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글로벌 슬럼프 서평

글로벌 슬럼프 서평.

원시 2025. 8. 12. 12:08
유학 괴담 하나. 한때 천재라고 불렸던 모 대학 철학과의 모 교수는 인간성이 좋기로 유명했다. 아무리 공부 못 하는 제자라도 유학을 가겠다고 추천서를 좀 써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 양반은 게으르기로도 유명한지라^^ 최상급의 칭찬으로 가득 찬 추천서를 써서 PC에 잘 저장해 놓고는 소뼈다귀 우려먹듯 또 써먹고 또 써먹고 하였다. 감사하게 받아간 제자들이야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었지만.
 
들통이 난 사연은 이러하다. 그의 제자들이 미국의 모 대학에 하나둘씩 입학하면서 추천장이 중복되자, 이 대학의 교수들이 '아니 작년에 봤던 추천장이랑 똑같은걸... 설마?' 하여 순진한 미국 교수 하나가 한국으로 문의메일을 날렸다. '몇몇 한국 학생들이 님의 이름으로 추천서를 위조한 것 같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천재 교수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당시 학생들 앞에서 그닥 부끄러워하진 않았다고 -_-;;
 
말빚에는 기한이 없다. 남의 인격과 가능성을 추천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그를 위해 무한대 빚 보증을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언어와 자기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시련이고, 그럼에도 그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거의 타자를 향한 실존적인 결단에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 하나, 유보조항 하나 만들어두지 않고) 자기를 기투하는 글을 써왔던 홍세화 선생이 지금 노심조에게 느끼는 절망감이 어느 정도일지, 어렴풋이 그 형태는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깊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첼로를 켜는 노회찬>을 읽고 감동을 받았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지금 선생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서론이 길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름이 아니다. 진보신당 당게의 최강 미스터리 캐릭터^^ 원시님이 번역서를 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읽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메꾸기 위해 소박하지만 나름 추천서 비슷한 것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북에서 원시라는 인물을 발견한 것은 올해 봄이었다.
 
잔잔한 사교와 덕담, 일상과 홍보 위주로 대화가 흘러가는 페이스북에서 특이하게 확 튀어버리는 댓글을 다는 캐릭터였다. in medias res라고, '(쓸데없는 것은 다 쳐내고 단도직입적으로) 사태 한가운데로 뛰어든다'는 서사적 테크닉의 정수처럼 보였다. 상대방이 원하건 말건 최대한 바싹 다가가서 어깨를 딱 붙잡고 이마를 갖다대고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렇죠? 아니라고요? 그건 아니죠?' 하며 속을 뒤흔들고 다그치고 행동을 촉구하는 '선동'이 그의 문체의 본질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편하고 불쾌할 수도, 또 엄청나게 매혹적일 수도 있는 문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뭐 각자 취사선택해서 들으세요...' 하는 자의식 보호 차원의 유보적 몸짓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뭐라건 간에..' 식의 표현욕의 배설도 아니고. '나는 지금 내가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너는? 내 말이 들리니? 지금 이순간 니 생각은 뭐니? 니 모든 것을 바쳐서 대답해 줘!' 이것이 원시 문체의 방향이다. 그래서 원시의 글은 모든 대화의 상대방에게 즉석에서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과잉되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런 문체를 구사하는 소설가를 단 한 사람 알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라고. 

 

 
지난 여름 어느날 진보신당 당게에서 닉네임 '원시'로 검색해본 적이 있다. 천 팔백 개 이상의 글이 떴다. 2008년 봄부터 3년 동안 줄잡아 하루에 두 개씩 글을 썼던 것이다. (깨손과 진보누리, 민주노동당 시절까지 합하면 정말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다가 문득 등골이 오싹했다. 외국에서 10년째 혼자, 온라인에 아무런 개인정보도 흘리지 않고, 오직 사이버 인격 하나로, '모든 것을 바쳐서' 대답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저런 밀도와 저런 페이스로 모든 사태에 지적으로 개입하는 글을 쉼 없이 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정신세계에서 가능한 일일까? 
 
이번에 나온 책은 원시의 글을 읽어온 독자들이 원시의 오프라인 정체성을 대략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지금까지 공개된 거의 유일한 증거다. 책의 내용과 의의를 떠나 그 점에서만 해도 사둘 가치가 있다^^ 책을 읽고 내용을 갖고 덤벼든다면 아마 번역자는 더욱 좋아할 것이다.    (2011. 서미현 러시아 문학 연구자 ) ( ~  2025.06.13.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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