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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

1989년 조국과 2019년 조국의 차이, 조국은 이제 ‘지배계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by 원시 2019. 9. 14.

1989년 1월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는 멋있었다. 방금 우연히 본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니, 당시 법학도는 시원한 가을 바람이다. 2019년 9월 추석, 조국 5촌 조카 공항 체포 뉴스가, 한겨레 신문을 제외한 모든 언론의 1면 기사다. 비린 바람이다. 1989년 조국과 2019년 조국의 차이, 조국은 이제 ‘지배계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뭔가 후퇴한 느낌이다.



조국의 친구, 선배, 후배, 옹호자들은 ‘조국이 사회주의이자 자유주의자요’라고 외쳤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개념적으로 따지면, 조국이 그날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말한 내용은 자본주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체제로서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소유권 체계 안에서 사회복지 정책을 추구하는 정책을 의미했다. 개념상으로는 두루뭉술이다.



20대도, 시민들은 ‘지배계급의 횡포 (건물주, 삼성 재벌, 갑질 교수, 언론사 사주 등)’에 치를 떨고 있는데, 법학자 조국은 ‘지배계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위법’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가 89년 즈음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법실증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풍경이다.



‘자본주의 시장법 위반’ ‘횡령죄’ ‘문서위조죄’ 그리고 윤석열 등은 우선 옆으로 치우자.먹고살기 급급한 로스쿨로 다들 바빠서 그런가? 이번 조국 논란에 법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조금 애달프기도 하다.



1989년 1월 그 겨울을 보자. 1989년 1월 창립한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는 보수학문의 마지막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2019년도 여전히 그렇다) 법학분야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참여자 이름들도 정겹다. 어디선가 들은 사람들도 있다. 강경선, 이창호, 김도균, 곽노현 등 30명 법학연구자.


이들이 지배자들의 도구로 전락한 법을 이렇게 진단했다. "전통적인 법학, ‘체제법학’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권력기반을 뒷받침하는 법논리적 정당화 작업을 수행했다. (이로써) 법이 지배계급의 도구임을 은폐하고 민중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해왔다."



일상 통념, 독재에 빌붙고 민중을 탄압하는 검사,판사,변호사,고시 교과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반성문'이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법(학) 현실을 ‘해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변혁’하는 데까지 나가자고 선언했다. 시원하다.



이러한 진보적 연구자 모임과 실천에 대해서, 국순옥 (인하대) 교수는 “기존 해석법학, 실증법학이 법현상과 사회 현상 사이의 내면적 연관관계를 무시하는 반면, (진보 법학자) 이들은 사회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법해석과 사회적 실천을 연결하고자 한다. 이런 격려를 했다.



<민주법학> 창간호 제목이다. 국가보안법, 집시법, 노동관계법, 정경구조 개편법 (한국은행법과 사내 근로복지기금법안), 지방자치제법, 남북교류관계법.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1989년 당시 진보적 법학자들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 박사도 아닌 석사 논문도 소개했다.


리투아니아 태생 에브게니 파슈카니스 (법에 대한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도 눈에 보인다. 참신한 조국 교수도 보인다.



파슈카니스 법이론의 비판적 연구 (김도균 86년 석사논문)

소비에트 형법이론의 변천과정 (조국 89년)

80년 개정노동법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그 기본성격 (강성태 89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더 비참하다.


조국 교수는 친일파 김앤장 로펌을 비난하고, 그의 가족 정경심 교수는 14명의 변호사를 선임하고 있는데, 그 중 김앤장 로펌 출신 이인걸 변호사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20대만 불만인가? 지금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배 계급’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고, 그 실체를 알지만, ‘개념’으로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단일한 실천을 위한 명증한 이론도 필요하다. 최순실-박근혜를 몰아낼 때처럼.


1989년 조국을 포함한 진보 법학자들은 물어 따졌다. ‘이 땅의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체계의 이론적 토대는 무엇이냐고?’



비참하다. 2019년 조국 교수가 묻지 않아서.


캐나다 연금기금 (CPP)은 소위 분산 투자를 잘 해서, 그리고 사모펀드 (PE) 비중도 20%를 넘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런데 비판자들이 말한다.



캐나다 노동자들의 연금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사모펀드에 투자하면 되겠느냐고? 노동자가 노동자의 일상을 파괴하는 그 모순을 캐나다 연금 공단이 책임질 수 없다고 비판하는 캐나다 사람들도 있다.



물론 조국 교수의 사모펀드는 브라운 필드가 아닌 그린필드(생산적 투자)이지 않냐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조국 교수는 반노동자적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사모펀드와 그 역사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윤석열은 현행 법 위반, 자본시장법 위반만 따지면 된다. 윤석열이 진보적인 법학자이고, 민중주의자이고 사회주의라고 한 적이 있는가? 윤은 공무원이고, 조국 교수는 사상가이자 청년들의 멘토였다.



진보임을 자처하는 우리가 비참하다.


2019년 시원한 바람을 가져올 법학자, 법률가들은 없는가?


2019년 한국의 로스쿨이 빌딩주인, 헤지펀드, 재벌 자본, 떡검사 등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권력기반을 뒷받침하는 법논리적 정당화 작업을 수행했다. (이로써) 김앤장과 같은 로펌이 지배계급의 도구임을 은폐하고 민중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해왔다. 이런 진단을 내리고, 시민의 권리와 노동자의 자유를 위한 법을 만들 수 없는가?


지금봐도, 이론적으로 세련되지 못해 보이는 저 1989년 1월의 <민주 법학> 깃발이 시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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