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history)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by 원시 2021. 2. 17.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1.     1979년 YWCA 위장 결혼 집회 사건.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