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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실패한 자본주의 대안은 무엇인가? J B 포스터, 칼 폴라니 '이중운동'의 한계, 그리고 대안은 직접 참여를 통한 실질적 평등, 공동체 연대, 생태적 지속가능성

by 원시 2020. 5. 10.
[ 존 벨라미 포스터의 핵심 주장 요약 ] 깨끗한 공기와 물, 영양가 있는 음식, 옷, 주거, 교육, 건강, 교통 통신이라는 기본적인 ‘인간 필요’에 대한 민주적 통제, 즉 노동자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이야말로 실질적인 평등, 공동체의 연대, 생태적 지속가능성이라는 세가지 가치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이다. 

[원시 독후감과 이론/실천적 과제들

(1) 존 벨라미 포스터의 '혁신 사회주의' '생태 사회주의'의 새로운 주체들이, 불균등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국제정치 조건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력을 보여줄 것인가? 이에 대한 탐색이 절실하다.

(2) 다시 정치(학)의 문제로. 발달된 생산력과 '사회관계'의 모순(상응 ,조응 실패)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내용 역시 설명이 더 필요하다. 예를들면 중국의 발달된 생산력과 '사회관계'의 모순 틀에서, 중국 공산당의 권력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고, 인민의 직접 민주주의 실현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등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3) 한국의 경우도, 사실 생태 사회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현존 산업구성, 자본축적 방식들을 바꿔야 하는데, 그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가, 리버럴 국가와 고용노동자들도 '자본주의 성장론'에서 갇혀있는 정치적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


아래 노트 순서

 [1] 존 벨라미 포스터가 부자 나라 좌파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자본주의 실패에 대한 비판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 존 벨라미는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제출된 칼 폴라니의 ‘이중운동 double movement’의 한계 지적. 

[3] 리버럴 민주당의  ‘공정’ 강조의 실패, 그 한계 이유. 

한국 자본주의 체제와 소유권,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고치지 않고 ‘공정, 공정, 정의, 정의’만을 남발하다가 기득권의 포로가 된 한국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의 특질

[4] 인간과 자연을 모두 파괴하는 자본주의 성장의 한계점 (요약) 
– 기후 위기 시대에 새로운 사회관계가 필요하다. 과거 오류를 극복하는 ‘혁신 사회주의’가 지향해야 세가지 가치들, 이념들은,   “실질적인 평등, 공동체의 연대, 생태적 지속가능성”이다. 


요약과 노트 - 

출처:

자본주의는 실패했다. 그럼 다음은? - 존 벨라미 포스터 
Capitalism Has Failed—What Next? (2019.Feb 1.) by John Bellamy Foster



 [1] 존 벨라미 포스터의 지적: 부자 나라에 사는 좌파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자본주의 실패에 대한 비판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포스터는 1994년에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진단이 25년이 흐른 후에 현실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당시 홉스봄은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자본주의 시장의 무제한 이윤추구와 무한 경쟁이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지구의 자연까지 다 파괴해버렸다”고 진단했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보면 1989년 몰타 회담 이후, 한국의 경우 1997년 IMF 신자유주의 철권 통치,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금융 공황 시기까지, 사회주의는 패배자, 자본주의는 승리자처럼 보였다.  

대학과 미디어는 이러한 유행을 따르는 첨병이기도 하다. 아직도 주변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대학과 미디어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유행과 흐름은 변화한다. 에릭 홉스봄이 지난 25년간 무덤에 묻혀있다가 부활하고 있다는 게 포스터의 기본적인 시대진단이다.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와 서구 사회복지국가의 실패를 주장하고 승리자를 만끽한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침체, 금융화, 불평등 심화, 환경오염 악화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존 벨라미 포스터의 주장이다.

[2] 존 벨라미는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제출된 칼 폴라니의 ‘이중운동 double movement’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부자 나라 좌파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언급하곤 했던 것이 칼 폴라니의 이중운동, 방어운동 개념이다. 

폴라니의 이중운동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번째는 사회적 규범과 규칙들 속에 뿌리내린 자본주의 시장이 자립화해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운동이다. 여기서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시장 사회라는 신화가 발생하고,이 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 원시 보충 설명: 폴라니가 쓴 self-regulating, self-adjusting market 이란, 시장이 스스로 마치 정치영역처럼 시장의 입법, 행정, 사법을 다 관장하면서,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지닌 자본주의 시장을 뜻한다. 시장 바깥 외부의 어떤 것의 도움이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 완결성과 자기 충족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의미함.)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피해자들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과 자연환경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와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적 운동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 

존 벨라미는 이러한 칼 폴라니의 이중운동 개념 등장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이중운동’ 개념으로 인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다시 ‘ 약자에게 좀 더 기회를 주는 리버럴리즘 (A more affirmative-style liberalism)’ 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다시말해 우측으로 갔다가 다시 좌측으로 돌아오는 ‘진자 (pendulum: 한 의견이 다른 의견으로 급변하는 것을 의미)’ 운동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자 운동에 대한 믿음에 따르면,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실패가 새로운 케인지주의로, 즉 (국가에 의해) 통제된 자본주의로 복귀함으로써, 그 자본주의 부작용이 최소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수도 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러한 믿음이란, 즉 역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믿음이라고 비판한다. 어떤 측면에서 과거 성공이 다시 반복되길 바라는, 결과적으로 구습과 관례를 따르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칼 폴라니의 ‘이중 운동’에 너무 많이 희망을 걸게 되면, 다음 4가지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고 존 벨라미 포스터는 지적한다.

[a] 사회민주주의 (서구 사회복지국가가 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형성된 정치적 경제적 배경)의조건은 다음과 같다.  현실 사회주의자 사회의 위협이 실제 있었고, 노조의 권력이 강력했을 때 사민주의가 발생했고 지속되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쇠락하게 되면 사민주의도 곧바로 사라지게 된다.

[b] 1945년~1975년 30년간 황금기를 구가한 사회복지국가와 그 이론적 정당화였던 케인지주의의 물적 토대는 산업자본의 지배적 시기였는데, 그것이 변화하고 있다. 독점-금융 자본 국면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고정되었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된 초창기 산업자본 지배 시대는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c] 사민주의는 제국주의 체제에 의존했고, 거기에 기대어 실천적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런 제국주의 체제는 인류의 대다수 이해관계와 상충한다.

[d] 노동(계급)과 사회적 협약에 기꺼이 참여하는 리버럴 민주주의와 (자기들이 주장하기로는) 계몽 산업-자본가 계급의 지배는 이제 과거 유물이 되었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러한 조건에서 권력을 획득한 경우, (이러한 체제 안에서 정치를 하겠다다고 약속하고), 더 친절하고 더 부드러운 자본주의를 창출하려고 할 때, 이 정당들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작동 법칙들의 먹이가 된다.

[3] 한국 자본주의 체제와 소유권,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고치지 않고 ‘공정, 공정, 정의, 정의’만을 남발하다가 기득권의 포로가 된 한국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의 특질에 대한 설명.


마이클 예이츠(Michael Yates)가 말한 대로, 실패한 자본주의 맥락에서, “오늘날 심지어 온건한 정치 경제적 프로젝트, 즉 노조와 정치 정당들이 서로 포용하고 결실을 맺도록 조력하는 그런 프로젝트의 회복,재건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출처: Michael D. Yates, Can the Working Class Change the World?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18), 134.)

존 벨라미 포스터의 흥미로운, 교훈적인 지적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진보’라고 자기를 지칭하는 민주당 리버럴 좌파와 문파 세력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리버럴-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광의의 기술적-근대화 접근을 채택한 반면 사회적 관계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암묵적인 기술 결정주의 안에서, 디지털 기술, 사회 엔지니어링, 현명하고 여우같은 영리한 리버럴 경영관리가 권력을 거머쥘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러한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적 전제주의는 항구적인 재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당장 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아마도 위로부터 수정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기술적 명령에 순응하면서, 자본 이윤과 축적을 잠시 옆으로 제쳐두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상 안에서, 무엇이 이 체제에 남을 것인가? 어느 계급 혹은 소유 욕망이 결여된 채, 오직 효율성이라는 엔진만 장착한 자본주의 시장과 기업의 벌거벗은 프레임만이 남을 것이다. 


[4] 인간과 자연을 모두 파괴하는 자본주의 성장의 한계점 (요약) – 기후 위기 시대에 새로운 사회관계가 필요하다. 
과거 오류를 극복하는 ‘혁신 사회주의’가 지향해야 세가지 가치들, 이념들은,   “실질적인 평등, 공동체의 연대, 생태적 지속가능성”이다. 


생태 파괴 시대, 생산력의 발달과 사회적 관계 발달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 과거 80년대 표현대로 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부조응의 시대가 도래했다. 

요그겐 란더스, “성장의 한계 Limits to Growth” 에서 지적한 것보다, 현재 2020년 상태가 더 심각하다. 역사의 실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시각이 중요하다. 투쟁만이 역사를 진전시키고, 역사의 불연속적 캐릭터를 보장한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이 세계를 과거와는 다르게 만들면서, 안에서 폭발하는 내파, 바깥에서 폭발하는 외파가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인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창출해 내지 못한 사회체제는 많았다.  
 
사람들이 발달하는 생산력을 합리적으로 지속가능하게 사용하려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창조해내는데 실패하고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

보수적 역사가, 야콥 부크하르트 (Jacob Burckhardt)가 말한대로, 역사적 과정의 가속화가 발생한다. 여러 세기를 통해 이룩한 발달이 이제 몇 달 만에 몇 주 만에 유령처럼 나타나고, 그렇게 현실이 된다.

21세기에도 혁명이 가능할까? 잘 사는 나라 기득권 세계 정치평론가들은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러나 주변부에서는 혁명적 저항이 터져 나온다. 이를 진압하는 세력은 제국주의 군대 경제 정치다. 현재 실패한 자본주의가 모든 문명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기후 변화, 기후 위기를 그 예로 들었다. 이번 21세기 기온이 4도 올랐다. 산업시대 이전과 비교했을 때, 심지어 6도나 올랐다.  현재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직접적인 혜택을 위해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전체 순 사회적 잉여를 착취한다.

존 벨라미 포스터와 마이클 예이츠는 ‘그래도 사회주의 이상과 이념을 포기하지 말고,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에 사회주의를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마이클 예이츠 말을 인용해, 인간 보편적 ‘자유’를 향한 새로운 투쟁과 사회주의의 혁신을 주장한다. 

“노동자 계급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마이클 예이츠 책에서,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대중들(인민,시민,민중)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향해 통일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그런 사회주의를 만들자고 한 게 실패했지 않은가? 그런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러한 회의적 시각과 패배주의적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포스터와 예이츠는 역사에서 배우자고 주장한다. 중세 후기에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에 대한 최초 시도가 중세 봉건제에 가로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과거 사회주의도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위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구시대 이념과 제도인 ‘봉건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를 시도했듯이, 사회주의 역시 앞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과거 실패를 교훈삼아 온고지신(溫故知新) 해서, 더 새롭고, 더 혁명적이고, 더 보편적인 형태의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사회주의라는 이상과 이념은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보다 잇점과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이념과 이상의 추진력은 실질적 평등과 지속가능한 인간(존엄) 발달에 뿌리내린 ‘보편적 자유’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보수파 경제학자 조제프 슘페터가 한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사회주의 정부와 연대해 일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좌우파 온갖 사람들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는 쇠퇴할 것이다. 경제적 실패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성공 때문에 쇠퇴할 것이다. 자본주의 성공은 좁다란 경제적 목표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 생존에 필요한 사회학적 토대들을 침식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슘페터는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생존할 수 없는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결국 자본주의의 후계자로서 사회주의가 등장할 것이다”라고 했다. 

21세기 자본주의 시장은 독점적 경쟁, 극단적인 불평등, 제도화된 탐욕을 스스로 고쳐나갈 수 없고, 오히려 인간 삶의 토대를 파괴할 것이다.

자본주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실질적인 평등, 공동체의 연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깨끗한 공기와 물, 영양가 있는 음식, 옷, 주거, 교육, 건강, 교통 통신이라는 기본적인 ‘인간 필요’에 대한 민주적 통제, 즉 노동자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실패했다. 그럼 다음은? - 존 벨라미 포스터 

Capitalism Has Failed—What Next? (2019.Feb 1.) by John Bellamy F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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