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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국제정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하마스 등장의 역사적 배경.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의 이념적 뿌리들. 나세르 아랍민족주의. 바티즘. 무슬림 형제단.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성전(jihad)의 기원

by 원시 2023. 11. 9.

3장. 파타와 하마스 갈등의 이념적 뿌리들

 

하마스와 파타의 이념적 차이는 무엇인가?

 

1980년대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랍 세계를 휩쓸다. 하마스 역시 팔레스타인에 이슬람 국가를 수립할 것을 목표로 하다.

 

파타 입장 – 탈종교,세속주의적 아랍 민족주의와 팔레스타인 민주국가 수립.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 이전, 특히 1960년대는 아랍인들은 탈종교 세속주의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파타 (Fatah) 역시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세속주의적 민주 국가’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하마스 입장 – 이슬람 국가 수립.

 

하마스의 이념. 팔레스타인 (혹은 아랍) 민족주의를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팔레스타인 영토를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미래세대를 위한 “이슬람 신탁” 소유지로 해석하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마스는 파타가 추구하는 이스라엘과의 정치적 협상을 거부한다.이런 정치적 타협 대신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모든 이슬람 교도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규정한다. 이슬람 종교야 말로 팔레스타인 문제 해법이다. 이를 위해 개개인들도 이슬람 종교로 무장해야 하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성전 jihad’ 정신을 널리 설파해야 한다.

 

이러한 이념적 차이를 고려할 때,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파타’와 ‘하마스’의 충돌과 갈등은 화해불가능하고, 양 측의 ‘팔레스타인 국가’의 모습도 확연히 다르다.

 

<팔레스타인에서 세속주의적 민족주의 이념의 기원>

 

오토만 제국과 서방 지배로부터 해방, 아랍 민족주의 국가 수립 목표.

 

그 영토는 지중해부터 아라비아 해까지, 북부 아프리카부터 이란을 제외한 모든 중동국가들 포함, 언어(아라비아), 문화, 종교, 역사를 공유하는 아라비아인들의 통일 국가를 목표로 한다.

 

오토만 제국의 쇠퇴 후,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슬람 신자들과 아랍 정치가들이 정치조직을 결성하기 시작.

알-문타다 알-아다비 (al-Muntada al-Adabi –문학 클럽), 오토만 탈-중앙화 정당, 알-Qahtaniya, al-Ahd, al-Fatat (청년 아랍 협회 the Young Arab society) 등을 결성.

 

특징. 초기 이슬람 신자들은 아랍 국가 독립보다는 오토만 (튀르키예)과 공존이나 오토만 제국 안에서 더 많은 자율성 신장을 목표로 함.

이에 비해 기독교 신자들은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아랍국가를 수립할 것을 주창함.

 

 

<시리아 기독교 아랍 민족주주의>

 

 

시리아 기독교인 네기브 아주리 (Negib Azoury 1870-1916)는 1905년 “아랍 민족의 각성(Le réveil de la nation arabe) 출간.

아주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오토만 제국에 속했던 예루살렘에서 공무원 생활도 함. 아주리는 아랍인은 이슬람교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포함하기 때문에, 이들이 힘을 합쳐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 아랍민족국가는 지중해에서 아라비아 해까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부터 수에즈 이츠머스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창.

 

시리아 기독교인, 이브라힘 알-야지지 (Ibrahim al-Yaziji 1847-1906)

 

같은 아랍 민족이 우선이지, 종교는 부차적이기 때문에, 이슬람 아랍인들과 기독교 아랍인들이 힘을 합쳐서 오토만 제국을 물리치고, 아랍인들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새 독립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창.

 

 

1917년 오토만 제국의 패배와 아랍 민족주의 (기독교, 유대, 이슬람 종교보다 우위)

 

오토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하기 시작. 1917년 12월 이집트에 있던 영국군 대장 앨런비 (Allenby) 군대가 예루살렘을 장악.

 

페이잘 (Faysal) 이 이끄는 아랍 군대도 1918년 10월 1일 다마스커스에 입성해 아랍 행정부를 구성하기 시작.

알레포 (Allepo)에서 연설. “아랍은 모세, 예수, 무하메드보다 앞서 아랍사람들이다.”

페이잘은 탈종교적 세속주의적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

 

 

페이잘은 교육부 장관에 사티 알-후스리 (Sati al-Husri)를 임명했다. 오토만 제국 시절 관리였던 알-후스리는 모든 교과서를 아랍어로 만들었다. 전 교과서의 아랍어화와 더물어 알-후스리는 아랍 민족정신을 불어넣게 위해 ‘역사’ 학습을 강조했다. 개인의 자유보다는 아랍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더 강조함.

 

 

<나세르주의와 범-아랍주의  Nasserism and pan-Arabism>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후세인 (1918-1970:Gamal Abdel Nasser Hussein)

나세르주의 구성요소들 : 아랍 사회주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반-이스라엘주의, 국제적 비동맹, 서방 자본주의 거부,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거부)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나세르 정치 노선

 

[1] 유대인 시오니즘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 해방 지지

[2] 영국이 소련과 경쟁하면서 아랍을 지배하기 위해, 이라크를 영국 동맹기지로 사용하고자 맺은 바그다드 협정을 반대

 

[3] 나세르가 미국 아이젠하워, 영국 이든 (Eden) 정부의 아랍 지배에 대한 반대. 라디오를 잘 활용해 아랍 민족주의를 고취하자, 아랍 전역에서 나세르 추종자, 나세르주의자들이 들불처럼 형성됨.

 

[4] 아랍 민족주의 추구. 이집트에서 세속주의적 민주 국가 수립 목표.

그러나 나세르의 ‘민주주의’는 서방의 Liberal 리버럴이 아니었음.

 

다당제 허용과 다원주의는 아님, 오히려 반대로 정당들을 금지시킴.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인들에게 나세르 집권 정당성을 확인하고자 함.

집권 초기에는 나세르가 ‘무슬림 형제단’과도 친분을 쌓음.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범-아랍 민족주의’ 기치 하에 포용함.

 

인도 네루, 유고슬라비아 티토 노선처럼, 미국과 소련 체제 모두 거부하고, 비동맹주의 노선을 추구. (NAM- non-aligned movement 비동맹운동)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인종주의, 모든 종류의 외국 폭력 형태들 (점령, 지배, 침략)을 반대. 강대국의 헤게모니 반대.

 

 

(좌.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중앙 인도 수상 네루, 오른쪽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도. 비동맹 운동의 창시자들이다)

 

 

 

[5] 미국의 이집트 나세르 견제 방식은,  미국이  -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드 Saud’ 왕가 지원함으로써 이집트 나세르를  견제했다.

 

 

바티즘 (Baathism)이란, 미셸 아플라크 (Michel Aflaq 1910-1989) 시리아 기독교 사상가, 수니파 이슬람교도 살라 알-딘 알-비타 (1912-1980 Salah al-Din al-Bitar) 이 시작한 세속주의적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다.

 

 

1953년 바트 (Baath)운동은 바트 아랍 사회주의자 정당으로 가시화.

아랍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강력한 한 정파가 되다.

미셸 아플라크 입장 – 마르크스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 사이에서 분열을 겪기도.

 

이라크 바트 당은 이슬람의 샤리아 법(the Sharia Law)을 거부하고 세속주의적 민족주주의 국가를 지향.

이라크 바트당 노선 (a) 소련 사회주의를 포용하고, (b) 자본주의 위협을 자각하고 있는 민족주의자, 미국 소련 양극에 포함되지 않은 비-동맹세력들과 연대.

 

이라크 바트당 사담 후세인 (Sadam Hussein) – 종교적 가치를 거부하고 과학기술 진보 교육 실시.

바트당은 미국 등 서방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간주.

 

 

 

(미셸 아플라크는, 나세르 이전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를 하나의 아랍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나세르의 Pan-Arabism의 시원이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코뮤니즘을 수용한 정당을 건설한 이유는, 서방의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함.

1917년 이후, 볼셰비키는 이슬람 종교도 민족해방 운동의 한 계기로 활용,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 강화 요소로 봄.

 

 

1918년 1월 19일. 소련이 무슬림 코뮤니스트 조직국 (Commissariat for Muslim Affairs)를 창설.

1918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각 지역에 흩어진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이 ‘전국 중앙 조직’을 건설.

1919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제 2차 회의를 열어, 서 아시아에서 공산당 수립할 것을 결의.

 

1919년 3월, 제 3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창설 이후, 팔레스타인에도 러시아 볼셰비키 정치노선이 소개되었고, 이 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은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을 건설함.

이집트의 경우, 사회주의 정당에서 이름을 ‘공산당’으로 바꾸기도 했음.

 

1920년 소련 볼셰비키 정부는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또한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거부했다.

1921년 소련, 터어키, 아프가니스탄, 이란은 ‘우정과 형제애 조약’을 맺고, 이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거부했다.

 

 

 

 

 

 

소련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히자즈 (Hijaz –국명. 1932년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로 개명)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26년에는 소련은 예멘(Yemen)을 독립국가로 승인했다.

 

 

식민지 민족해방과 독립국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소련 공산당의 노선과 코민테른의 영향으로, 아랍 지역에서 공산당은 급속히 퍼져나갔다.

 

 

1921년 이집트. 이집트 사회주의자 정당 창립 (1922년 이집트 공산당으로 전환)

1921년 베이루트에 스파르타커스 그룹 형성.

1924년 시리아 레바논 공산당 (CPSL) 창립

1923년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 (1924년 코민테른 승인. 1국 공산당 승인)

1919년 북서 아프리카 지역 (현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아 등이 속한), 마그레브 (Maghreb) 에서도 공산당들이 생겨남. (프랑스 공산당의 지부 개념이었음)

1934년 이라크 공산당 (ICP)

1921년 8월 15일. 바쿠 (Baku)에서 공산주의자 국제 회의가 열렸고, 무슬림 공산당들이 참여함.

 

아랍 공산당의 노선은 ‘범 아랍주의 pan-Arabism’

 

1929년 자미야트 알-아라르 (Jamiyat al-Ahrar – Association of Liberals 리버럴 협회) “모든 아랍 국가들은 하나의 나라이다.” 선언.

 

당시 공산주의는 아랍 민족주의와 팔레스타인 세속주의적 민족주의에 강한 영향을 끼침.

 

 

(1979년, 좌. 사담 후세인, 우. 바트당 창시자 미셸 아플라크) 

 

 

<파타 Fatah 의 이념>

 

파타는 자신의 이념적 노선을 명료하게 밝히지 않음. 그 이유는 아랍 세계를 포함한 현대 사회를 분리시키는 정치적 이념적 갈등에 신중한 입장을 취함.

 

파타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는 정당도, 전선(Front)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다.

정당은 고정된 사회적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파타는 운동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활동이다 (dynamism)이다.

 

물론 파타 근본 원칙들과 전제들을 수용하지만, 이것들은 실천운동에 종속된다.

파타의 이념적 내용들, 지적인 알맹이들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론과 이념은 경험의 결과로서 도출된다.

 

 

파타의 역사.

 

1958년 파타의 지도적 원칙들 수립.

 

[1] 혁명적 폭력이야말로 조국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2] 대중들이 이러한 혁명적 폭력을 각고의 노력으로써 실천해야 한다.

[3] 이러한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시온주의의 정치,경제,군사적 제도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4] 이러한 혁명적 행동은 모든 정당 혹은 국가 통제와는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5] 혁명적 투쟁은 장기간 수행될 것이다.

[6] 이 혁명 투쟁은 팔레스타인들이 선봉에 선 아랍 혁명이다.

 

 

파타 내부 정파들.

 

좌파 – 살라 칼레프 (Salah Khalef : 아부 리야드 Abu Lyad로 알려짐. 1933-1991) 아라파트에 이어 제 2인자로 알려짐. 1991년 내부자에 의해 암살당함.

 

우파 – 칼레드 엘 하산 (Khaled el Hassan 1928-1994)

 

야세르 아라파트 (1929-2004) 는 파타 대변인. 파타 내부 정파들 사이 조정자 역할.

 

 

(살라 칼레프와 야세르 아라파트) 

 

파타의 행동 노선은 마오쩌둥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을 사용함.

 

파타의 정치 노선은 좌익에 가깝다.

 

“파타와 좌파 Fatah and the Left” 글.

 

진정한 좌파 운동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을 종식시켜야 한다.

무장 투쟁을 통해 기성 세력과 현실을 바꿔야 한다.

[1] 인간의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키자

[2] 사회적 정의를 실행,실천하자.

 

파타의 노선이 좌파인 배경은 아랍 상황과 팔레스타인의 투쟁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도 연구하지 못했던 '특수한' 계급 개념이  팔레스타인에 등장했다. 바로 고향에서 “쫓겨난 계급 displaced person’s class”이라는 개념이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했다.

 

파타는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부른 적이 없다.

파타는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무장 투쟁을 실천했다.

물론 파타 내부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많았다.

 

파타의 라디오. “알-아시파의 목소리 Voice of Al-Asifah”는 “위대하고 자비로운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아랍인들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와 같은 보수적 왕족 국가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한 하나의 전술일 뿐이다.

 

파타의 혁명적 근거지(사무실)는 아랍 다른 나라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풍습과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파타의 정치 이념 색채는 굉장히 실용주의적이고 실천적이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파타의 목표. 세속주의적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음. PLO 헌장. 22조 항.

시온주의는 국제 제국주의와 연계된 정치운동이고, 전 세계 진보적 운동과 해방에 적대적이다.

시온주의는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이고 광신도이다.

시온주의는 그 목적 자체가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이고 식민주의자다, 그 방법은 파시스트다.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의 도구일 뿐이고, 세계 제국주의의  지정학적 전초기지일 뿐이다.

 

1971년 3월 카이로에서 개최된 PLO의 8차 회의에서 중요한 입장이 발표.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자는 시온주의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성취한 다음,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했을 경우, 유태인들의 종교와 상관없이 유태인들도 존중받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전선 (DFLP – Democratic Front for Liberation of Palestine) 입장은 ‘파타’보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유태인의 종교적 자유 보장 및 2개의 국가 승인 쪽으로 기움.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 지하드의 기원>

 

1987년 12월 제 1차 팔레스타인 인민 봉기, 인티파다가 발생한 이후, 팔레스타인 이슬람 운동은 ‘성스러운 전쟁, 성전 jihad’ 개념과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는 이스라엘과의 투쟁에서 ‘성전-지하드’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선교 방식.

 

이슬람 교리와 대중운동과 결합시켰다. 타르비야 (Tarbiyah)는 아랍어로 성장, 증가, 기르다는 뜻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훈련시키고 발전시키는다는 뜻.

이슬람 교리를 통해 개인, 가족, 그 다음으로 사회로 차례차례 변화시킨다는 뜻.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음.

 

이슬람 지하드의 ‘성전’ 기원.

 

샤이크 압드 알-아지지 오데 (Shaikh Abd al-Aziz Odeh) 선언 “우리는 세이드 쿠툽 Sayyid Qutb 을 이슬람 혁명의 진정한 대표자로 간주한다.” 쿠툽은 그의 책에서 “칼로써 적들과 싸우고, 성스런 전쟁을 위해 설교하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성스런 전쟁’을 벌이는 것은 쿠툽이 권장한 혁명적 투쟁 양식이다.

결론 – 진정한 이슬람교도라면 신성한 땅 1인치를 위해서라도 목숨과 돈을 바쳐야 한다.

 

‘무슬림 형제단’의 경우, 성전(聖戰-jihad)는 전 사회가 바뀌고, 세속주의가 사라지고, 이슬람이 전일적인 종교가 될 때까지는  수행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비해 ‘이슬람 지하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상정하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완전한 ‘이슬람화’가 달성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무장투쟁을 옹호한다.

 

 

‘이슬람 지하드’ 그룹은 ‘무슬림 형제단’의 점진적 개혁 노선을 거부하고, 아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단과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슬람 지하드’는 무슬림 형제단이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이집트와 같은 친미 친서방 국가들과 공존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비난한 반면, ‘이슬람 지하드’는 이란 혁명을 지지하고, 호메이니 (1900-1989 Ayotollah Khomeini ,이란 이슬람 공화국 창시자. 이란 샤 모함마드 레자 팔레비 왕조를 타도하고 이란 왕정을 종식시킴)로부터  중차대한 이데올로기의 영감을 받았다.

 

 

1987년 제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와 하마스.

 

하마스의  목표는 ‘시온주의자가 점령한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고, 이슬람 국가를 재수립하는 것이다.

1988년 8월 18일 하마스 헌장.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한다.

쿠프르 (kufr) –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을 ‘쿠프르:배신,불신앙’이라고 부름.

 

지아드 아부-암르 (Ziad Abu-Amr) 주장. 파레스타인은 이슬람 신앙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할 때 맨 먼저 향하는 지역이고, 알 악사(Al-Aqsa) 사원은 이슬람의 제 3의 신성한 장소이다. 예언자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승천했고, 야간 여행을 통해 알-악사에 이르렀다.

 

 

영토 개념이 꾸란에 근거하고 있는가라는 논쟁점.

 

이슬람 전통에서는 ‘영토 (땅)’을 강조하지 않음. 꾸란(Quran)에서는 신성한 장소로 ‘메카와 메디나 Mecca and Medina) 정도만 언급. 비-이슬람교도는 그 신성한 장소로 들어갈 수 없음. 이에 비해 유태인들은 ‘땅(영토)’를 강조함.

심지어 세이드 쿠툽(Sayyid Qutub)과 세이드 아불 알라 알-마우두디(Sayyid Abul A'la al-Maududi)도 이슬람을 어떤 특정 영토와 결부시키지 않았다.

 

유태인들과 비교해서, 1967년 까지도 시온주의와 싸워온 아랍 사람들은 광범위한 ‘문화적 아랍-이슬람’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팔레스타인 땅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신성한 땅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은 하나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평화의 집’ ‘이슬람 영지’(Dar al-Islam)의 한 부분이었다.

 

히렐 프리쉬(Hillel Frisch)가 말한 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보편적인 종교 교리가 ‘민족주의화’ 된 것은, 유태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본받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약속된 땅 promised land”이라는 그들만의 영토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팔레스타인 이슬람들이 유태인의 “약속된 땅”개념을 쓰기 시작했다.

 

하마스와 민족주의.

 

 

팔레스타인 영토의 1인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하마스의 주장.

 

과거의 이분법 사고, 즉 ‘이념’에 기초해 있는 이슬람과 ‘영토’에 기초해 있는 서구식 민족국가 개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마스는 버리다.

 

하마스의 ‘민족주의’ 개념 규정.

 

“이슬람 저항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란, 종교 이념의 한 부분이다. 적이 이슬람 영토를 침략했을 때, ‘성전 jihad’에 참여하는 것이 민족주의보다 더 높고, 최고의 헌신이다. 적과 싸우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슬람 남자와 여자의 의무이다. 여자도 남편의 허락없이, 노예도 주인의 허락없이 적과의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

 

 

이슬람 신앙인들, 원래 보편적인 종교로서, 민족, 인종, 계급을 초월해, 이슬람 신앙자들의 공동체 ‘움마 Umma’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는 서구에서 발생한 ‘민족국가’개념과는 차이가 나거나 그 개념에서 상반되기도 한다.

 

안드레아 뉘세 (Andrea Nüsse) 설명.

 

„19세기 이후 서구의 아랍 지역의 지배가 왜 재앙이고 수치인지 밝혀졌다.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이스라엘)를 막아내지 못한 이슬람 교도들의 무능,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아랍의 패배로 인해, 이슬람교도들의 자신감은 심각하게 무너졌다. 이런 무능과 연속 패배는 이슬람 교리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잘못된 행동의 신호로 간주되었다.

신의 의지의 대변자,대표자인 이슬람 교도들이 비-이슬람교도 적들에게 패배당하고 말았다.

신은 이슬람교도의 공동체로부터 철수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은 더 이상 신이 이슬람교도들에게 부여했던 ‘성스런 계획‘과 상응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가 싸우는 이유는, (위와 같이 적들이 비틀어 놓은) 역사를 바로 잡아,  이슬람 신앙과 신념이 역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 투쟁은 전체 이슬람교도의 신앙 공동체 (움마)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투쟁이 승리하게 되면, 이슬람교도들은 궤도 이탈에서 본래 궤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오로지 알라의 기치 하에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침략, 타타르인들의 침략을 물리친 이슬람교도의 과거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 국가의 수립이야말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정치적 해법이다.

 

 

 

 

출처: 제 3장. 파타와 하마스 갈등의 이념적 뿌리들. 

Chapter 3. Ideological Roots of Fatah-Hamas conflicts.   
책: 팔레스타인의 두번째 분리 :  하마스와 파타의 권력투쟁 (2022) 
 THE SECOND PARTITION OF PALESTINE
Hamas–Fatah Struggle for Power
저자: Subhash Singh (숩하쉬 싱) 

번역 및 정리: NJ 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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