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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개헌2

정봉주 '열린 민주당' 비례민주당 창당 문제점 , 1987년 10월 개헌 당시, 결선투표제 누락, 오류 되풀이, 비례용 똘마니 정당을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이 만들거나 조장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하다. 선거제도 개혁 반대다. 2024년 총선에서는, '도로묵' 승자독식 선거제도로 회귀하게 하자는 작태이다. 20대 총선보다 5% 정도 민주화시킨 21대 총선 선거제도 "준연동형" 조차도, 22대 총선에서는 없애버리자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의 폭거 야합이다.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이 71년 대선 후보를 선출할 때, 김대중이 2차 결선투표에서 1차전 1등인 김영삼을 누르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적이 있다. 김대중 김영삼 모두 '프랑스 대통령제도와 프랑스 헌법'을 87년 개헌 헌법의 모델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87년 10월 개헌 투표에서는, 제 6공화국 헌법에 프랑스처럼, '대통령 선.. 2020. 2. 28.
1987년 개헌, 결선투표 제도만 도입했다면, 노태우는 낙선되었을 것이다.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 제도만 있었더라면, 노태우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선투표가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36.7%로 1위였던 노태우는 '과반'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 2차 결선에서 2위였던 김영삼과 다시 재선거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1차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27%의 표 대부분은 김영삼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랬더라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정당과의 개헌 논의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았을까? 회고담 같지만, 그 원인들을 뒤돌아 보자. 1.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7월부터 9월까.. 201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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