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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

서울을 바둑판처럼 쪼개다. 동네 지도와 동네 민주화 운동 메모

by 원시 2016. 1. 10.

동네 민주화- 페친이 올려주신 구로 가리봉동 근처 <동네 지도> 기획이다. 이 강의 내용은 모르니까 그에 대한 소감을 쓸 수 없고, 그 가리봉 오거리에 대한 몇 가지 기억들을 쓴다.

 
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2000년 이후 한국에 진보정당이 들어서고 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요구되는 정치적 임무는 늘 나를 앞서고, 난 뒷북을 치다.
 

 

당장 할 수만 있다면, 한반도 모든 땅,물,공기,나무를 1미터 간격으로 잣대로 바둑판처럼 실측해서,사람과 자연,집,빌딩,차,움직이는 것과 정지해 있는 것들의 '권력관계'를 심층적으로 민주화하는 운동을 할텐데.
누군가는 이걸 하고 있을테고 희망이 있을 것이다.
 
서촌,낙골,성미산이건,이름모를 아파트이건 간에. 3D 설계를 하는 공학박사에게 물었다. '바둑판 실측'에 기반한 '동네 민주화 모델 하우스'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 후로 꿈만 커졌다. 그러다가 이명박 쫄장군이 몰고 온 미친 ‘해군’에게 명랑이 아니라 ‘4대강’에서 일격을 당했다. 
 
- 구로 가리봉 5거리. 정말 복잡했다. 한번 들어가면 길을 잃고 헤매고, 제 1공단, 2공단, 3공단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미로였다. 가리봉 5거리는 공단의 중핵이었고, 그 주변을 걷고 집에 오면 콧구멍은 시커멓게 되고 웬지 모르게 무슨 전투를 하고 온 느낌이었다. 그 오후 공단 길의 정적으로 오히려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만, 삼립식품 빵, 코카콜라, 모나미 볼펜 회사는, '아 우리가 쓰던 볼펜을 여기에서 만들다니!' 친근한 위로가 되었다. 
 
- 서울에 온 후로, 정리할 일이 있을 때면, 남대문 시장에서 남산까지 오르곤 했다. 남산 봉수대 아래에서 종로 명동쪽 빌딩 갯수를 세어보곤 했다. 108번뇌의 개수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직감적으로 내린 결론은 ' 저 건물들 주인들은 다 누구인가? 서울은 이미 게임이 끝났다. 저 건물 상가라도 한 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거대한 서울 땅따먹기, 어린시절 하던 그 땅따먹기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 결론. 
 
서울은 프란츠 카프카의 <성> 안 사람들과 <성> 바깥 사람들로 분단되었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주인공 ‘카 K’는 발버둥을 쳐도,  도와준다는 그러나 실제로는 도움이 안되는 조수들도 있어도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성>안의 위계질서가 뚜렷하다. 빌딩,집,땅주인들, 그들의 동무인 국회의원과 법률제정, 그들의 재산증식 게임 심판자를 자처하는 은행들, 법률 집행자 구청 공무원들, 세를 내지 않으면 처벌하는 경찰과 법원, 법이 너무 우아하면, 깡패 용역들의 ‘근육.’  
 
‘서울에서 땅따먹기 게임은 끝났다.’ 그러니까 일 열심히 해서 잘 살거나 무슨 ‘부자’가 되거나 하는 ‘게임’은 끝났다는 이런 결론이었고, 체험상 그랬다. 3월 첫 강의보다 먼저 들어간 곳은 미로같던 좁은 골목 사당동 철거촌이었다.
 
서울 새벽 3월은 추웠다. 산과 동네 골목 어귀에 모닥불을 피웠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보였던 그 사당동 주민 형의 말은 당시로는 조금 충격이었다. “김일성 형님이 내려와도, 이 문제, 해결 안돼” 물론 농담같은 그러나 새벽에 내리는 그 고단한 철거 투쟁의 ‘고백’이었다. 그 문제 해결 중에는 철거용역 깡패와 경찰도 들어있지만, 철거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 내부 갈등도 포함되었다. 사당동은 ‘이동 서울 고등 재판소’였다. 땅,집만 분단된 게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 이미 철거마을 벽에 금이 간처럼 갈래갈래 찢겼다. 그 청년에게는 그게 더 꼴보기 싫은 것이었다.    
 
- 김치나 시루떡을 돌려던 이웃들의 모습을 보다가, 서울에서 이웃아줌마 아저씨들은 이웃에 '(월,전) 세(貰')를 받으러 다니는 것은 아주 촌스러운 나에게는 이국적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세 받는 문화'는 어린시절 내가 정확히 몰라서 그렇지 할아버지 동네에도 있었다.
 
 
소작농부들이 50대 50으로 땅지주와 쌀을 나누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50%의 세(貰)를 지주에게 납부했다. 계약이 정당한 사유재산 보호법이고 그걸 맹신한다면 이런 ‘세(貰 )’가 무슨 문제겠는가? 남는 건 준수 의무이거나 ‘범법자’가 되거나이다. 물론 중간 지대는 있다. 지주나 빌딩 집 소유주의 ‘아량’과 ‘측은지심’에서 우러나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같은.
 
서울은 더 복잡하고 정교했을 뿐이다. 
 
서울은 땅에 ‘세(貰)’를 부치는 할아버지 동네와 다른 점은 땅이나 산과 같은 자연이 아니라 모든 인공물에 다 ‘세’를 부친다는 것이고 가짓 수와 종류가 많다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서울 시민들(토박이 서울사람이 아니라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도 어린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수학을 잘 해야 하고 머리 속과 얼굴 미소에 계산기를 장착해야 한다.
 
하나 둘까지만 셀 줄 아는 ‘원시인’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머리와 얼굴 표정은 늘 복잡하다. 그래야 사니까. 누구 개인 탓이 아니다. 굳이 따져 묻자면 전체 탓이고 ‘민법’ 계약서를 만든 입법자와 집행자들이 문제다.  
 
- 신대방동에 몇 개월 산 적이 있었다. 높은 지대라서 서울 신림동과 관악산쪽이 보이는. 밤이면 네온사인 교회 십자가 바다가 반딧불 같았다. 누가 어느 교회 목사가 악한 마음을 먹고 교인들이 내는 헌금이 교회 부동산 투자금으로 ‘작동’할지 알았겠는가? 도미노 현상일 뿐이다. ‘아 너도 옆에서도 그 옆 사람도 다 그렇게 ’세(貰)‘ 받는데’, 처음에는 개인의 관행으로 그러나 두 사람이 이상이 모여 ‘법’으로 만들고, 그건 사적 재산의 철옹성으로 형태 전환되었다. 교인들의 소박한 십일조 헌금도 서울 땅 위에서는 ‘부동산 투자 자본’으로 부활하게 된다. 이걸 ‘시스템’의 문제라고들 하지 않던가?
 
<동네 지도>는 사실 동네 주민들 마음의 지도이다. 
 
- 정치적 과제 : 서울에 주거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수준높은 '계산적 합리성'이 파편적이고 타인공격 지향적인 무기가 되지 않고, 인간의 심미적 세련됨, 옆에 사는 사람을 내 가족처럼 배려하는 마음씨,  자연과의 공존 능력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제도'와 '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위 프로젝트 목적과 개요:

 

 

서울 서남권(영등포구 대림동,구로구 가리봉동) 지역에서 조선족 동포사회와 지역민과 함께 만드는 지식맵 프로젝트.

외대 임영상 교수님을 주축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만들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재고하며, 지역민과 함께 서울의 명소로 발돋움 하고자 함.

인물, 활동, 상점 등의 자료를 DB로 축적하고,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문화 컨텐츠 개발을 하고자 함.

사람과 생활, 지역이 곧 스토리가 되고, 컨텐츠가 되기에 꾸준하게 자료를 습득 분류 정리 하는 방안을 추진.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동네, 
연인과 추억 만들기
가족과 함께 외식
회사 업무와 비즈니스 미팅
대중국 무역의 전초기지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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