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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

한국 노동운동사. 1990.1.22. 전노협 출범식 vs 김종필, 김영삼, 노태우 3당 합당 = 민자당 탄생

by 원시 2024. 1. 23.

실록 민주화운동 구독
95. 전노협 출범
2005.03.23 18:18
[실록민주화운동] 95. 전노협 출범

88년 상반기의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 체결 투쟁, 현대엔진을 비롯한 선진적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투쟁과 맞물려 진행된 이런 흐름은 지역별·업종별·그룹별 노조협의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일반 제조업 노조들은 87년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최초로 결성된 이후 모두 13개 지역에 지역별 노조협의회를 출범시켰으며, 비제조업 사무·전문직 노조들은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87년 11월), 연구전문기술직노동조합협의회(88년 7월) 등 업종별 협의체를 중심으로 뭉쳤고, 현대와 대우 등 대기업 노조들은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시작으로 그룹별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와 함께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들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88년 6월)를 구성해 보다 효과적인 지원체계를 꾸렸다.

한편 87년 이후의 여러 투쟁을 통해 노동법의 일부 독소조항이 노동3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체험한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꾀하는 제도개선 투쟁의 일환으로 88년 중반부터 노동법 개정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대의 틀은 전국적 범위로 확대됐다. 88년 5월 노동법개정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가 결성됐고, 이어 10월6일에는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투본)가 구성됐다. 

 

마창노련 의장 이흥석을 의장으로 선임한 전국투본은 전국적인 서명운동,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등반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노동법 개정의 정당성을 알려나갔다. 

 

11월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전국에서 5만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노동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대회가 끝난 뒤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가두행진 및 시위를 벌였다.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공익사업 직권중재,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제한,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 등을 철폐하기 위한 노동법 개정투쟁은 정치정세의 변화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89년 총선 뒤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6급 이하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보장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일부 개정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88올림픽을 내세워 체제 정비의 시간을 확보한 6공 정부는 88년 12월28일 체제 수호와 민생치안 확보를 천명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89년 들어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은 89년 초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이후 현대중공업·서울지하철노조 파업 등 파업 현장엔 예외없이 공권력을 동원했다. 

 

특히 문익환의 방북과 5·3 동의대 사태를 빌미로 5공 때를 방불케 하는 이른바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전교조 결성과 대량해직 사태가 뒤를 이었다. 

 

불법 수색과 핵심 지도부 구속, 구사대와 용역 깡패를 동원한 노조 파괴공작과 테러 등 강력한 탄압책으로 88년 80명이던 구속 노동자 수가 89년에는 611명으로 8배 가까이 늘어났다. 

 

또한 89년 하반기 경기가 침체국면에 접어들고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공안정국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의 과격한 투쟁이 경제를 망친다’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횡행했다. 전경련과 경총 등 사용자단체도 경제단체협의회를 구성해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의 인사경영권 참여 배제,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거부 등을 주장하며 정부의 공세에 발을 맞추었다.

그러나 노동법 개정투쟁은 조직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중대한 결실을 거두었다. 공동 투쟁을 통해 전국적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틀을 확보한 것이었다. 

 

88년 12월22일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가 결성됐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비롯한 17개의 지역노조협의회,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를 비롯한 4개의 업종협의회가 참여하고, 전교조·병원노련·언론노련 등 7개의 업종노련이 참관단체로 등록한 전국회의는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의 건설’을 1차적 과제로 선언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간 물밑에서 논의되던, ‘한국노총과 길을 달리하는 새로운 전국조직 건설’이 본격화됐다. 전국회의는 지역노조협의회의 현황과 문제점, 조직 결성의 경로, 한국노총과의 관계, 참여범위 등을 놓고 1년여 간의 논의와 준비를 거친 뒤 89년 12월17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전국회의 의장 단병호(현 민주노동당 의원)를 위원장으로 하는 창립준비위는 이듬해 1월22일을 창립대회 날로 잡고 실무 준비에 착수했다.

90년 1월22일 서울지역 경찰에 갑호 비상령이 떨어졌다. 이틀 전에는 노태우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을 불러놓고 ‘산업평화 조기정착과 임금안정을 위한 대책회의’를 열어 전노협을 엄단하겠다는 방침을 이미 밝혀놓은 상태였다. 

 

전노협 창립대회장으로 공고된 서울대 주변엔 2만5천명의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밖에 대회 개최가 가능한 서울시내의 모든 대학교에도 경찰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요 전철역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검문검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노협 창립대회는 예정된 낮 12시를 45분 넘긴 시간에 계획대로 개회됐다. 창립준비위가 당일 아침, 대회 장소를 성균관대 수원캠퍼스로 변경하고, 치밀한 비밀연락망을 통해 대의원들에게 이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창립대회는 전국 20만 조합원과 14개 지역노조협의회, 2개 업종협의회를 대표하는 800여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됐다. 

 

수배 중인 단병호가 전노협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고, 안전 문제로 참석이 불투명했던 단병호가 창립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회장은 환호와 열광으로 떠나갈 듯했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했음을 알리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자주적 산별노조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뒤늦게 대회 개최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이 대회장 진입을 시도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눈물을 흘리며 ‘전노협 진군가’를 합창했다.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발 두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전노협은 스스로 밝힌 바대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였고, 그 이념과 조직은 87년 대투쟁을 정점으로 한 80년대 노동운동의 총결산이나 다름없었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나라의 민주화, 자주화,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투쟁해 나갈 것’을 선언한 이 새로운 조직 앞에는 90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전노협이 출범하던 이날,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합당이 발표됐다. 새로이 탄생한 거대 여당은 전노협을 ‘계급투쟁과 노동해방 이념 아래 폭력혁명 노선을 추구하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는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지도부 구속·수배, 탈퇴유도 공작, 가입 사업장에 대한 업무조사와 공권력 투입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조직을 와해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출범 5개월 만에 전노협 지도부와 소속 노조의 간부 200여명이 구속되거나 수배됐다.

그러나 그러한 탄압은 오히려 새로울 것이 없었다. 세계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고, 국내적으로는 군부독재세력과 이른바 정통야당 세력이 손을 잡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 어떤 가치, 어떤 방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뿐만 아니라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나라의 민주화, 자주화, 평화통일’을 위해 싸워나갈 것인지가 90년대를 출발하는 전노협의 실로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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