓가로. 


(2) 그런데 현재 독일 수상은 기독교-민주주의-연합(기민련)과 기사련 (기독교-사회-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이다. 정치(정당)와 종교(기독교)가 붙어있다. 분리되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의 분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독일도 그렇다면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분화가 덜된 사회"인가? 신문기사, 김덕영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그 답은 '그렇다'이다.


기사련은 체.에스.우,  Christlich-Sociale-Union in Bayern (바이에른 주에만 있는 정당이다)

기민련은 체.데.우, Christlich-Demokratische-Union in Deutschlands (독일 기독교-민주주의-연합)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은 '통일체'를 뜻한다.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했다는 의미이다.


(3) 내가 보기에는 한국도 이미 서유럽 기준(영국, 독일, 프랑스 등)으로 보더라도 '근대적 의미의 분화 '가 많이 일어났다.

분화: (Differentiation: 정치, 경제,사회,문화 체계들이 자기 스스로 하부 체계들로 갈라지면서 자기 영토를 넓혀가면서, 전체 체계의 복합성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과정)


물론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비교해서 한국이 '분화'가 덜 일어났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각각 증명하면 될 일이고 증거를 대면 학문이 될 것이다.  이런 비교 연구도 아직도 유의미하다고 본다. 남의 나라 좋은 사례는 배우면 좋은 거니까. 


하지만, 이제 연구과제는 한국이 지난 100년 넘게 겪고 있는 근대화 과정의 '특질 characteristics'과 그 변화 과정 (dynamics)을 해명하는 것이다. 


예를들어서 독일은 기독교 (종교) 가 명시적으로 정치영역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독교 정당이 국회의원 1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1945년 이후 기독교 정당이 주도적이고 명시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독일만큼 질적으로 양적으로 높다. 독일과 다른 방식으로 한국 기독교는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반독재 운동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까지 다양하다. 교육에서 의료까지 기독교 참여는 활발하다. 


(4) 한국은 5천만 인구를 가진 상대적으로 큰 나라이다. 굳이 따져 북한과 해외 동포까지 합치면 8천만이 되어, 독일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인구이다. 사회과학의 인식론은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인 사람들과 사회의 '실천'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인식론은 사회현실 역사적 현실, 다시 말해서 존재론과 분리가 불가능하다. 


한국의 변화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 경제사, 정치, 정치사, 문화, 문화사, 사회, 사회사, 풍속사, 법률의 변천사를 알아야 한다. 사회인식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 대한 '계몽적 자세'가 이런 한국에 대한 깊은 학습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5) 요즘은 직장인이지 지식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들 한다.


지식인이라는 단어도 쓰기가 꺼려지는데, 지성인이라는 말은 더더욱 '꼰대'스럽다.
지식 knowledge 를 다루는 것, 단어, 문장, 미디어를 다루는 이 지식노동이야말로, 진짜 뼈골,등골빠지는 노동이다.

('이다'를 '이어야 한다'로 바꿔야 하지만) 


인구 90%이상이 농민이던 시절 선비=지식인 개념을 가지고 있고,직업 숫자가 몇 만, 수 천가지인 이런 복잡, 분화된 사회에서 지식 노동자가 할 일이란, 미몽한 대중들을 '개벽'하듯이 다루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얇은 지식들로 그것을 새로운 '계몽주의'인양,
출처도 불분명한 책들과 말들을 거칠게 짜깁기 한 것을 '명저'나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 것도 '개벽'이라고 부르기에는 수오지심의 부족이다.


참고: 막스 베버에 따르면, 서유럽 자본주의 과정만의 특질, 즉 아시아와 차이점은,

국가 행정과 법, 자본주의 시장, 시민사회의 합리성 증대 (탈 종교, 탈주술화 등)가 진화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루터와 칼뱅, 칸트와 헤겔 등을 비교하며 재미있게 강의”

김재중 기자 hermes@kyunghyang.com

-

입력 : 2017.05.10 22:07:03 수정 : 2017.05.10 22:20:42 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ㆍ경향시민대학 ‘종교개혁’ 강좌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ㆍ서구의 근대는 종교개혁서 시작 …루터의 개혁 500주년 재조명

ㆍ지성사는 폭넓게 공부해야…오는 9월 독일 사상기행도 준비 중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가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면서 웃고 있다. 경향시민대학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주제로 강의할  김 교수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단일 사건으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가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면서 웃고 있다. 경향시민대학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주제로 강의할 김 교수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단일 사건으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500년 전인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쓴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면죄부’를 남발하는 교회 및 성직자의 부패와 축재를 고발하고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반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그 영향력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섰다. 서구 근대의 출발점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강의와 저술·번역을 계속하고 있는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59)의 올해 스케줄은 ‘루터와 종교개혁 500주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 교수는 오는 15일부터 5주간 경향시민대학에서 매주 월요일에 ‘종교개혁 500주년: 지성사의 영원한 맞수들’을 주제로 강의한다. 


‘근대와 그 시원에 대한 신학과 사회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루터와 종교개혁>이라는 단행본 출간도 준비 중이다. 9월 초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뉘른베르크, 바이마르, 비텐베르크, 드레스덴 등 독일 주요 도시와 체코 프라하 등을 방문하는 ‘독일사상기행’도 기획하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 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종교개혁은 단일 사건으로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서구의 근대를 주조한 틀이 하나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틀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말했다. 칸트와 헤겔 등 서구 지성사를 주름잡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지만 루터가 활동했던 1500년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제대로 된 지성사적인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지식사회학과 지성자,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 등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와 대학교수 자격 취득까지 한 정통 사회학자인 김 교수는 국내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신학에도 조예가 깊다. 김 교수는 “지성사라고 할 때 단순히 철학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회과학, 문학,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도 서구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가 경향시민대학에서 진행할 강좌도 루터와 칼뱅을 대비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강좌는 칸트와 헤겔(철학), 괴테와 실러(문학), 마르크스와 베버(사회과학), 프로이트와 융(정신분석학) 등으로 이어진다. 김 교수는 “강좌에서 소개할 인물들은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논쟁했던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며 “인물을 비교하면서 공부하고 강의하는 것은 전부터 즐겨 쓰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막스 베버 전공자인 김 교수에게 있어 근대의 핵심은 종교와 정치의 분화, 학문의 분화, 개인의 분화(개인화) 등 ‘분화’이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분화가 덜된 사회다. 지난해 말 출간한 <국가이성비판>을 통해 지적했듯 한국 사회는 형식적으로 분화는 됐는데 실질적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는 근대화를 경제성장으로 환원하고 그 주체를 국가와 재벌로 환원해서 ‘국가재벌동맹체제’에 의한 경제성장이 곧 근대화였다”면서 “박정희 정권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번 대선에 나선 후보들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국가재벌동맹체제의 해체가 근대의 완성인데 ‘경제성장’이라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얽매이는 순간 새 정부도 재벌에 손을 벌리거나 재벌개혁을 뒤로 미루면서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의 우려 섞인 예상이었다.


김 교수는 11월 독일에 가서 이듬해 3월까지 대학 강의를 하고 나머지 기간엔 한국에 체류하며 집필과 번역을 하는 일정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내년이면 환갑이지만 10년치도 넘는 연구계획을 이미 세워뒀다고 했다.


“좀 유치하게 저를 말하자면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의 주요 이론가 13명에 관한 책을 앞으로 10년간 차례로 펴낼 예정입니다. 올해가 뒤르켐 서거 100주년이고 내년이 지멜 서거 100주년인데 이들을 필두로 할 겁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102207035&code=100100#csidx3cde75ed2eb9551a389e4fc3bcedc23

Comment +0

중국은 왜 역사를 강조하는가,


.



 

.



 

.


 

.


 

.



 



Comment +0




Men are born and remain free and equal in rights. Social distinctions can be founded only on the common utility.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살아가는 동안 자유롭고 평등하게 권리를 누려야 한다. 사회적 차이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오직 전 사회 구성원들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그래야 한다.(사회적 차이들은 오직 공동선 위에서 기초될 수 있다.) 


Social distinctions can be founded only on the common utility.

: social distinctions 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사회적 구별짓기, 사회적 차이점들로 봐야할 것이다. 

: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이라는 토대 위에서 사회적 차이들은 정초될 수 있다.


Thomas Piketty "Captial in the 21st century", p.1 


Art. 1er.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 Les distinctions sociales ne peuvent être fondées que sur l'utilité commune.



20세기 사이먼 쿠츠네츠가 생각했던대로, 성장, 경쟁, 기술적 진보라는 균형 힘들이 후속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는 계급들 간에 불평등 감소와 더 큰 화합으로 나아갈 것인가? 





Comment +0

.


.
















[사회] [5.18]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닉 플랫 메모' 전문 공개

  • 날짜 : 2017-06-19,   조회 : 2,060



*본 회의록은 2017년 5월 5일, 광주MBC 김인정 기자*강성우 기자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참석자인 
니콜라스 플랫 당시 미국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과
인터뷰 현장에서 취재진이 확보한 10 페이지 분량의 수기 메모를 토대로 
취재진이 전문가들과 함께 복구한 것으로 당사자의 확인을 거쳤습니다.


이에 광주MBC는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전문을 공개합니다.


번역본 파일다운로드 : 다운로드 바로가기
원문   파일다운로드 : 다운로드 바로가기


[번역] / 원문은 하단에 있습니다.


[번역본]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PRC(정책검토회의)>

 

번역 감수: 이삼성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수기 메모 복구 자문: 전광호 전북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팀  


영문본 감수: 이삼성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어경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문학 박사과정 

 

일시 : 1980년 5월 22일 오후 4시~5시15분

장소 : 백악관 상황실

주제 : 한국

참석자들 : 15명 (국무부 4, CIA 2, 백악관 2, 합동참모본부 3, 국방부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실1)

 

국무장관 : 에드먼드 머스키 – 회의 주재

국무차관 :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성 아태담당 차관보 : 리처드 홀브루크

국무성 한국과장 : 로버트 리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 데이비드 애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관: 도널드 그레그

CIA 국장 : 스탠스필드 터너

CIA 중국 및 동아시아 담당 국가정보관(NIO) : 존 홀드리지

합참의장 (대장) : 데이비드 존스

육군참모차장 (대장) : 존 베시

합참의장 보좌관 (중장) :존 푸스테이

국방부 장관 :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데이비드 맥기펠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 니콜라스 플랫

 

머스키 국무장관 : (광주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인 요구와 군사적 필요사항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존스 장군의 생각은 어떤가요?

 

존스 합참의장: 광주 상황이 진정되고 있다는(quieting) 위컴 장군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광주를) 책임지고 있는 장군(Platt: 윤장군—5월 21일까지 전남북계엄분소장을 맡고 있던 윤흥정 소장--으로 생각됩니다만)은 분별력 있고 온건한 사람입니다. 광주 상황은 다른 도시에서의 시위 양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계엄사는 몇 개 부대를 이동시켰지만, DMZ 가용 병력엔 변화가 없습니다. 


한국 측은 (북한의) 침투에 대비한 경계태세에 돌입했고, 우리는 2대의 공중조기경보기(AWACS)를 보냈는데, 오늘밤 오키나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북한은 상당한 기습공격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게다가 군인들을 농촌지원활동에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고도 경계태세에 있지만 부대 이동은 없습니다. 북한이 공격해오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침투가능성은 있습니다. 


나는 한국 내 도시들의 상황에 대한 보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터너국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광주의 사망자 숫자에 관한 보고에 우려하고 있습니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광주에서 60명의 사망자와 4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해왔습니다. (플랫: 당시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이때는 상당히 이른 시점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비난의 빌미(혹은 약점: liability)가 될 수 있고, 권력투쟁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브라운 국방장관 : 문제는 전두환이 군부 내 자신의 위아래 모두 숙청을 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만약 전두환이 실권(失權)하면 권력 공백이 생길 것입니다.

 

베시 육군참모차장 : 전두환이 존중할 만한 누군가가 나서서 그에게 물러나도록 권유하는 시나리오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플랫: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죠.)

 

브라운 국방장관: 한국 군부는 유능하게 (적절하게)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터너 CIA 국장 : 북한이 무언가 행동할 가능성, 공격을 하든 침투를 하든, 그럴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됩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 군부가 얼마나 신속하게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브라운 국방장관 : 한국 군부가 군대 사용을 지금은 절제하고 있지만, 만약 항쟁이 계속될 시 대규모 무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홀브루크 아태담당차관보 :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시 광주로 군대를 진입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베시 육군참모차장 : 그들은 유혈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보낼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플랫: 그들이 폭력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 군대가 광주에 재진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반란(rebellion)이 여타 지역으로 확산될까요?

 

브라운 국방장관: 알 수 없죠. 하지만 군부는 광주를 봉쇄했고, 한국인들은 승자를 따라갈 겁니다.

 

베시 육군참모차장 : (플랫: 자신의 메모를 읽기 어렵다고 함)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우리는 질서유지를 위한 노력을 지원해야 합니다. 만약 군부가 실패하면 우리는 (......) 상황에 처하게 될 겁니다. (Platt: 내 자신이 쓴 메모를 나도 읽기 힘드네요)

 

머스키 국무장관 : (전방에 배치된) 부대의 이동이 (대북) 준비태세(readiness)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브라운 국방장관 : 우리가 조언은 할 수 있지만, 한국 군부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언할 수 있지만, 결정은 한국인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 우리는 군부에게 무력을 사용하라고 조언해야 할까요?

 

브라운 국방장관 : 우리는 절제를 발휘하라고 조언했어요.

 

홀브루크 아태담당차관보 : (국무부 대변인이 5월 22일 정오 브리핑에서 발표한 미 국무부의) 공개 성명은 법과 질서에 최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브라운 국방장관 : 우리는 그들에게 광주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홀브루크 아태담당차관보 : 앞으로 24시간 내지 72시간의 여유가 있어요.

 

머스키 국무장관 : 오늘 공개 성명은 좋았습니다.

 

(참석자 모두 국무부 성명에 동의)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 우리의 단기적 대응 입장(short range position)은 옳았어요. 누구에게도 분명한 태도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단 위기상황이 종결되면, 한국 국민처럼 성숙한 나라에 군부독재를 실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신속히 얘기해야 합니다.

 

브라운 국방장관 : 동의합니다. 한국에 어떤 정부가 등장하는 것이 좋을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번 발표한 성명서에서 밝혔던 우리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추후에 (....) 성명 같은 것으로 대응해야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별다른 추가적인 행동을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시 육군참모차장 : 전방 방어는 한미연합사가 책임져야 합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 추가적인 조치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브라운 국방장관 : 아니요. 상황이 빠르게 악화될 것 같으면 우리는 (필요한 조치들에 관한) 건의를 받게 될 겁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 합참은 어떤 비상사태들(contingencies)을 염두하고 있습니까?

 

브라운 국방장관 : 공군과 해군 병력을 서태평양 지역으로 증파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항모 전단과 하나의 항공편대를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지상군을 이동시키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1개 대대 병력과....(하와이에 주둔해 있는) 제25 보병사단의 (신속 투입이 가능한) 경보병 부대들을 이동시키는 데는 2~3일 정도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대규모 시위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에 한국 군부의 지휘구조(military structure)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플랫: 그 다음 참석자들은 (미국 인사들의) 한국 방문 문제에 대해 논의합니다. ‘해외민간투자회사’(OPIC)의 레웰런(Llewellen)씨의 방문은 이미 취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수출입은행 총재) 존 무어(Johnn Moore)씨의 방문은 취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방문이 취소되면 모두를 긴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참석자들이 말한 것은 “만일 무어가 방문해야 한다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취소하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 (플랫: 이것은 그의 일종의 입장 재천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질서 회복을 지원하려 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 신장을 바랍니다.

 

브라운 국방장관 : 장기적인 목표에 도달하려면 먼저 단기적인 목표를 관철해야 합니다.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 광주의 문제가 대규모 군대로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해결된다면, 우리는 더 강하고 더 공개적으로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그들이 광주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면, 우리는 조용하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1980년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의 이슈로 될 수 있는 문제들을 피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홀브루크 아태담당차관보 : 우리는 (......)을 억지하는 데 개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명 피해가 클 경우 우리는 학생들(의 시위 확산)을 불러들이게 될 겁니다.

 

크리스토퍼 국무차관 : 전두환은 큰 해를 입혔습니다. (정치)과정을 후퇴시켰어요. (하지만) 우리는 질서 회복을 원하고 있고, 그에 따르는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머스키 국무장관: 우리가 그들에게 인질이 되어 끌려다니는 꼴이 된 것은 아닐까요?

 

브라운 국방장관 : 안보상황이 위험하면 우리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만약 전두환이 청와대에 입성하면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잘 했습니다.

 

애런 국가안보 부보좌관: 전두환에 대한 우리의 지렛대는 향후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더 큽니다. 그가 물러나도록 압박(해야 하지 않을까요). (플랫: 데이빗 애런은 매우 미미한 역할 밖에 한 게 없습니다. 내 생각엔 애런의 이 발언은 단지 그도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어요.)

 

브라운 국방장관 : 우리가 전두환을 반대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험해요.

 

 

****************************************




[원문]

본 회의록은 2017년 5월 5일, 광주MBC 김인정 기자*강성우 기자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참석자인 
니콜라스 플랫 당시 미국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과
인터뷰 현장에서 취재진이 확보한 10 페이지 분량의 수기 메모를 토대로 
취재진이 전문가들과 함께 복구한 것으로 당사자의 확인을 거쳤습니다.

이에 광주MBC는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전문을 공개합니다.

< 22 May 1980 PRC Meeting> 

 

Muskie: We need guidelines as to how to balance political needs of the country with the military requirements, and I will ask General Jones for his views. 

 

Jones: I concur with Wickham that the situation is quieting in Kwangju. The General in charge (Platt: General Yoon I think) is sensible and moderate. The Kwangju situation will determine how the demonstrations develop in other cities. They have moved some units, and the unit availability on the DMZ remains the same. 


The Republic of Korea have gone on with an infiltration alert, we havesent two AWACS aircrafts, which will arrive at Okinawa tonight. North Korea has good surprise attack capability, they have done some exercises in the past few months, but have not released troops to agricultural production. There is no movement, though a state of high alert exists. We doubt that North Korea will make an attack, but are likely to infiltrate. 


I agree with Admiral Turner that we have to be more concerned about the reports from the towns. We are worried about reports of the number of dead in Gwangju. Wickham and Gleysteen report 60 dead and 400 wounded (Platt: Nobody knew at that time. This was pretty early). Chun could become a liability. Probability of struggle. 

 

Brown: The problem is that he has cleaned out the ranks below and above. If he goes that will create a vacuum. 

 

Vessy: I can envisage a scenario in which Chun is asked to step down by someone he respects (Platt: That never happened).

 

Brown: They have been quite good about using force. 

 

Turner: 50:50 chance on whether North Korea will do something, whether they will attack or infiltrate. 

 

Muskie: How quickly can the military restore order? 

 

Brown: They are being restrained, but will use massive force if the struggle continues. 

 

Holbrooke: Chances of the military going back in, if there is no resolution, are very high. 

 

Vessy: They will arrive in such force as to minimize bloodshed. They are busting their tails. (Platt: Busting means they are trying very hard to avoid violence)

 

Muskie: What would be the reaction if the military moves back in force? Will the rebellion spread? 

 

Brown: I don’t know. but the military has closed off the city. Koreans will go with who’s winning. 

 

Vessy: (Platt: That’s unreadable).  

 

Brzezinski: We must back efforts to maintain order. If the military fails, we will be faced with a situation … (Platt: I can’t read my writing) 

 

Muskie: Are the troop movements hurting our readiness?

 

Brown: We can give advice, but they have to be clear that their decisions are their own. We can advise but the decisions have to be Korean. 

 

Muskie: Should we advise them to use force? 

 

Brown: We have advised them to use moderation. 

 

Holbrooke: The public statements have placed highest priority on law and order. 

 

Brown: We did not tell them to pull troops out of the city. 

 

Holbrooke: There is a window of 24 to 72 hours. 

 

Muskie: The public statement today is a good statement. 

 

(everybody agrees with the statement) 

 

Brzezinski: The short range position is right. We have not confused anyone. Once the crisis is over, we must talk quickly about the dangers of imposing a military dictatorship on a population as sophisticated as South Korea. 

 

Brown: Agree. We should ask ourselves what kind of government we want to see emerging. We stand on the statement that we put out. We may have to respond to (….) some kind of statement. We don’t need to do anything more than we’ve done for now. 

 

Vessy: On the CFC we have the responsibility of backing the front line.

 

Muskie: We should take additional steps. 

 

Brown: No. We will get recommendations if we suppose the situation deteriorates fast. 

 

Muskie: What contingencies are the Joint Chiefs of Staff considering? 

 

Brown: We can move Air and Naval assets into the West Pacific. We can move two Carriers and a wing, rapidly. Ground forces will take a while, about 2 or 3 days to move a battalion from Okinawa (, …) light elements of the 25th …The military structure could collapse before major demonstrations. 


(Platt: And then they talk about the visits. These are discussed already in here. A visit of someone called Llewellen, who is I guess from, I don’t know, he’s from the World Bank. 


No, he’s from OPIC (Overseas Private Investment Corporation), and he’s already cancelled. And the question of the visit of John Moore (the EX-Im Bank President), and they decided NOT to cancel that visit. Because they thought that would alarm everybody. What they said was “we should ask Gleysteen if Moore should go,” and apparently they decided not to cancel)

 

Brzezinski: (Platt: This is kind of his some restatement) In the short run we want to promote order, and in the long run we want to promote democracy. 

 

Brown: You have to get through the short run, before you can get to the long run. 

 

Brzezinski: If the problem in Kwangju is solved by massive force and much death, we will have to press harder and more publicly. if they resolve it quickly, it will be better to go quietly to make it more effective to avoid problems that will become campaign issues. 

 

Holbrooke: I hope we don’t commit ourselves to contain (…..). If the losses are heavy, then we will be inviting the students.

 

Christopher : Chun has done real harm, (---) set the process back. We want to restore order and accept the consequences. 

 

Muskie: Aren’t we going to be hostage to them? 

 

Brown: If the security situation is at risk, we have little leverage. If he was in the Blue House, we will have to accept him. We made a good try.  

 

David Aaron: Our leverage over Chun is greater now than it will ever be. Pressure him to give up his job (Platt: David Aaron played a very peripheral role. This is him just trying to show that he exists, in my view).

 

Brown: We should not initiate moves against Chun. This will be risky for us


Comment +0

살면서, 다들 최악의 날이라고 기억하는 그런 날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1997년 12월 22일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1997년 12월 22일은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되던 날이었고, IMF 긴축통치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앞으로 더 나쁜 날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12월 22일이 최악의 날이다.


김영삼은 1996년 신한국당 총선 승리를 위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고, 언젠가는 석방시키려고 했다. 언론에서는 역사바로잡기, 1212군사 쿠데타 세력 척결이라고 찬양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찬성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대선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 복권시켜버렸다. 1945년 이후 친일반역자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두 대통령들은 또 범하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점도 있다. 하지만 2017년 지금까지도 한국 시민사회는 빈부격차, 지역차별, 세대간 갈등으로 일상이 전쟁터로 변했다. 그 출발점이 1997년 IMF 권고안인 '긴축 정책'을 김대중 정부가 굴욕적으로 수용해버린 이후이다.



노동자 해고 자유는 '노동유연성'이라는 나쁜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어린이들과 청년들은 유명 브랜드와 아파트 평수 크기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법을 어린시절부터 배우게 되고, '부자 아빠 되세요'를 거침없이 출판사들과 미디어가 대대적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바로 IMF 역사에서 가장 지독하고 비인간적으로 '정부 지출 삭감, 복지비 삭감' 정책이 한국에서 김대중 정부 하에서 관철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 직전에 박지원 등을 비롯한 최측근들에게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것이 97년 IMF 환란을 막으면서 노동자들의 해고 자유로 인해서, 또 비정규직 양산되어서, 빈부격차가 커지고 말았다.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졌다. 이 점을 막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말했다.


97년 환란 위기 원인들은 한국자본주의의 과잉생산, 재벌들의 비합리적 경영, 정경유착 등 내부적인 원인도 있지만, 클린턴 행정부와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이 한국은 IMF 긴축통치 (Austerity) 를 수용해야 함을 강조하고 이를 관철시킨 탓도 있다. 


그 이후 20년간 한국 시민들의 민심은 최악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다. 


한국 사람들은 파리, 런던, 뉴욕을 동경한다. 서구 1968년 청년들은 자기 부모 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복지 제도 하에서 '문화적 정치적 반란'을 일으키면서 속칭 '68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 청년들은 서구의 복지국가 제도가 막 정착되려던 찰나에, 복지제도와는 가장 거리가 먼, 그 복지제도를 '무임승차'라고 공격했던 신자유주의적 'IMF 긴축 통치' 체제 하에서 '생존'과 '안정된 직장'을 찾아, 마치 서구 68세대 부모 세대처럼, 또 한국전쟁 이후 한국 부모들처럼 일만 해야 했다. TV에서는 한류 문화 산업이 흥행했지만, 97년 이후 한국 청년들은 스스로 '문화 빈곤' 세대, 연애 섹스도 자유롭게 하기 힘든 세대 '삼포 (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세대라고 규정했다. 


내가 1997년 12월 22일을 최악의 날이라고 규정한 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IMF 원인들을 대학 연구소나 연구자들이 제대로 진단하지도 못했고, 이론적 실천적 근거들을 시민들에게 제공하지도 못했다. 1950~1953년 한국전쟁 효과만큼이나 시민들 삶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1997년 IMF 환란위기와 미국 헤게모니 하에 놓여져 있던 IMF 의 긴축통치 방안이었다.


1997년 당시 환란 위기 원인 진단과 해법을 놓고, 소위 '고금리, 노동유연화-해고자유, 민영화, 바이코리아'로 대표되는 IMF식 '긴축정책'에 저항할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자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진보적 관점, 노동자의 관점을 가지고 일관되게 IMF 외환위기 원인과 IMF역사상 가장 혹독한 '긴축정책'의 문제점들을 비판한 진보진영의 이론가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 정책전문가들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당시 파산선고당한 것에 대한 자성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시 한국 사회과학계는 좌건 우건 파산선고했다. 돌이켜봐도 부끄러운 학계였다.  


- 박근혜 사면 이야기가 벌써 나오고 있고, 이재용 사면도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다.











Comment +0

이명박-박근혜 한국 보수파의 외교 실패를 관찰하면서 1945년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분단 과정의 교훈  :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다른 나라들이 코리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코리아는 '일본 점령지'로 해석되었다.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 (해방일)로 기념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국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진실의 전체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게는 코리아란 일본 패방 이후 새로 생긴 '전승국의 전리품' 영토였다.  


큰 그림을 그리자면,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협조하기도 하고 새로운 경쟁을 시작했다. 그 무대는 유럽이었고 새로운 지도 그리기였다. 발틱, 발칸반도와 독일 (동독과 서독의 불균형 분할: 동독은 서독의 3분의 1 영토 해당) 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는 충돌했다. 미국과 소련의 제 2차 라운드 경쟁 공간은 한반도였다. 제 3차 라운드는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등)이었지만 당시에는 지연되고 있었다. 


참고: 아래 글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인민위원회, 남로당 북로당, 이승만, 김일성,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구 등 남한 북한 정치 주체들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1943년부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까지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은 몇 가지 국제적 사건들과 협상들만을 다뤘다.


0.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1945년 2월 얄타회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포츠담 회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까지. 누가 코리아 정치를 좌지우지했는가? 왜 루즈벨트는 '한반도 20-30년 신탁통치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는가? 


(1)  1943년 11월 22~26일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루즈벨트,  중국 장개석,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은 대 독일 일본과의 전투 전략을 수립하면서 코리아(조선) 미래도 논의했다. “코리아는 자유 독립국가가 될 것이다"는 조항을 첨가했다. 그런데 미국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코리아는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서 독립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신탁통치안에 따르면 코리아는 독립국가 수립 이전에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의 분할 지배하에 있게 된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중국 장개석,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윈스턴 처칠이 참여했다) 




(2) 1945년 2월 4~11일, 크림 반도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에서 나온 코리아 신탁통치안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미국 중국 소련 세 나라가 코리아를 20년에서 30년 정도 신탁 통치를 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러한 루즈벨트의 20~30년 신탁통치 제안에 대해서 “신탁통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응답했다. 무슨 확실한 코리아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채 이러한 신탁통치안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소련에게 코리아를 신탁통치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스탈린에게 이러한 코리아 분할 통치 선물을 주면, 소련이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군대와의 참전을 선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러한 제안만 해놓고 1945년 4월 12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전승국가들 사이, 특히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리품을 둘러싼 영토 분할 경쟁이 시작되었다. 냉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극동 아시아와 태평양에서도 소련과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얄타 Yalta 회담,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이 참여했다. 스탈린의 등장이 시작된다) 






(얄타 회담의 주요 안건은 독일을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승전국들이 어떻게 분할통치하는가 였다 )  



(3) 독일 포츠담 회담 (1945년 7월 17일~8월 2일) 이후, 38선 분할과 소련군과 미군의 코리아 점령



포츠담 회담의 주요 의제는 미소의 독일 분할 통치, 베트남의 16도 분할 (북,남 베트남), 폴란드 주권 범위, 그리고 일본 항복을 요구하는 7월 26일 '포츠담 선언' 등이었다. 


8월 9일 드디어 스탈린은 만주 일본군과 전쟁을 선포했고 소련 '붉은 군대'는 중국으로 전진했다. 몽골 인민공화국과 연대한 '붉은 군대'는 8월 20일 만주에서 일본을 완전히 패퇴시켰다. 만주에서 승전으로 인해, 소련군은 만주와 경계를 이루는 북한 지역과 남쪽 코리아까지 해방구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대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38도 분할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이 이에 동의해서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고 미군은 남한을 9월 14일부터 점령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두고 협상을 벌였으나 코리아 내부 좌우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12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공조틀은 깨졌고,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왼쪽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노동당 출신 수상이다. 7월 5일 선거에서 보수당 윈스턴 처칠이 패배해서 애틀리가 참여했다. 가운데는 해리 트루먼 민주당 대통령이다. 4월 12일 루즈벨트 병사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 사진에서 중요한 인물은, 영국 미국에 비해 재임기간이 가장 긴 소련의 조세프 스탈린이다. 오른쪽 ) 







(1945년 8월 15일 이전 중국, 만주, 한반도, 일본 지도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한반도를 해석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 소련에게 한반도란 일본 제국의 영토였고, 거기에 전승국으로서 점령 통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 미국과 소련은 조선(코리아)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일본 영토 일부로 간주했다. 애초에 코리아(조선)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은 코리아 (조선)를 일본제국 영토의 한 부분이라고 파악했다. 소련 군대 이름은 ‘붉은 군대 the Red Army'였다. 소련군은 일차적으로 만주지대에서 일본을 패퇴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고, 미군은 일본 섬들과 본토 4개 섬들을 점령하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책의 저자 존 가디스는 1945년 8월 이후 코리아(한반도)는 미국에게 일종의 ‘덤’으로 주어진 영토로 해석했다.


일본이 1945년 8월 20일 만주에서 패배하자, 미국과 소련은 정치적 ‘공백’이 된 코리아 한반도를 38도 선을 기준으로 편의적으로 북부 코리아는 소련군이, 남부 코리아는 미군이 점령’ ‘통치’한 것이다.





(38선이 그어진 시점, 미국과 소련이 인식하고 있는 영토 개념은 '소련 존'과 '미국 통치존'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조선을 완전 지배하게 되었다는 뉴스. '일본과 코리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제목이 이채롭다) 







(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 미국 소련 영국 등 전승국이 해석한 코리아란 바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코리아'이다. ) 





2. 소련군의 북 주둔, 미군의 남한 주둔은 무엇이 문제였는가? 소련군과 미군의 ‘통치’로 인해서 단일정부 수립은 연기되어 버렸고, 소련군과 미군 철수 시한도 정해놓지 않았다. 



이렇게 소련군과 미군이 동시에 북한과 남한을 분할 점령함으로써, 코리아의 운명은 다시 국제적인 세력관계의 이해관계에 내맡겨지게 된다. 소련군과 미군이 1948년과 1949년 사이 북한과 남한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 군대 철수가 오히려 코리아 한반도의 위기 등급만 더욱더 올려놓고 말았다. 소련군과 미군은 철수했지만 소련군은 북한 정부를 지지하고, 반대로 미군은 남한 정부를 옹호했다. 


이러한 북한과 남한 정부의 수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한국의 최대 과제였던 독립정부 수립의 실패를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만들어진 38선, 1945년 당시 만들 때만 해도 2016년이 되도록 이 분단이 이어질 지는 몰랐을 것이다. ) 




3.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코리아에 다이나마이트 뇌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철수한 셈이다.


회고적으로 평가한다면 미군과 소련군이 설치한 이 폭약 뇌관은 그 어느 누군가가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이 폭약 버튼을 누를 것인가?  


북한의 김일성 정부와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단순한 미소의 ‘꼭둑각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정부의 정치적 의지와 결정방향, 그리고 그 선택지들을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미국군과 소련군이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코리아에서 철수한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개의 한국 정부들을 하나로 합치는 ‘경쟁’이다. 그 방법으로 불행하게도 북한 정부와 남한 정부는 ‘전쟁’을 선택했다.


 

4. 그렇다면 남한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왜 두 개 정부는 ‘전쟁’ 대신 공존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지 못했는가? 



북한 김일성 정부와 남한 이승만 정부 간의 이념적 정치 가치관의 차이가 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북한 김일성은 항일무장 투쟁 경험을 내세워 민족해방 이후 사회주의 정부를 한반도에서 수립하고자 했고, 남한 이승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통일정부의 이상형으로 제시하면서 ‘북진 통일 March North'을 주창했다. 





(1948년 이승만은 당시 73세였다.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와 중장 존 하지) 




1945년 패망 이후 분단된 서독과 동독에서는 통일 전쟁이 발발하지 않고 긴장공존을 유지했다. 그런데 왜 남한과 북한은 이러한 ‘긴장’과 ‘대립’속에서 공존하지 못한 채, 3년 전쟁을 경험했는가? 내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남한 이승만 정부와 북한 김일성 정부가 ‘꼭둑각시’가 아니라 코리아 프로젝트(통일 코리아)가 서로 달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한 이승만과 북한 김일성 모두 ‘전쟁’ 발발시, 통일전쟁이 일어난다면, 북은 소련군 남은 미군의 원조를 받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세 번째, 동독과 서독의 분단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유럽에서 소련군과 미군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미국과 소련은 외무부 장관 협의를 통해서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들을 조정 합의 타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 마오 정부의 탄생 이후, 급변하는 제 2의 전선이 된 극동 아시아와 남한과 북한 영토가 미국과 소련이 그 대립을 해소할 정치적 공간이 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유럽이 아닌 제 2의 전선이 형성된 남한과 북한에서 누가 패자가 되느냐를 놓고 한판 격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한 이승만 정부와 북한 김일성 정부 역시 소련군과 미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내전’을 준비한 셈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소련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 자본주의 진영 사이에 ‘갈등’ 폭발이 발생하기 최적화된 곳이 바로 한반도였다.  




(1945년 당시 33세였던 김일성은 소련의 이반 키스티아코프 장군의 원조 하에 북한의 주요한 정치가로 등장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에 등장한 김일성 ) 




5.  남북한 시민 내전과 미소진영 국제전을 동시에 수행한 한국전쟁



소련과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관철시키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과정과 그 이후에 소련과 미국이 유럽 발틱, 발칸 반도, 독일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냉전’은 시작되었다. 그 냉전의 제 2차 라운드 무대가 바로 한반도가 되었다. 



역사가 존 가디스는 미국은 군대 철수 이후, 1950년 1월 12일 에치슨 라인을 강조하면서 미국은 ‘트루먼 경계선’, 즉 일본과 오키나와 섬,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미국 헤게모니 제한선이라고 했다. 남한과 대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존 가디스 말대로 미국이 여기에 만족했겠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 패망 이후, 일본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 영토를 ‘덤’으로 봤건 실질적인 대륙 전진기지로 봤건 간에, 이 둘 다이건 간에, 대 한반도 이해관계를 분명히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1945년 9월 인천에 들어온 존 하지 중장이 ‘일본 제국이 아니라 미군 군대가 남한을 통치한다’고 말했겠는가? 



미국의 대 한반도 이해관계는 미국 혼자가 아니라 소련의 이해관계 표출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은 미국의 의도를 보고 대 한반도 전략을 수립했고, 미국은 그 반대로였다. 미국과 소련 가운데 북한 김일성 정부과 남한 이승만 정부가 있었지만, 규정적인 결정적인 힘은 미국과 소련이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행동개시할 정치적 환경과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존 하지 중장과 미군은 남한에서 대중적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이승만 세력이 그의 정적이었던 좌익세력을 남한에서 탄압하고 제거하는데 물질적 군사적 토대를 제공했다. 







(1950년 1월에 발표된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 Dean Acheson 라인은 대만과 한반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직접 개입하게 된다) 


 https://www.stratfor.com/image/us-cold-war-containment-strategy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 



참고 : 

John M.Swomley,jr, American Empire: The political Ethics of 20th Century Conquest, (MacMillan Company:London), 1970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 A New History, 2005, Penguin Publisher 
Kees van der Pijl, The Making of An Atlantic Ruling Class,(Verso:London), 1984
Charles W.Kegley,Jr, After the Cold War: Questioning the Morality of Nuclear Deterrence,(Westview:Oxford),1991.
Leslie Defler, An Age of conflict: Reading in 20th Century European History,(Harcourt Brace College: London), 1997
Misha Glenny, the Balkans: Nationalism, war, and the Great Powers, 1804-1999, (Penguin:USA), 1999
Eric Hobsbawm, Age of Extreme:the Short 20th Century 1914-1991, (Michael Joseph:London), 1994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