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를 꿈꾸던 테크노크라트 케인지안 "정운찬과 이명박과의 아름다운 만남? "

정책비교 2015. 1. 2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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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를 꿈꾸던 테크노-케인지안 "정운찬과 MB의 아름다운 매치"

 

 

원시  : 2010.08.11 20:51

 

 

 

지금 신문을 보는데, 정운찬 총리가 퇴임식을 하면서, 이명박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노태우 정권에 자기 스승인 조순이 국무총리에 입각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해놓고서는, 또 그 제자가 그 선생따라, 그 선생 나이가 되어서, 또 똑같이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 하에서 총리로 입각을 했다가 이제 아름다운 (?) 퇴장을 했다.

 

 

조순과 정운찬 전 총리가 대학에서 소위 케인지안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케인지안들 (좌파 케인지안이건, 우파 케인지안이건)은 서구 유럽국가들과 미국,캐나다에서 사회복지를 외친다. 실제로 조순도 그랬고, 정운찬도 그랬다. 아마 지금도 물어보면, 정부가 (자본주의)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할 것이다. 또한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 서민들 복지혜택을 줘야 한다고 주창할 것이다.

 

 

근데 문제는, 조순이나 정운찬등은 케인지안 좌파나 우파나 그런 개념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닐 브래드포드 (Neil Bradford)가 말한대로 조순-정운찬 등은 1930년대 캐나다 '테크노크라틱 케인지안'에 가깝다. 이 기술관료 케인지안(technocratic Keynesian) 개념은 노동자들이나, 진보적인 지식인들, 농민들,노조나 시민단체들이 행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공공정책들을 수립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회적 케인지안 social Keynesian"과는 전혀 다르다.

 

 

기술관료적 케인지안들은, 자본주의의 결함들을 고치고 수정하기 보다는, 경제행위에 필요한 정보향상과 공적/사적인 영영에서 정책결정자들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균형(equilibrium)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기술관료적 케인지안들은, 조순-정운찬의 실제 정치 행보처럼, "정치 가치로부터 중립적인" 대학교수나 전문가가 (노동자, 시민, 농민, 진보적인 정치활동가들이 아니라) 공공정책이나 국가 경제 정책들을 수립함으로써,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조순-정운찬 연구가가 아니므로, 왜 그들이 "기술관료적인 케인지안"이면서 동시에 보수정당인 한나라당과, 자본주의 사장들의 친형 노릇을 하는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들어갔는지, 그 심리적 배경은 모르지만, 그들의 "기술관료적인 케인지안"이라는 정치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는, 전혀 낯설지는 않다. 사회복지를 꿈꾸기는 하는 테크노크라트-케인지안 정운찬과 자본주의 사장들의 친형 MB와의 아름다운 조화는, 이렇게 시큰둥한 결말로 끝이 났다.

 

 

사회복지를 꿈꾼다. 한국에서 진보정당과 좌파정당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사회복지제도들을 실제로 만들어왔던 유럽국가들이나 캐나다 호주 등에서 "테크노크라트 케인지안"과 소위 "사회적 케인지안"들의 대립,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좌파들, 사회당, 공산당과 "자본주의적 사회복지 제도"를 주창하는 자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누가, 어떻게, 왜 ?사회복지를 외치고 만드는가? 그 답변을 내리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테크노크라트-케인지안 정운찬 총리의 아름다운 파산선고가 우리에게 주는 정치적 메시지이다.

 

 

 

 

Bradford, Neil. "The Policy Influence of Economic Ideas. Restructuring and Resistance; Canadian Public Policy in an Age of Global Capitalism. Ed. Mike Burke, Colin Moores, and John Shields. Fernwood Publishing. Halifax. 2000. 5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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