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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

홍세화 대표 <배제된 자> 개념, 비판적 검토(3) 지젝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by 원시 2016. 8. 10.


지젝이 오히려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배워야 한다.

거꾸로는 별로 취할 게 많지 않다.



2012.08.25 19:46

홍세화대표 <배제된 자; 배제된 노동> 비판적 검토 (1)

원시 조회 수 772 댓글 1


생각나는 것 몇 가지 적습니다. 글쓰기 전에 서설, 진보신당 현상 = 홍세화 (안효상)은 해태 (야구) 왕조(16년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인데, 진보신당은 기아 타이거스(간당간당 5등). 


2011년 9-4 당대회 이후, 새로운 대표단을 구성할 때, 당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4가지 세대들간의 대화/소통, 차이와 동일성을 정치적 실천으로 융해해 낼 수 있는 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지금 2012년 8월 중간에 평가를 해보면, 현재 사회당-진보신당 집단 지도 체제는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홍세화-안효상 지도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이나 집단도 당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실천할 때는 같이 하고 그랬으면 합니다. 


정당은 철학적 관점만 가지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필요조건들과 충분조건들의 구별이 필요해 보입니다. 


1. 홍세화 대표 <선언문>,그리고 프레시안 기사 2개를 읽고 문제점 - 지젝한테 묻지 말고 홍세화를 보라, 친정엄마를 보라. 


<배제된 자> <배제된 노동> 이야기는 새로운 정치 주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니 늘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발굴하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당원들의 원성(?)이 자자한 지젝 (Zizek), 마르쿠제 (Marcuse), 구하 (Guha) 등 이런 이름들 빼고 그냥 말 뜻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배제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특히 '노동'은 하는데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 자들이나 사회적 '승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따지는 척도들을 말하기 전에, 진정한 좌파라면 <배제된 노동>을 이야기하려면 한국에 있는 이주민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정치적 연대와 실질적인 당의 활동을 보여줘야 한다. 2050년에 가면 한국도 지금의 경제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천만 이상의 노동력을 해외에서 들여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홍세화 대표가 20년간 파리에서 이주민노동자 택시 운전수를 했기 때문에, 위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대선 선언문>과 <진보의 자살인가 타살인가?>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배제된 노동> 개념부터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고서 지젝의 모호한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이들 돌보는 친정 엄마, 시어머니, 고모 이모들의 노동은 어떠한가? 얼마 전 지인이 한국 해남군에 사는 할머니가 서울에 사는 딸 아이들 보러 주 5일간 있고, 주말에는 전남 해남에 있는 할아버지 (남편) 밥해주러 출퇴근하고 있다는 말을 해줬다. 진보신당이 진정한 좌파이려면 그리고 여성 친화적 정당이면, 한국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진지하고 창의적으로 고민한다면, 지젝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육아 비용 지출하라" 전국의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들 종로에 다 모이거나 여의도에 모셔서 데모를 해야 한다.


"친정 어머니를 공무원화하라 !!" 지금 누가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가? 왜 친정 엄마 시어머니들이 아이들 보느라 근육통 무릎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리고 주말이면 영감탱이 ^^ 밥해주러 또 5시간 버스타야 하는가? 


모텔, 호텔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도시공간에 존재하는 <배제된 노동>은 많다. <배제된 노동> 선언이나 인용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조사와 탐구에 기초한 주체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것이 좌파당이 할 일이다. 몇 가지 아이템을 찾아서, 민노총이나 통진당 등 타 당에 비해 상대적인 정체성 확보로 자족할 일이 아니다. 



2012.08.25 20:19

홍세화대표 <배제된 자> 비판적 검토(2) 배제-포함의 척도들의 다양함 해결해야

원시 조회 수 67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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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제된 노동 개념을 사용하기 앞서 - 생각해야 할 점


진보신당은 지적으로 게으른 측면이 있다. 남들이 쓴 개념들의 역사성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고 그냥 수입하거나 빌어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는 빌어오는 것도 정확하고 엄밀하게 써야지,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더군다나 자기 권위까지 실어서 타인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까지 있어서 "사유의 폐색성"을 보게 된다. 


예를들어서, 진보신당이 새로운 주체를 찾는데, 왜 <배제된 노동> 개념이 <착취노동> 개념보다 더 나은가? 어떤 사회적 현상들을 더 많이 더 잘 설명해주는가? 최소한 이런 이론적 작업이 홍세화 대표가 지젝의 모호한 <배제>개념을 끌어들이기 전에 이뤄져야 한다. 지젝이 아니더라도 이미 정치학에는 "배제와 포함의 정치"문제가 있습니다. [exclusion, inclusion politics를 번역]


과거에 써온 착취, 지배와 같은 개념도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조직적으로 필수적이라면 굳이 버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민노총 정규직 노동자들이 아이들 학원 보내느라 잔업 하루에 3~4시간 하고 학비 버는 게 현실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일자리 뺏고 있고 (결과적으로, 잔업할 우선순위도 원청 정규직 노동자에게 먼저 갑니다) 그래서 노동자-노동자 갈등이 심합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혁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조.중.동에서 사용하는 "귀족노동자"라고 우리가 진단해버려야 합니까?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착취 노동"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더 강도높게 사회적 차별까지 당하고 있는 것은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또다른 사회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 문제들을 다 같이 다 고려해야 합니다. 


2. 배제-포함 정치학의 논리적 실천적 기준


<배제의 정치학>에서 중요하게 우리가 한가지 고민해야 할 지점은, <배제>의 주체가 누구고, <배제당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기준들에 따라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그렇게 되는가? 입니다. 


제가 볼 때는, 진보신당과 같이 실천적 능력 크기가 적은 당에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다 완수하기는 당장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점만 지적하겠습니다. <배제 정치학>을 당에 끌여들일 때는, 적어도 당에서,  배제 자체 문제가 아니라, 배제-포함 기준을 놓고 제 2차 논쟁과 토론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제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되고, 그 대안, 포함 inclusion 의 정치적 전략과 실천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럴려면 당 안, 당원들끼리, 정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배제시키지 않는> 당활동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겠습니다. 진보신당 4년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은, 당의 시스템의 결함으로 인해, 1) 직장 당원들의 참여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당에서 배제당하고, 2)  지역에서 모임들에서 소-패권적 행태들 때문에 정작에 필요한 당원들은 탈당하고 3). 지도부와 평당원들 사이,  평당원들 내부 끼리끼리 문화를 통한 지위확보 등 당의 공적 성장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도 보이는 등, 일상적인 미시적인 <배제> 문화가 많았습니다.  당의 활동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고인 물'이 생기고 썪게 마련입니다. 


그럼 <포함>과 <배제>의 어떤 기준들을 가지고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겠습니까? 


그냥 <포함>은 좋은거고 <배제>는 나쁜거고? 그럼 끝입니까? 그렇다면 페이스북에서 like (좋아요) 눌러주고, 카카오톡 대화방 친구 <포함>이면 좋은거고, 아니면 <배제>된 것이고, 이런 기준들은 다 무엇인가요?  





2012.08.25 20:57
홍세화 대표 <배제된 자> 개념 비판적 검토(3) 지젝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원시 조회 수 608 댓글 0

우선 이 문제를 지적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좌파라고 하면서 1987년 민주화체제와 1997년 (혹은 2008년 금융자본 위기) 이후 진보주의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홍세화 대표 프레시안 글도 대표적인 이분법), 이것은 정치적인 오류입니다. 우리가 자유주의자(민주당: 통진당내부 liberalist 리버벌리스트)와의 구별을 하기 위해서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특성, 즉 정치적 자유주의를 넘어서자, 그리고 김대중과 민주당표 386들이 다 가져가 버린 그 87년 민주화운동을 초월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포함하는 좌파정치학을 만들어보자. 아니 정체성 구별하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재해석 투쟁입니다. 1980년 광주, 1987년 민주화 운동이 현재 민주당 (김대중-노무현 계승자들 + 학생운동 386세대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좌파가 정치력이 있기 위해서는 87년과 같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치적 폭발성과 휘발성 (MB의 경제정책은 김대중-노무현 노선과 큰 차이가 없지만, 정치-사회-언론에서는 몇 가지 차이가 있음: MBC, KBS, YTN,국민일보 파업 등으로 대표 + 촛불시위의 민주주의 요구 등)은 무시하거나 폄하하거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의 부차적인 악세사리 쯤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배제된 자>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홍세화 대표의 문제의식이나 진보신당에서 좌파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새로운 주체들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해야겠습니다. 따라서 <배제된 자>이 개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이 단어에 국한시켜서도 안됩니다. 

몇 가지 예들만 들어보겠습니다. 새로운 주체들이란, 1980년대 전두환을 타도하자, 1970년대 유신독재 타도하자. 그 항거의 주체들은 누구였습니까? 여론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가장 주축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정당화하겠습니까? 마르크스의 <자본 축적 방식과 공황, 이윤율 저하 경향 TRPF> 이런 틀로 설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지젝처럼 "실체성 없는 주체성, 사회적 존재로 지녀야 할 실체를 박탈당한 주체 (*추상적이서 또다른 설명이 필요하지만)"로 설명하겠습니까?

또다른 새로운 주체들을 봅시다. 지금은 중국 마오쩌뚱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건설 이전에, 중국 혁명과정 (사회주의화)에서 1931~1934년 강서시대는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구추백 이립삼 등이 도시 노동자계급을 혁명주체로 간주하고 도시 진공작전을 쓰고 있었고, 이 소련유학파들이 장악한 상해 지도부 노선이 광조우 등에서 실패하게 됨에 따라서, 그 이후에 마오와 주덕 등이 농촌 근거지, 마오의 고향 창사 같은 곳에서 농민이 주축이 되어 추수폭동(항거)를 일으키면서,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로 '농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운동에서 새로운 주체 형성 문제는 늘 조직노선과 사업 순위의 선차성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들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소련 유학파들처럼 당시 사회주의 조국을 자처하는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만 따를 게 아니라, 외국에서 직수입하지 말고, 스스로 그 해당 사회 제도 법률 사람들 의식을 연구하고 탐구해야겠습니다. 

세번째 사례로, 1968년 서유럽과 북미의 68세대입니다. 실제로 지젝보다 30년 앞서서 <배제> 문제를 다룬 사람이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One Dimensional Man: 1964)입니다.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마르쿠제가 보기에는 전통적인 산업 공장 노동자들은 미국 자본주의 복지제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대중문화에 푹 빠지거나 안주해서, 사회변혁 주체가 더 이상 아니다, 그리고 마르쿠제가 실제 당시 현실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인종주의 차별 반대, 여성권리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학생을 비롯, 사회 주류가 아닌 외부자들 왕따당한 사람들 (outcasts, outsiders=배제된 자), 인종차별을당하는 사람들, 실업자들과 실업 가능성이 높은 불안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 등이었습니다. 이 마르쿠제의 진단과 주장을 두고 많은 논쟁들과 토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씨의 "서브 알턴 sub-altern: 다큐먼트가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 개념을 확장 발전시켜, 인종, 계급, 성, 성적 취향, 인종, 종교 등 문제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서브 알턴"이라고 규정한 라나지트 구하 (Ranajit Guha) 등과 같은 인도를 포함 남아시아 국가들에서 탈-식민화, 탈-제국주의적 운동의 주체들을 찾아보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고 현시점에서도 새로운 주체들을 발굴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을 지젝 등 몇 사람 이야기에 한정시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홍세화 대표의 <선언문>이 자칫 잘못하면, 민주노총은 역사적 임무를 다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실리주의 business unionism"으로 끝났고,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당과 노조 (총연맹)의 정치적 역할 분담이 있는데, "역사적 임무"라는 거창한 용어를 삽임함으로써 오히려 정작에 중요하게 해결할 정당-노조간의 역할분담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고, 한쪽에서는 "왜 우리를 욕하느냐? "로 가거나, 아니면 "순혈주의 대 개량주의"라는 잘못된 이분법으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홍세화 대표가 사용한 <배제된 자> <배제된 노동>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주체 발굴과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고, 지젝 등의 용어로 굳이 한정시킬 필요 없고, 보다 더 역사적으로 또 현재 한국자본주의 축적방식의 변화와 통치방식의 변화 등에 보다 더 창의적으로 우리가 대응하면서 <배제된 자>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어를 만들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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