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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슬럼프] 핵심 주제들과 시사적 의미: 옮긴이 해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7.


[글로벌 슬럼프] 옮긴이 NJ 해제



1. 고통의 세계화에서 저항의 세계화로


“돈(황금)은 도둑에게도 귀족 작위를 부여한다” - 세익스피어


2011 년 10월 15일, 전 세계의 시민들은 “탐욕의 금융 자본”에 회초리를 들었다. 서울, 아테네, 뉴욕 릴레이 시위는 24시간 이어졌다. 자본만 세계화된 것이 아니라, 이제 저항이 세계화되었다. 서울은 먹튀자본 론스타를 꾸짖었다. 아테네는 국제통화기금(IMF) 긴축정책을 반대했다. 뉴욕은 탐욕의 금융자본에 혈세인 구제금융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각 지역별로, 인종, 성, 나이, 구호는 조금 달랐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돈을 굴려야지, 돈이 사람을 굴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서울에서는 투기자본 반대 시민들과 자본-법-행정 3각 동맹이 맞섰다. 납세 시민들이 외환은행 매각 차액으로 4조 4059억원을 챙겨 튀려는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의 뒷덜미를 잡았다.


‘돈 (황금)은 반칙(플레이)를 공정한 것으로 둔갑시켜준다.’ ‘돈은 도둑에게도 귀족 작위를 부여하고 승인해준다’고 세익스피어는 썼다. 16세기 그의 희곡이 21세기 한국의 서울이라는 무대에서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론 스타는 산업자본이기 때문에 외환은행의 최대주주가 될 수 없는데도, 법률회사 김앤장은 론스타의 반칙들을 합법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둔갑시키고, 금융위원회 관료들은 서울시 1년 사회복지 예산 4조 4000억원보다 더 많은 돈을 싸들고 나가는 론스타 도둑에게 귀족 작위를 승인해준다. 그런데 제 4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투기자본 론스타, 법률자문 김앤장, 그리고 행정보조 금융위원회의 3각 동맹을 비판하는 공공 금융 파수꾼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시민들과 외환은행 노조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이제 그 도둑 귀족 작위식 무대 위를 점령한 것이다. 2004년부터 투기자본감시센터, 외환은행 노조, 진보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이 이 구린내나는 삼각동맹의 실체를 밝혀왔다.그 결과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80%가 넘는 한국시민들이 이 삼각동맹이 저질러 온 공공 도둑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고요한 폭력(이 책 195쪽)’에 한국의 풀뿌리 민중들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97년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긴축정책을 굴욕적으로 수용했다. 그 후 지난 14년간 한국의 시민사회는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자본주의 공화국 길을 선택했다. 일상은 시민내전이나 다름없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사람들은 자기 재산의 가치가 국제 자본주의 시장에서 하루 아침에 50%가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원화 가치의 폭락으로 어제의 1만원이 오늘 5천원 지폐로 폄하되었다. 이러한 상실감은 ‘세상에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배금주의로 변질되었다.


유치원 아이부터 80세 노인까지, 대박터지는 게 ‘쿨’한 것이고 행복의 전부였다. 자본주의의 고요한 폭력에 다 굴종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런 대박을 향해 질주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243쪽)’들이, 나도 대박을 터뜨리는 1%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의 궤도에서 멈춰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2011년 10월 15일의 정치적 의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궤도에서 일시 정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월 스트리트를 장악하라’는 제 2의 68운동으로 발전할 것인가? 한국의 김진숙 희망버스는 이러한 거대한 반자본주의 물결 속에 전 세계의 시민들에게까지 그 희망을 전달 것인가? 아니면 단절적이고 파편적인 시위들로 끝나버려 새로운 복고와 반동의 목소리가 그 광장을 다시 차지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한국의 진보좌파들이 답하는데, 데이비드 맥날리의 [글로벌 슬럼프]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생산적인 시사점들을 던져준다.


2. [글로벌 슬럼프] 핵심 주제들과 정치적 시사점


첫 번째, [글로벌 슬럼프]는 자본의 탐욕의 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주체들에 대한 탐구이다. [글로벌 슬럼프]의 6장과 결론에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의 헤게모니와 그에 결탁한 국내 동맹세력에 대항하는 피억압 민중들(하위주체 subaltern)의 실천과 저항, 그 특질들을 소개해 준다. 구체적인 사례들로서는 볼리비아 코차밤바 주민들의 물 수호 투쟁, 멕시코의 오하아카 교사들과 주민들의 연대 등이다. 또한 미국 내 이주 노동자들이 부당한 착취, 해고와 인종차별 문제를 어떻게 동시에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시카고에서 전기 노동자 연합(UE) 소속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사례,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건물 관리 노동자와 청소노동자들이 속한 서비스노조(SEIU)의 창의적인 대 주민연대 활동을 소개한다. 현재 트로이카 (국제통화기금 IMF, 유럽연합 EU, 유럽 중앙 은행 ECB)의 구제금융의 댓가로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요구받고 그리스는 폭풍 전야에 있다. 그 긴축정책에 저항하는 그리스의 급진좌파 연대(시리자: SYRIZA), 그리고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의 대중적 성공의 원인을 사회주의, 여성운동, 인종차별 반대, 그리고 노동운동들을 하나로 혼융해 내려는 시도에서 찾는다. (283쪽)


이 것이 한국의 진보 진영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성과에 기초해 진보정당이 출범했다. 그런데 2004년 국회 진출 이후, 오히려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원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한국 자본주의 축적방식의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 그에 근거한 새로운 주체들의 발굴과 연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크다. [글로벌 슬럼프]는 한국 자본주의 특질에서 기인하는 신자유주의적 도시주의(urbanism 197쪽) 시대에, 대도시 서비스 업종 불안정 비정규직 노동자들, 계약직 청년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활동과 조직화에 하나의 시사점을 줄 것이다.





두 번째는, [글로벌 슬럼프]는 한국 언론에 주로 소개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장하준 등 자유주의 케인지안과 다른 각도와 방법론을 가지고, 현재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처방을 내린다. [글로벌 슬럼프]는 2008년 미국 금융위기를 설명할 때, 금융 용어만을 가지고는 그 원인들을 충분히 분석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140쪽). 데이비드 맥날리는 2008년 거대 투자은행들의 연쇄 파산의 제 1차적 원인들은 금융시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 노동자들의 고용과 소득이 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감소하는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7쪽).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부실 문제도, 그 주택융자 상환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든, 즉 주택압류 현상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 노동자들의 실직과 소득감소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미국 은행들의 과도한 대출이 겹쳐져서 발생했다고 본다.


출처: 

http://www.pewsocialtrends.org/2011/07/26/wealth-gaps-rise-to-record-highs-between-whites-blacks-hispanics/


아래 표는 미국 가구당 중위 순가치를 비교한 것이다. 백인, 히스패닉 (남미), 흑인 





아래 그림은 백인과 흑인의 부 크기의 비율, 백인과 히스패닉의 비율을 표시한 것이다. 미국의 부의 차별이 인종 문제와 결합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2009년에는 백인 가구의 중위 부가 흑인에 비해 19배, 히스패닉에 비해 15배 더 많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맥날리는 현재 자본주의 경기침체의 근본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는 자본의 이윤율의 전반적 하락에서 그 답을 찾는다. 따라서 현재 위기의 극복은 단순히 은행의 자기자본비율 (BIS)기준 준수와 같은 금융제도와 법률개선을 통해, 관리감독의 강화를 통해서 이뤄질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작년 G20 회의에서 미국 전 연방준비은행장 알랜 그린스펀과 화상 토론을 했던 장하준과 스티글리치의 자유주의적 케인지안 대안제시, 즉 금융제도의 수리개선과는 분명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냐 (신) 케인주의냐의 선택 논쟁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 위기의 원인 진단과 대안제시를 할 때, [글로벌 슬럼프]는 최소한 다차원적인 방법들을 찾아나가는데 표지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맥날리는 금융위기의 원인은 자본의 과잉 투자에 있고 이윤율의 저하에 있다고 본다. 얼핏보면 그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공황 원인 진단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로버트 브레너의 ‘장기 침체’나 하먼의 ‘공황’ 개념으로는 신자유주의적 팽창을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것 역시 위기의 진단을 둘러싼 하나의 생산적인 논쟁의 촉발점이 될 것이다. 이 주제는 [글로벌 슬럼프] 제 2장의 후주들에 소개되어 있다.




세 번째, 이 책의 3장과 4장은 2차 세계대전이후, 자본주의 위기와 팽창, 금융화 과정에 대한 소역사를 진보좌파적인 시각에서 즉,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지 않고 그 관계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맥날리는 전후 글로벌 자본주의 시기 구분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시기로 나눈다. 지속적인 팽창 시기 (1948~1973), 세계적 경기침체 시기 (1973-1982), 지속적인 팽창 시기 (1982~2007), 그리고 글로벌 슬럼프 (2007~ ?) 시기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데이비드 맥날리는 1982-2007 시기를 ‘장기 침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팽창시기로 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시기의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주목한다. 그 정치적 토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레이건과 대처의 노조 파괴, 자본의 구조조정과 린 생산방식, 해외직접투자로부터 형성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금융 자본, 혹은 금융화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팽창시기 (1982-2007)의 주요한 특징을 이뤘는가? 그리고 2008년 미국 금융위기의 주인공들인 파생 금융상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는가? [글로벌 슬럼프] 제 3장과 4장은 글로벌 자본주의 변화, 성장, 침체의 동학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들어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방법론인데, ‘화폐의 탈-상품화 (152쪽)’라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방법론을 응용해서, 금융화의 심층에 있는 구조적 토대들을 분석했다.



특히 그는 미국의 무역적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발생했던 1972년 전후의 정치경제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금융화의 기폭제가 된 제도적 장치를 브레튼우드 체제 해체와 변동환율제 도입에 있다고 본다. 그 이후 금융자본은 자립화했고, 다시 말해서 금융자본이 전 사회의 고삐로부터 풀려나와 거꾸로 사회질서를 통제할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외환거래시장과 장외시장의 형성과 증폭, 2000년대 이후 파생 금융 상품 시장이 주식과 채권시장보다 10배 이상 더 커지는 단계, 마지막으로 비우량주택융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시장의 문어발식 확장 단계와 파산, 이렇게 크게 네 가지 단계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간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증권화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표. 그리고  2006년 전체 주택공급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형태가 차지하는 비중이 23.5%까지 급증했다)



금융 자본의 자립화, 즉 프랑켄쉬타인 괴물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명에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신용카드 사회로 알려진 미국의 현실이다. 놀랍게도 2007년 위기 이전 미국 가구 20%는 신용등급 문제로 은행계좌가 없었다. 그런데도 은행들은 왜 이렇게 신용등급이 낮은데도 비우량주택융자를 남발했는가, 그리고 그 고객들은 주로 흑인, 라티노에게 맞춰져 있었는가? [글로벌 슬럼프]는 계급과 인종의 변증법 (208쪽)을 가지고 이 질문에 답한다.


네 번째, [글로벌 슬럼프]는 현재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한계 역시 진단하고 있다. 예를들면, 볼리비아 민중들이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모랄레스 정부가 직면한 정치적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볼리비아 민족주의적 좌파들의 선거주의로 경도는 풀뿌리 민중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 공간을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58쪽)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주민들의 공동체주의적 가치들이 좌파들의 실천과 접목되어야 한다고 데이비드 맥날리는 제안한다.



한국의 진보적 시민단체,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도시 공간, 삶의 터전에서 주민연대를 실험하고 실천하는 등과 같은 공동체주의적 가치의 정치화가 필요하다. 물론 아직 시작 단계에 있고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회, 행정이라는 제도적 정치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정치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글로벌 슬럼프]는 몇 가지 정치 실천적 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것은 생활터전에서 급진적 직접 민주주의 실천,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정치실험들의 창조적 역동적 혼융 (271쪽), 과거 노동운동(기억의 복원)과 현재 청년운동의 만남과 교류(309-310쪽), 진보좌파들 사이에서 분파주의의 극복과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에, 노동운동, 여성운동, 인종차별 운동들을 혼합시키는 새로운 능력 (276-277쪽)들이 요청된다. 풀뿌리 민중권력의 제도화 (274쪽)와 반대와 저항의 목소리의 인프라 형성 (241쪽) 또한 필요하다.
 

우리들의 생활 터전, 일터, 놀이터, 그리고 쉼터에서 주민들과의 정치적 연대와 실천이 축적될 때만이, “사회현실 불만족 67.2% 그러나 지지 정당 없다”고 말하는 73.6% 한국 시민들이 진보좌파 정당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될 것이다. (경향신문·현대리서치연구소 조사 결과. 2011년 10월 4일)



3. 자본주의의 고요한 폭력시대에서 삶의 터전의 민주화의 중요성.


생 활 터전에서 자본의 문화적 침투에 대한 대안 제시가 절실히 요청된다. 자본주의적 시장의 특질은 규율과 처벌을 통한 통제(195쪽)이다. 읍내 5일 장터 시장과 같은 교류의 장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통제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활동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같이 몸의 리듬, 기분, 마음, 습관과 취향까지도 통제하고 서열화시킨다.


그 일례로 취향과 관련된 사회 풍속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긴축시대 이후, 소위 선진 금융 기법, 미국-영국식 금융 공학은 낙후된(?) 한국자본주의와 국민들의 마음에 ‘팔자 사자 타이밍’ 게임기를 설치했다. 하이테크닉 머니그리드 게임을 장착한 것이다. (165쪽). 그러나 즐거운 게임이 아니었다. 이미 80%이상의 국민은 자기 재산 가치의 절반싹둑 잘려져 나가버린 상실감과 좌절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보상심리가 목구멍 깊은 곳에, 심장 한 켠에는 울분과 복수의식이 잠복해있다. 더 이상 노동소득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생활철학은 ‘팔자 사자’ ‘이익-손해’ 게임으로 대체되었다.


한국 자본주의 특질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동강도와 속도전으로, 자본의 칼날에 베인 한국인들의 불안함을 잘 통제한다는 데 있다. 이 불안의식과 생존의지는 다시 결합된다. 그러나 이 둘만 가지고는 세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한국인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만사형통약 '선진국, 선진화' 수사학이 다시 등장한다.


‘비합리적인 한국식 금융제도의 관행을 미국-영국식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해서’ 더 스마트한 한국 펀드 시민들로 거듭나라는 명령이 들려온다. 노동소득이 아닌 부동산과 연계된 복잡하고 신기한 금융상품들을 분석할 금융맨이 필요해졌다. 그들이 왔다. 금융맨들이 애널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뉴욕, 홍콩, 네덜란드로부터 상륙했다. 그리고 지적 미학적 요소를 갖춘 미녀 아나운서들의 가계부 기사 작위를 승인받았다. 70년대 표준 신랑감 건설맨 전자맨은 이제 좀 촌스럽다는 것이다. 돈이 반칙 플레이를 공정게임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아내와 남편의 얼굴까지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 러나 이러한 금융맨 백기사의 구원의 손길은 너무 짧았다. 닿지 않는 곳이 더 많다. 부동산 파이낸스 프로젝트 부실 채권 등으로 인한 부산상호저축은행은 영업정지 되었다. 피해자들 중에서 한 중년 아주머니의 말은 우리의 돈의 미래를 알려준다. “내 피같은 돈이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지 아느냐? 평생 안 입고 안 쓰고 일해서 번 돈이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금융 공황은 선진기법, 수리금융, 금융공학, 퀀트 등으로 상징되는 금융 자본의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신뢰를 하루에 1천 번 외치는 은행의 무한신뢰는 무한 무책임으로, 친절한 신용대출과 금융상품은 가혹한 주택압류의 칼날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이 경제공황의 시대에 예언자들을 찾고, 어떤 사람들은 금융, 부동산, 펀드 예언자를 자처한다.그들은 해운대 모래사장 위에 나만의 ‘아방궁’을 건설하라고 컨설팅한다. 그러나 정보전쟁과 수치 확보 전투를 거쳐 건설한 금융 재테크 전략은 제로섬 게임으로 끝나고 말거나 사상누각에 그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돈, 이제 이 돈이 가지고 있는 사회성, 공동체적 속성을 부활시키지 않고서는 현재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 돈이 사람을 굴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기 필요와 자아 실현을 위해 돈을 굴려야 한다. 돈이 공동체와 인관관계로부터 분리되어, 거꾸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돈이란 사람, 자원, 생산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공동체의 미래 저수지, 그리고 자본의 이윤 증식이 아니라, 공적 행복 실현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내 금고의 돈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 돈은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의 “피 같은 돈”인 경우가 많다. 그 돈은 종이 구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관계이다. 은행의 돈, 국가 예산, 기업의 수익금 모두 그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노동이라는 실개천에서 발생한 “노동의 피”가 모이고 모인 공적인 저수지인 것이다. 이 공적인 저수지의 물은 누가 어떻게 관리해야 하고, 누구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가?


진 보 정치는 일하는 사람들을 그 공동 저수지 물의 소비자나 박수부대쯤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노동강도가 높은 한국 자본주의의 규율과 처벌 체제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사람들의 상처를 정치적으로 치유하고, 그들이 정치 참여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정치는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철 한 때 인기몰이 바람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순서가 뒤바뀌었다. 일터, 생활터, 휴식터, 놀이터에서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 입소문이 모이고 모여 태풍이 되는 게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 좌파의 실천에는 시지푸스의 운명이 지워져 있다. 그것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성 정치인 박수부대나 응원부대로만 남는 게 아니라, 정치참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하는 숙명이다.


데이비드 맥날리의 [글로벌 슬럼프]가 이러한 우리의 과제들을 이야기하는데 한 좋은 말벗이 되길 바란다.



2011년 10월 19일, 토론토에서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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