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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박근혜_최순실

박근혜 실세, 김기춘은 누구인가 (1) TK 정권 하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by 원시 2016. 11. 22.

김기춘-우병우-최재경 검사 출신들이 부패정권 박근혜 구원투수로 나섰다. 역사적으로 도의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의 '버티기' 전술을 보면, 김기춘이 지난 40년간 검사직, 검찰총장, 법무장관, KBO 총재, 국회의원을 하면서 쌓은 비법들이 고스란히 다 드러난다. 


김기춘은 이번 박근혜 최순실 부정부패 패밀리 조폭사건으로 정치적으로 수장될 것이다. 최순실과 더불어 차움 병원에서 줄기세포 치료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은 누구인가? 줄기세포보다 더 질긴 이 정치적 생명력은 우리 사회의 어떠한 단면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그게 내 관심사이다.  

 

김기춘이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것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의 총격사망 이후, 문세광을 수사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기춘은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검사였다.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의 입을 열게 했다고 증언했지만, 실제 사건 경과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김기춘이 검찰에 기소된 적이 있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전 법무장관 김기춘은 부산에서 김영삼 후보 (민자당) 선거 운동을 했다.김기춘은 부산 지역 기관단체 공직자들 (교육감, 시장, 검사, 안기부 직원)을 모아놓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고 발언하면서, 당시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과 정주영(국민당)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대구 경북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자 등을 논의했다.


이게 소위 '초원 복집' 도청 사건이다. 국민당 관계자들이 김기춘 '초원 복집' 회동을 도청해서 언론에 공개버렸다.


김기춘은 선거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1년 구형을 받았지만, 김기춘은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걸었고, 이후 김기춘의 선거운동은 위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1. 생존 욕구가 강했다. 


김기춘은 인척의 연계로 선이 닿아 노태우 정권 하에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거제 출신 경남고->서울대 법대 졸업이었던 김기춘에게는 대구 (TK) 헤게모니는 늘 어떤 정신적 그늘 (열등의식과 성공의 장애물)이었는지 모른다.


부산 초원 복집에서 김기춘의 말을 분석해보면, 대구 TK 에 대한 강한 경계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그 전술을 지시했다.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부산 경남에서 김영삼 표를 갉아먹지 못하도록 아주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


3. 비리와 부정 부패에 익숙해진 전근대적인 관료의 전형이었다.


장관하면 돈봉투가 쏟아진다, 그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기춘이었다. 


4. 자기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법률 조항을 따져, 헌법재판소까지 이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5.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한국야구 KBO 총재에 취임하는 뻔뻔함을 보여줬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면 염치도 없이 끝까지 자기 지위를 확보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1992년 12.22 한겨레 신문. 김기춘이 검찰에 소환되었다.





1992년 12월 16일자 신문. 대선 직전에 터진 대형 사건이었다.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는 대구 경북에 가서는 "우리가 남이가 !"를 외치고,

그의 경남고 후배 김기춘은 부산에 모여서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고 했다.






1993년 4월 14일.


공안 1부 조준응 부장 검사는 불구속기소된 김기춘 (54세)에 대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 죄"를 적용해 징역 1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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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28일, 김기춘에 대한 공소가 취하되었다. 7월 헌법재판소는 김기춘에게 적용된 대통령 선거법 제 36조 1항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을 위헌 결정내렸다.


이에 따라  불구속기소된 김기춘에 대해서 공소가 취하되었다.





김기춘은 어떤 사람인가? 김기춘의 '공직관"


"장관이라는 자리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1993년 12월 15일자.


김기춘은 대통령 선거 1년 후, 변호사를 개업하려고 했다.



1995년 2월 9일자.


김기춘은 한국야구위원회 KBO  8대 총재로 취임한다.

낙하산 인사였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들은 KBO 총재 직에 군인들, 안기부장, 김기춘과 같은 정권 부역자들을 앉혔다.





김기춘의 발언을 들어보면, 한국 보수 엘리트의 가치관과 정치관을 잘 알 수 있다.





(부산 국세청 세수의 4분의 1도 안되는 대구가, 단합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는 김기춘,

신라시대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관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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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산) 는 멸시받는다"는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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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감정을 불러일으키자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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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놈들은 쓸개가 없는 놈들이라는 말을 써가면서 부산의 단결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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