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history)226

최악의 날,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사면되고, IMF 긴축 통치 시작하던 날 살면서, 다들 최악의 날이라고 기억하는 그런 날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1997년 12월 22일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1997년 12월 22일은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되던 날이었고, IMF 긴축통치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앞으로 더 나쁜 날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12월 22일이 최악의 날이다. 김영삼은 1996년 신한국당 총선 승리를 위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고, 언젠가는 석방시키려고 했다. 언론에서는 역사바로잡기, 1212군사 쿠데타 세력 척결이라고 찬양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찬성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대선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 복권시켜버렸다. 1945년 이후 친일반역자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두.. 2017. 3. 24.
1943년에서 1953년까지 분단과정의 교훈-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이명박-박근혜 한국 보수파의 외교 실패를 관찰하면서 1945년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분단 과정의 교훈 :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다른 나라들이 코리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코리아는 '일본 점령지'로 해석되었다.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 (해방일)로 기념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국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진실의 전체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게는 코리아란 일본 패방 이후 새로 생긴 '전승국의 전리품' 영토였다. 큰 그림을 그리자면,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협조하기도 하고 새로운 경쟁을 시작했다. 그 무대는 유럽이었고 새로운 지도 그리기였다. 발틱, 발칸반도와 독일 (동독과 서독의 불균형 분할: 동독은 서독의.. 2016. 3. 31.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고맙습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위르겐 힌츠페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분이 돌아가셨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운 분이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80년 광주 항쟁의 진실의 절반은 기록으로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촬영해 진실을 독일과 세계에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쯔페터가 자신의 고향인 라쩨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지난 1월 25일 별세했다. (1937년~2016.1월 25일) 1980년 5월 당시 위르겐 힌쯔페터는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일본 됴쿄 지부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9일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http://bit.ly.. 2016. 2. 6.
신영복 붓글씨, 당무유용(當無有用), 없음 때문에 쓸모가 생겨나다 신영복 선생 붓글씨가 방 벽에 숨어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당무유용 종이 쪽지가 반듯하지 않고 기울어질 정도로 오래 되었다. 몇 년 전에 벽에 붙여 놓은 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신영복 선생은 원래 경제학자였는데, 왜 노자 '도덕경' 구절을 붓글씨로 썼을까? 그 이유도 신선생의 노자 해석도 다 모른다. 붓글씨 서체, 서화집을 남겼지만, 이것 역시 자기자신과의 화해의 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며칠 전 신영복의 "엽서"를 읽었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수, 계수 등에게 쓴 편지들 모음이다. 여러 편지 엽서들 중에, 신영복이 71년부터 86년까지 감옥살이를 했던 대전 교도소에서 전주 교도소로 이감하면서 아버지께 쓴 엽서를 읽을 때, 목이 뜨거워졌다. '자유'의 이동이 아니라, 또.. 2016. 1. 22.
신영복에 대한 부당한 평가 좀 고약하고 부당한 동아일보 송평인의 신영복 평가:동아일보 댓글부대는 송평인의 글에서 '맑은 생각 신영복'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반공반북 저주의 알바성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송평인의 신영복 평가 글은 좀 고약하고 부당한 측면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영복이 경제학자로서 정치경제학 용어를 가지고 '신영복 이상사회'를 설명하도록 애초에 사형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하지 말던가, 20년간 신영복이 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했으면, 당시 박정희 경제정책의 기초를 만들어주고 간 로스토우 (W.W.Rostow)의 "경제성장단계들: 반-공산주의자 선언(1960)"보다 더 나은 경제대안을 신영복이 만들었을 수도 있다. - 2) 20년간 그를 감옥에 처넣었으면, 적어도 감옥 안에서 '경제학 강사'를 해왔.. 2016. 1. 20.
박유하 재판 결과 보도한 뉴욕 타임즈 기사를 읽고 몇가지 소감 박유하의 를 읽고, 그리고 최근 벌어진 박유하의 피소 기사를 듣고 드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박유하 책과 그의 활동에 대해서 평가하자면, 박유하는 폐암 수술하는데 수술칼을 들고 온 게 아니라 한-일 화해를 위해 부엌 식칼을 들고 온 셈이다. 순수하고 진정성 어린 한-일 화해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박유하의 부엌식칼 때문에 오히려 수술 와중에 '감염' 증세가 더해서 환자 자체 건강이 더 위태롭게 되었다. 역사 문제는 역사 교수만이 법률 문제는 법대 교수나 법조인들만 해결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학 전공자인 박유하가 역사적 사료를 검증하고 역사적 방법론까지 검토하는데, 그 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박유하 사건을 전환점으로 삼아서, 성노예 여성들의 해당 10여개국 역사가들이.. 2016. 1. 15.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문제점 (1) 일본제국주의자의 전쟁 범죄를 부차시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유하의 책은 현재 아베-박근혜 합의 논란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와싱턴 심포지엄에 박유하가 발표한 글 역시, 전쟁 성노예 근절과 한-일 및 아시아-일본 화해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 군대에서 성노예 및 성노동 착취를 당한 여성들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10여개 국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국 대만 필리핀 등을 포함한 모든 해당 국가들과 일본이 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선 박유하의 ‘와싱턴 심포지움’의 기초가 된 그의 의 주장과 결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축약될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 국가(일본 천왕)나 군부가 공식적으로 매춘부를 군대로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혹은 역사적인 고증 자체가 어렵다. (2) 전쟁 성노예 .. 2016. 1. 14.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 그 아부지는 왜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그 아부지는 왜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언젠가부터, 먼저 간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현실을 오래 산다거나, 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다 채운다거나 하는 게 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데모가 값싼 경력 한 줄이 되고, 고귀하게 팔려 나가지 못했다. 한국의 독특한 정서, 구속된 자식들의 부모들이 가 된다는 것이다. 난 그걸 보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보기 힘든 어떤 어떤 접착제의 원형질을 보는 것 같다. 가족의 소소한 나들이 사진, 그 속 주인공들, 선하게 생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다. 그리고 그것들은 2012년 이 나침반 상실, 어처구니없는 정치판과는 대조가 된다. 세월이 흘러 우파는 전 세계적으로 되는데, 오히려 개혁이니 진보니 자유주의 외치는 .. 2016. 1. 14.
한상진 (국민의당)의 이승만 평가 문제점,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안 안철수가 말한 '국민의당'의 최고인재들은 누구인가? 그 중에 한 명은 한상진 전 교수다. 11일 이승만 박정희 묘소에 참배한 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 땅에 도입하고 굳게 세우신 분"이라고 이승만 대통령 (1대~3대)을 평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11월 27일에 제헌헌법 (1948년 헌법)을 억지로 뜯어고쳐서 장기집권을 하고자 했다. 원래 헌법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48년~52년 (1대 대통령), 52년~56년 (2대 대통령) 두 번을 했기 때문에, 56년~60년 3대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은 54년 11월 27일에, 초대 대통령에게 국한해서 대통령 중임안을 폐지하자는 내용을 골짜로 한 '개헌'을 국회에서 표결했다. 개헌안 통과는.. 2016. 1. 12.
종이학 천마리, 히로시마 사다코 추모비와 서울 평화비 소녀상 히로시마 사다코 추모비와 서울 평화비 소녀상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려다 644마리에 그친 못다한 꿈이 있었다. 1946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미국 원자폭탄 투하 당시,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라운드제로와 사사키 사다코 (1943년 생, 당시 만 2세)의 집은 1.6km 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사다코 어머니 말에 따르면, 원자폭탄 폭발 당시 사다코는 집에 있었는데, 그 폭발로 집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고, 죽은 줄 알았는데, 한참 만에 산 채로 발견되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ABpssKWCoE 1943년 사사키 사다코 양 태어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공격 이후, 폐허가 되었다. 사다코 양은 당시 2세였고, 원자폭탄은 사다코 집 근처 미사사.. 2016. 1. 12.
이승만 독재자는 대구를 가장 무서워했다. 2016년 대구는 새누리당(박근혜) 지지율이 77%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대구 민심도 변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그 대구 민심 변화의 역동성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가장 두려워했던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한 도시에서 보수적으로 변화된 시점은 박정희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1963년 대선), 울산 부산 대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업화' 투자를 하고 나서였다. 그게 정치적으로 결실을 본 것은 1967년 대선이었다. 거칠게 말해, 세대로 치면, 대구는 3세대가 60년 동안 그 주류 투표 행태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구의 이러한 정치의식과 민심은 고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의 조건들이 물론 필요하다. 첫번째,.. 2016. 1. 6.
박근혜 - 아베 위안부 합의, 졸속인 이유들, 왜 이렇게 서둘렀고 무엇이 문제인가? 박근혜-아베 ‘위안부’ 정치적 협상 문제점. 가해 주체가 빠졌다. 이번 외무부 장관 협상으로 아베 일본 수상은 역사를 지웠고, 피해자들은 역사를 '되돌려 기억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역사 망각과 기억 투쟁이 다시 교차한다.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는 80년 광주항쟁도 사실 역사적으로 그 진실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1980년 광주 시민들에게 총을 쏴라고 명령한 책임자(전두환)는 지금도 ‘법적으로’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번 박근혜-아베 협상도 본질적으로 광주 문제와 동일하다. 일본 아베 수상이 사과는 했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사과하는 ‘입법’ 절차나 ‘행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책임 표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2015년 박근혜-아베 협상은 80년 광주 문제처럼, 가해자 규명은 실패하고 있.. 2015. 12. 31.
43년 전, 유신헌법을 다시 읽어보다 ,평화통일을 내건 박정희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위해 제 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제 4공화국 '유신헌법'을 내걸었다. 당시 신문을 보니, 박정희가 머리말로 내건 게 '평화 통일'이었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만들려는 것과 비교해서, 훨씬 더 거창하고 웅대한 포부를 담았다. 박정희 독재정권이나 그 이후 군사정부들도 '평화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카드로 활용했지만 말이다. --박근혜의 한국사 국정교과서 운동, 이데올로기가 빈곤하다.박근혜와 박정희는 비교하기도 멋적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반공반북' 시멘트 동네탑 시대에 '배고픔'을 극복하자는 모토라도 있었지만, 박근혜는 북한보다 18배나 더 큰 경제규모를 가진 한국의 대통령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반북이니 반공이니 외쳐도, 일당.. 2015. 11. 7.
1990년 1월 22일 세가지 사건 1) 민주자유당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합당) 2) 전노협 탄생 3) 동독 공산당 해산 1.1990년 1월 22일, 24년전 오늘은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을 만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다.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보수 정당이 태어났고, 전국노동자협의회 20만 조직이 탄생했다. (당시 단병호 위원장은 41세)가장 기억에 남는 두 단어 "억압과 굴종의 시간"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마음과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 두 단어, 누가 알았으랴? 97년 이후 더 악랄한 IMF 긴축통치로 전 한국사회가 시민 내전 상태로 빠져들어, 또 다시 신분제 자본주의에 맞서 "억압과 굴종, 노예를 거부"라는 똑같은 슬로건을 내 걸게 될지, 인간의 역사는 모질다. 어디로부터 그 반동과 복고, 반혁명의 폭풍이 몰아칠지 모르니 말이다. 2.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헤어스타일, 노태우-김종필과 손 잡고 있던 사진. 그 .. 2015. 1. 25.
좌파의 정치적 숙청 그 오류들을 뒤돌아보다, '눈물 젖은 두만강' ;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 2012.07.27 16:44좌파의 정치적 숙청, '눈물 젖은 두만강'원시 조회 수 1460댓글 7 끌적거림: 오후 상념 예전에는 100권씩 한국 책들을 신청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사서까지 채용되어서 한국에서 발행된 책들이 많아졌다. 과거 민주노동당 (2005년) 정책실에서 발행된 10권 책도 주문해서 태평양을 건너왔다. 국외에서 보는 민주노동당,사회당, 진보신당, 통진당에 대한 내 감정과 느낌은 아마도 국내에서 보는 시각들과는 다를 것 같다. 거의 4개월 만에 한국 책들을 몇 권 보았다. 남한 인구 5천만,북한 2천 600만, 해외 800만 코레아인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사회적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론 수립은 엄청난 작업이 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할 것이다. 이런 부담이 늘 있다.. 2014. 12. 7.
경성제대 마르크스 소개 과정: 박치우가 말한 심장적 인간, 인민 민주주의 우리만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1940년대에도 박치우 역시 우리와 비슷한 정신적 상황을 겪었다. 1 민주주의, 그것도 진짜 민주주의를 고민하다. 박치우는 경성제대 철학과(1928년 입학)에서 주로 독일 철학, 당시 유행하던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를 배웠다. 졸업 논문 역시 하르트만 Hardman 에 대한 것이었다. 신남철의 경우도 브렌타노 Brentano로, 박종홍은 하이데거 Heidegger에 대한 졸업논문을 작성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에 수용된 철학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경성제대 철학과에는 아베, 미야모토, 다나베 등 일본 교수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해석된 독일 철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사정 연구회라는 모임에서 일본교수 미야케가 있었는데, 그는 일제 식민 통치 수.. 2013. 7. 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