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스마폰 시대, 잡지와 동인지의 부활 가능성.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 물] 창간한 한창기 선생 이야기.


49년 전통, 한때 50만부를 자랑하던 월간 <샘터>가 폐간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든 생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 인쇄 매체의 퇴조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두번째는 신기술과 신세대에 맞게 잡지나 동인지는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다 ‘작가’가 될 수 있는 스마폰 시대에 맞는 ‘소통, 매체’를 만들면 된다.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잡지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


잠시 70년대 ‘잡지가 이럴 수도 있구나’를 보여준 것이 [뿌리깊은나무]였다고 한다. 강만준 교수의평가에 따르면, 한국 잡지사는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그 이후로 양분될 수 있다고 한다.


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뿌리깊은나무]를 폐간시키기 전까지 ‘가로쓰기’를 처음 했고, 필진들도 다양했던 [뿌리깊은나무]는 21세기에도 폰과 앱 기술을 만나 새로운 매체로 진화될 수도 있다. 이건 실천의 문제이니 앞으로 하면 될 것 같다.


몇 해전 부친과 대화를 하다, 한창기 선생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전쟁 휴전회담 중, 아버지는 순천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3학년이었던 한창기 선생과 하숙방에 같이 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그 한창기에게 자기 장남을 맡긴 것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가난하여 자기 어머니인 청주 한씨 친정 벌교 고읍리에서 일을 한 경험 덕분으로, 그 곳 한씨 일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창기 선생을 비롯, 한씨 일가는 자녀들을 순천중고등학교로 보냈다. 자기 장남 교육열이 높았던 조부는 모든 입시정보를 삼사십리 떨어진 벌교읍 고읍리 한씨 일가로부터 얻었던 것이다.


당시 중학 입학을 위해서는 초등 6학년들이 ‘지능고사’를 치렀다고 한다. 500문제를 푸는데 200개 를 맞추고 200개를 틀리면 0점이 되는, 즉 ‘감점제도’가 있는 가혹한 시험제도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창기 선생이 순천중을 졸업하고 광주고등학교로 입학하기 전까지 같은 하숙방에서 살면서 ‘창기 형님의 지도하에 공부를 했다.’ 부친은 초저녁 잠이 많아 졸다가 한창기 형에게 꾸지람도 듣기도 했다. ‘창기 형이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를 했냐면, 천정에 솜방이를 매달아 놓고 거기에다 바늘을 꽂아서 머리까지 오게 한 후, 졸면 이마가 바늘에 닿게끔 그런 장치를 해놓고 공부를 했다’


한창기 선생은 순천고로 진학하지 않고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벌교읍 고읍리 한씨 일가들은 한창기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고 했다. 대학시절 영어를 잘 해서 이승만이 주는 장학금을 받고 청년 한창기는 미국에 체류하며 영어공부를 했고, 나중에 브리태니커 본사로부터 영어를 가장 잘하는 아시아인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 청년 한창기는 집안과 벌교읍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법조인 고시를 보지 않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 체인점 사업을 했다. 고읍리 청주 한씨 친척들의 실망은 대단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학,군대 갔다고 오고 결혼해서 우리들 키우느라, 한창기 형님과는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부친에게 한창기는 굉장히 특이하고 지독하게 공부하던 형, 보통 세상 사람들이 기대했던 삶과는 동떨어진 독창적인 형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부친께서 한창기 선생이 평생 혼자 사시고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해서 많이 아쉬워하셨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당시 순천 하숙방에 빨치산이 내려와 조부께서 이고 온 쌀을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시절을 같이 산 형님에 대한 인간적 아쉬움의 표명이었다.


한창기 선생은 1997년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부친께서 진즉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 물] 창간자가 한창기 선생이었다는 우리들에게 해줬으면, 살아 생전에 만나서, 그 비법을 전수받았을텐데 아쉽다. 왜냐하면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은 문화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와 문화라는 주제를 ‘잡지’ 형태로 표현해낸 당대의 대중예술이기 때문이다.


한창기 (1936~1997) 주요업적

1976년 3월 월간 [뿌리깊은나무] 창간. 1980년 8월 전두환이 폐간시킴

1984년 11월. 여성지 표방, [샘이깊은 물] 창간. 2001년 11월 폐간.




한창기는 누구인가? 그를 다룬 책 [특집! 한창기, 2008,창비] 5페이지를 보면 “한창기는 직판 세일즈맨 제 1세대를 조직하고 훈육한 사람. 몇 세대 앞선 선진적 업적을 남긴 언론-출판인. 미시적인 관찰력으로 머리카락에 홈을 파듯이 글을 쓰는 문화비평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생동하는 광고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 심미안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 판소리를 비롯한 한국 전통음악의 회생을 도운 비개비. 전통 의식주의 파괴없는 창조적 계승을 실천한 사람. 국어학자가 울고 가는 재야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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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주, 앵남, 화순, 득량, 예당, 벌교역,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갔던 길.
 노래는 일리노이 센트럴, 시카고, 칸카키, 뉴 올린스

흔들리는 기차안, 터널 안으로 들어갈 때 굉음, 녹색의자.
벌교 가는 길. 보성 지나 득량 예당 조성. 
그가 득량 (得粮)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 일이었다.
득량은 "식량을 확보하다"는 뜻이다. 

시카고 유니언 역에서 뉴 올리언즈까지 풍경을 노래한 '뉴 올리언즈 시티'라는 기차.

아이보는 엄마, 기차 노동자 풀맨 포터, 엔니지어, 카드놀이하는 노인, 기차안 사람들을 묘사.

가수는 알로 거쓰리. 

철로의 리듬과 함께 '뉴 올리언즈 시티' 기차는 미시시피를 거쳐 남쪽 바다까지 하루종일 달린다.

굿 모닝 아메리카 ! 하 와 유 ?  


노래 가사를 들으니, 요즘 같은 시절에 저절로 묻게 된다. 

굿 모닝 코리아 ! 잘 있느냐 ?

2개월 째 힘들다. 


노래도 위안이다. 이제 민중가요는 거의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기찻길, 철로의 리듬이 필요하다.

그도 나도 정치도, 민중도, 민주도 몰랐던 시절에 탔던 기차.


그는 득량 사람이다. '식량이 많아' 이름도 '득량'이다. 

득량역에는 난 한번도 내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본 것은 교문과 백골단 사이, 종로 을지로 명동 근처 전경 방패들 사이였다.


득량, 예당, 조성, 벌교, 그 익숙한 이름들, 그러나 내려보지 못한 그 득량사람.

득량역에서 한번 같이 내려 보자고 말 한마디 못한 채, 그는 떠나갔다.


그는 득량 사람이다. 식량이 많은 곳. 민주노동당 오재영 실장.

여전히 그 때나 지금이나 정치를 몰랐을 때나, 지금이나 

시티 오브 뉴 올리언즈 노래는 위안이다.

그는 득량 살암이다.  

 
8 years ago

‎Jae Young OH‎ to Nakjung Kim
October 4, 2011 at 3:06 AM · 

원시님의 담벼락에는 처음 글을 쓰네요^^ 얼마전 방문 기념해서 ㅎㅎ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신당 시절에 이르기까지..제 위치가 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소위 음지(?)에 있어서 그랬던거 같습니다. 제가 존경스러운건 아무리 인터넷이 전 지구적으로 퍼져있다고는 하지만, 국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대응방침을 그렇게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내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존경스러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2 Seo Mi and Cheol Myeon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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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큰 진리를 마주 대할 때는 공포심이 생긴다. 이런 정서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되었다. 자디잔 지식의 진리나 참을 알아나갈 때는 '기쁨'을 느끼지만, 너무나 큰 진리와 진실 앞에서는 섬뜩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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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jung Kim 


January 28, 2015 at 12:45 PM · 


많이 알면 남에게 상처를 입힌다. (문자나 지식) 많이 배우면 전쟁을 일으킨다. 이게 노자 생각이다.


노자의 '상상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목들 중에 하나, 생각하는 법을 알려준 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문자, 언어에 대한 노자의 극단적인 공격이다. (유가와 법가와 비교해) 노자의 대안은 무엇이었나? 지금 우리가 쓰는 문자를 폐지해버려라는 것이다. 외국어는 더더욱 필요없다. 우리가 새끼줄 같은 것 (볏짚으로 만든 줄)으로 엮어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라는 것이다. 원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문자를 많이 알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다른 동네를 침략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끼줄을 꼬아서 만든 것을 (결승 結繩)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겠다. 

당시 노자의 이 소국과민 (적은 나라 사람 숫자가 적은 지역 공동체)을 읽다가, 이 새끼줄 언어, 참 대단한 창조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사람 언어는 늘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말과 언어는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제 2의 어떤 사람이 관장하고 있고, 현실이라는 과녁에 적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


현실은 몰라서 많이들 당하고 산다. 영국 근대 사유의 첫 출발점이라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명제가 "아는 것이 힘이다." 이게 인류가 살아온 누적적인 길이고 주류 고속도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말한 새끼줄 언어 (결승)는 고속도로 옆 갓길처럼 또 사라지지 않고 도로의 전체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노자의 '정치적 이상향' 속에서 새끼줄 (결승)과 달리, 요즘은 문자 때문에 우린 사람을 덜 찾게 되고 안 봐도 되고 그렇다. 고립된 '자아'와 보내야 하는 '나와 나' 사회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여튼, 메트로폴리탄 속 '소국 과민'을 어떻게 건설하느냐? 그것은 여전히 문제이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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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7 18:08


(잠시 떠오르다) 어떤 한 표어


원시 조회 수 999



구로공단역은 늘 복잡했다. 지하철에다 그 밑으로는 차들이 많이 다녔다. “다음 정차할 역은 구로공단 구로공단역입니다. 띠로로록”  지금도 이 목소리가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가장 많이 기억한다. 그런데 가끔 공간이나 팻말 이런 것들도 기억에 지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회사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목에, 왼편에 큰 회사가 하나 있었다. 그  공장 겉벽은 색바랜 녹색 칠이었는데, 그 위에 커다랗게, 표어가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 


처음 그 표어를 보고 놀랬다. 아니 의분이 동시에 일었다. 표어는 학교 건물에나 <반공> <방첩> 혹은 <조국 통일> 이렇게 씌여져 있는 것인 줄로 알았다. 굴뚝 위로 연기가 치솟고 있는 공장 건물에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 이런 구호가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분노 그 자체였다. '이렇게 처박아 놓고서'  


회사에서 가장 일 잘 하는 손주임,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그렇게 부러워했던 전문대 나온 이대리도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회사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보다는, 실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 30분까지 출근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거의 밤 9시, 10시까지 잔업을 하고, 토요일도 격주로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일요일도 200% 수당 때문에 한 달에 2회는 일하는 현실이고, 그야말로 여기 회사 사람들은 다 일하는 기계들인데, 이 사람들더러 조국 근대화 초석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보고 같이 자란 친구들, 선후배들, 삼촌 고모뻘되는 사람들이 1공단, 2공단, 3공단을 꽉 채우고 있었다. 8시 56분, 57분 출근표 촬콱 굉음과 더불어. ‘서울가서 돈 벌어 온다더니’, 그들이 다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실은 그 표어를 보고,  속으로 ‘여기다 다 처 몰아넣어 놨구나’ 이렇게 중얼거렸다. 서울에 오게 된 동기 자체가 계급적인 것인데, 표어는 애국주의였다. 


매일 출퇴근 길에,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 표어와 마주쳤다. 이 표어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르게 해석도 해보게 되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 ‘그러니까,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산업역군이고 수출 일꾼이다. 그 힘으로 조국의 근대화를 이뤄냈다. 그러니까 그걸 한국의 자본이나 경영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게 애국주의 고취, 전시 자본주의 선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냥 진실을 그들도 엉겹결에 이야기해버린 것이다. 동원의 수단이었는데, 진실을 말해 버린 셈이다. 


여기에 있는 중소기업 자본가들도, 경영자들도, 국가도, 또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데도 샤워기 시설도 없는 (우리회사 같은 경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어느 누구도 박수치면서 아 ‘저 말,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는 말을 하지도 믿지도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게 진실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윤리적인 명령어나,  “인간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인간노동이다” 이런 문장처럼, 부인하기 힘든 그런 말이 되었다. 


 일당 16800원(시급 2400), 복만이형 같은 기술자는 3만원까지도 받았다. 복만 형이 참 부러웠다. 선반기술이 있어서 나보다 땀을 덜 흘리고 돈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땀은 많이 흘렸는데, 씻는 곳은 좁다란 부엌, 세수대야 놓고, 비누 하나에 그 많은 사람들이 퇴근 전에 손만 씻었다. 샤워실도 없었다. 땀 방울들을 씻어낼.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축구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럴 때, 엄청 큰 이야기 “조국 근대화”, 심지어 “민주화” “ OO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 후로는, 그 표어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다. 그 표어에 물음표를 붙였다가, 느낌표를 붙여보기도 했다가, 이렇게 여기까지 오고 있다.  


“내가 흘린 땀 한 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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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고모

수필2019.01.25 13:49

2011.04.20 17:31


고모 일기를 보다


원시 

스치고 지나가는 노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933.html

모유수유 예찬론자의 고백 “다 좋은데 성욕 감퇴라니” / 생생육아 돈 없이 아이 키우기


=>  한겨레 신문 1면 기사이다. 정말 오랜만에 한겨레 신문에서 좀 잘한 신문 기획배치이다. 


언젠가 고향집 방을 정리하다가, 적은 회색 노트를 한 권 발견했다. 고모의 일기장이었다. 연필로 쓴 부분도 있고, 볼펜으로 씌여진 페이지도 있었다. 그 중 눈에 띄이는 게 하나 있었는데, 5월 어느날이었다. 


요지는 대강 이랬다. "오늘 점심을 간단히 먹고, <원시>를 업고 언니와 만나러 갔다. 학교와 집 중간 들판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논두렁과 들판에는 꽃들이 피어있고, 젖을 보채는 조카는 점점 무거워져 간다. 언니는 논가에 앉아서 <원시> 젖을 먹이고..." 


25년 전에 쓴 고모의 일기 한 쪽을 보고, 찡해졌다. 고모의 증언에 따르면, 젖 먹을 시간이 다가오면, 날아다니는 파리도 잡아먹으려고 손을 뻗고 그랬다고 하는데...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람은 보통 자기 잘난 맛에 살거나, 대부분 베푼 것은 기억하고,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직장과 집 사이는 300-400 미터 정도 되었다. 점심시간에 고모와 어머니가 둘이 만나서, 들녘에서 젖을 먹이고, 한 여자는 집으로, 다른 한 여자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5월 들판의 논두렁 모유수유 광경, 짠하다는 생각이 들다. 


우리 일상은 구체적이고 자질구레하다. 정치는 이런 일상이다. 그 생활터전에서 "나"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너, 옆집,위 아래 집"까지 포함하는 공통의 문제들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 그게 관건이다. 지금은 비록 소수지만, 진보정당이나 정치적 좌파 정당의 승부처 역시 이러한 생활터전의 <정치>에 달려있다. 


한겨레 신문기사 (젊은 엄마의 모유 수유기)를 보면서, 이런 직장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당-홈페이지, 그런 이야기들이 제 1면 홈페이지에 뜨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지하철 1량 기차에는 적어도 1개의 <화장실 크기의 모유 수유실: 전용 방>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50년간, 60년간의 진보정치의 핵심은, <도시공간>을 얼마나, 아이들, 엄마들, 여성들, 노인들,장애인들에게 친절한 (사회정의에 입각한) 도시를 만드냐에 달려있다. 







Comments '2'

chalie 2011.04.20 18:02

안타깝습니다. 공감을 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안스러운지요.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마음속으로만이지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댓글

채훈병 2011.04.20 18:38

저도 코끝이 찡하네요.


좋은 글 감사 1인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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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30 20:26

손가락에 집착하는 여인에 대해서


원시 조회 수 1792 댓글 4 ?


점심은 거의 전투적으로10분 이내로 먹고 보통 족구를 했다. 근데 그 날은 족구경기도 없고 해서, 프레스 반 빠마 아줌마랑 붕어빵을 나눠먹었다.  프레스 반에 두 명의 아줌마가 일했다. 

회사 담 옆에서 빠마즘마가 준 붕어빵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자꾸 의식적으로 꼭 쥐고 있는 손, 손가락에 대해서 물었다. 뭔가 눈길이 오면 불편해 하는 기색, 그게 역력했다. 


붕어빵 씹으면서, 언제 다친거예요? 그러면서 그냥 확 물어버렸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꼈다고 한다. 말이 낀 거지, 반지끼는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이 절반 이상이 다 잘려나갔다. 

제일 창피한 게, 설이나 추석 때 친척들 모였을 때, 모여서 같이 음식도 하고 요리도 해야 하는데, 손을 내놓기가 그렇게 부끄러웠다고 했다. 반지도 못 끼우게 되고. 사람들하고 늘 말할 때도 그 다친 손은 늘 꼭 움켜쥐게 된다고 했다. 


그 상처에도 다시 프레스 반에서 일하는 게 한편으로는 너무 아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해보였다. 어디 여자만 손이 이뻐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빠마 즘마의 손가락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슴이  꽉 짓눌렸다. 당시 삶는 세탁기 (삼성)가 출시되어 대유행이었다. 우리 회사, 아니 그 회사는 그 삶는 세탁기 부품을 납품했다. 우린 정말 미친듯이 일했다.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행복은 구체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행복이니까. 난 꿈책님 아들처럼 초등학교 4~6학년 때까지 학교 리틀야구 대표선수였다. 매일 5~6시간씩 야구연습을 했고, 캐쳐였기 때문에 공도 많이 던져야했다.

 그래서 손가락, 손톱을 애지중지하게 관리했다. 깐에는. ... 파울 팁에 오른 손가락이나 손톱에 공이 맞거나, 타자가 공을 치고 난 후에 배트를 포수인 내 손에다 던지고 1루로 달려갈 때, ‘그 놈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이다.’ 투수 손가락 관리는 더 하다. 보험에 들 정도니까. 손가락을 다치거나 잃어버리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전쟁터에 나가 죽기도 하는 판국에 무슨 대단한 손가락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가 빠마머리 아줌마처럼 손가락을 두개를 잃어버렸다면, 나는 그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일터에서 다치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 붕어빵 대화 이후 더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누가 사회주의가 뭐냐고, 혹은 진보적 좌파가 바라는 사회가 뭐냐고 묻는다면, ‘노동자들, 사무직이건 공장이건, 일하는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아름다운 사회 (안 다치고 온전한)이다’ 라고 나는 말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복지로, 돈으로, 산업재해 보험처리만으로 해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다. 일터에서 산업재해 문제를, 개인 실수 탓이나, 기술적 결함을 지적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이런 것들은 <일터의 안전>의 다 필요조건들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회사에서 노동자들이 작업 공정과 과정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하고,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는 실질적인 대책들을 강구하지 않으면, 자본과 경영주의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안전 불감증>은 치유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태평양을 건너 와서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 해외사례들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발견한 책이 애쉬포드가 쓴 [일터에서 위기: 직업과 상해: 1970: 미국 * 이 책은 미국이 68세대 이후 진보적인 시민운동이 활성화될 그런 시점에 발행됨.]이다.

 이 책에 따르면, 직업병의 숫자는 39만개이다. 2004년 민노당 10석 의원이 생겼을 때, 이재영 정책실장님에게 제안한 것들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  <안전> - 일터,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터전-에서 안전 문제였다. 

이 <안전> 문제는 철저히 계급차별적인, 성차별적인, 인종차별적인 주제였기 때문에,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리스트에게 맡겨놓을 수 없다. 임금인상, 해고반대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이 ‘상처’ 문제, 일터에서 다치거나 죽는 문제이다. 


진보신당 2011년 11월 30일. 일터와 생활터전에서 <안전> 문제를 다룰 정책실 근무자가 0명이다. 사업의 연속성도 없고, 축적된 결과물도 없다. 당원 숫자는 1만 3천명, 2002년 상반기 국회의원 0석이던 민주노동당과 비슷한 당력이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야할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회사를 경영하고, 자주관리하고등등,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일터에서 <안전> 생활터전에서 <안전> 문제는 당장 선거 투표 전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등등… 


실은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의 문제도 이런 <안전>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진보신당 당원들, 그리고 당원이 아니더라도, 회사, 공장, 식당 (*식당의 부상, 산재 종류도 1천가지는 넘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안전>과 노동과정이라는 주제로, 진보신당 중앙당에서 발표회를 1년에 정기적으로 하는 날은 올 수 있을까?


난 솔직이 아직도 왜 여성들이 반지 만드는 것을 배우러 다니고 (*그런 소규모 모임이 동네에 꽤 있음) 링 같은 것에 관심있는지, 잘 모르는 무딘 감각의 숫컷이다. 그러나 적어도 봉숭아 물을 손톱에 들이건, 매니큐어를 바르건, 자기 미적 감각을 손가락에 실천하는 분들의 취미와 기호는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것도 일종의 자아 정체성이니까. 요새도 삼성 삶는 세탁기가 유행인지 모르겠다. 가끔씩 빨래하다 세탁기를 보면 그 빠마 아줌마의 움츠린 손이 생각난다. 세탁기 하나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니까. 


1. 출처: '시한부 1년', 80년생 윤정씨에게 삼성반도체란… - 프레시안 http://bit.ly/rA6H2F


삼성반도체_이윤정_직업병_2011_한국.jpg 


2. 1960년대-70년대 소위 '68세대',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전 데모 등의 진보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터 안전에 대한 법률과 조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1980년대 공화당 레이건 정부 등장으로 노동조합과 노동권은 무시되기 시작했다. 


애쉬포드가 쓴 <일터에서 위기: 직업병과 상해>  1970년.   


crisis_in_the_workplace_by_ashhold_cover_직업병과_상해.jpg 


3. 목차 

Crisis in the Workplace: Occupational Disease and Injury : a Report to the Ford Foundation

Nicholas Askounes Ashford

crisis_in_the_workplace_by_ashhold_contents_일터안전과_건강법_1970년_제정.jpg 


4. 목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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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일 매일 일상에서 벌어지는, 우리들의 노동 현장, 일터에서 <안전>에 대한 정치, 이것 역시 중요한 정치투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몸에 대한 존중. 손가락, 발가락, 손 톱 하나라도 너무 쉽게 "엄살부리지 말어" 이런 문화가 우리 의식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그것 역시 자본과 지배자 권력 동맹체의 노동자와 시민들의 통제 전략이다. 


daewoo_ship_workers_disease.jpg 


 

Comments '4'

mike 2011.11.30 20:34

잘 봤습니다


 댓글

518 2011.12.01 01:49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꾸벅

 댓글

손찬송 2011.12.01 02:19

"엄살 부리지 마라" 참 짜증나는 말입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다는 것은 참 짜증나는 일입니다. 귀농해서 제일 신경썼던 부분이 바로 몸관리였습니다. 체력이 꽝인 내가 열심히 한다고 무리하다간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 민폐이기도 하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하는데 오버해서 다치면 큰 손해죠. 일 시작하기 전에 늘 야기 했었습니다. 못하는 것 안하는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야기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노동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어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과연 지금처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당근 자신없습니다. 일터에서의 산업재해에 대해 당 차원에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 할일이 참 많아요.


 


여튼 좋은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원시동지 보구 싶다. 아리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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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1 22:01



배신자 김우순 


원시 조회 수 1175


조금옥 수학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스타였다. 3월 운동장에 갓 부임한 신임 선생님 소개가 있을 때부터, 탤런트 빰치게 단아하게 생긴 조옥 샘은 때꾹물 죽죽흐르는 고등학교 남학생들에게는 포니밋,소녀시대,원더걸스는 저리가라였다. 조금옥 샘이 마이크를 잡고 소개를 하기전에도 뒷산에서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와~ 노래~노래” 3월이 그렇게 출발했다. 


고등학교 수업과 생활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시락을 2개 싸와서 그걸 먹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자율학습시간에 또 자거나, 도대체 공부는 둘째치고, 얘들을 집에 가서 자게하지 않은 이 체제 자체에 대한 불타는 저항의지는 솟구쳤다. 


난 '대아 (반 친구들 60여명)'를 위해 '소아'를 희생키로 작심하게 되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의 역사적 사명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이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나와서 상을 줘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험험)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수업시간에 얘들이 자거나 조는 것을 막기 위해, 적어도 한 10분 간격으로 속칭 “빵 터지는 발언들 (행동이 아니라 말로)”을 내가 하거나, 내가 컨디션 난조면, 다른 친구들을 들쑤셨다. 전술이야 뻔하지 않은가? 우리들의 타켓과 먹잇감은 각 학과목 선생님들이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대본은 준비하지 않는다. 그 상황 상황에 맞게 <상황극>을 하는 것이다. 진짜 유치찬란한 것부터, 공자왈 노자왈까지, 가끔 선생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도...난이도 낮은 10단위 농담의 경우, (a-b)³+(b-c)³+(c-a)³를 인수분해하라. 그러면, 신재민 학생이 칠판에 쓰면서 에이 플러스 비, 에이 제곱 마이너스 이런 식으로 쓰고 나옵니다. 선생님 “맞습니까?” 손을 번쩍 들며 “아니오” 그러면서 칠판에다 에이 더하기 비, 에이 제곱 빼기 이런 식으로 수식은 신재민과 똑같이 쓰고, 난 플러스 대신 더하기로, 마이너스 대신 빼기로 힘차게 외치고 들어와 자랑스럽게 착석한다. 난 사실 물러서지 않았다. 고2, 3 되어서도, 선생이 칠판에 마이너스 그러면 속으로 “빼기라니까 그러네...우리 말을 참 맘으로부터 아껴서야 하는데”... 


꼭 이런 난국에, “선생님 진도 나가죠?” 9번 리구열 학생, 웃는 교실 찬물 확~ 뿌린다. 이런 “진도” 학생에 대한 맞춤형 코멘트는 “어이 진도 너 부른다. 권순전 진도! 엄니한테 전화왔다!” (권순전은 실제 진도가 고향임) 그럼  주변에 깔아놓은 멤버들 “진도땍, 진도댁 전화 받어~” 


아무튼 그 날도 그렇게 사건은 전개되고, 웅성 숭성하다가 조금옥 선생님께서 출석부를 집어들더니, 문을 열고 수업도중에 교무실로 그냥 퇴근해버리셨다. 


난리났다. 후방이 흔들거렸다. 교무실로 가서 사죄하자는 파, 담임이 알면 큰일난다. 아니, 이늠들아 이런 것부터 밀리면 우린 끝까지 밀리게 되어 있어 강경파 혹은 나몰라라파. 아무튼 우리는 교무실까지 가지 않았다. 청소 끝나고 담임 심선생님께서 아니나 다를까 1.5미터가 넘는 정말 쎅시하게 잘 빠진 탱자나무로 만든 매를 들고 왔다. 


“김우순 나와 ! 니가 수학 시간에 헛소리하고 그랬냐?” 사실 김우순과 원시소년은 이미 7반 심선생님반에서 이미 유명인사였으며 교무실에서 상당히 유명한 이름들이었다. 바로 업드려!  심선생의 후려치기 타법은 김일선군의 허벅지에 거의 박혔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직감으로 매의 강도를 체험할 수 있다. 


내가 고 1때 수업시간에 자는 얘들을 깨우는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느라  그 수많은 학과목 선생들로부터 돌려맞은 매댓수만 해도 365는 넘는다. 매의 종류도 다양했다. 맨 살덩이부터, 검정 대나무, 대뿌리, 물걸레 자루(긴거), 빗자루(짧은거), 당구 큐대 (*도대체 이런 것은 어디서 다들 구해왔는지 원@@), 연 만드는 신호대... 태권도 형, 유도형, 신체 접촉형 다양했다.


김우선군, 동무의 비명소리는 동물원의 침팬지 치질터지는 소리였다. 탱자나무 휘어지는 그 활시위 소리는 흡사 한갑득류의 거문고 산조의 자진모리! 김우선군은 5대 맞고 그대로 개구리 대형으로 뻗어버렸다. 


이 참혹한 순간을 보라. 눈을 찔끔 돌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던가? 김우선 “일어나” 소리와 더불어 “아니, 원시가.....원시가.....” 음성은 떨렸고, “원시가 그래서 샘이 출석부 들고 나가...” 


“원시 나와” 바로 신체 접촉형이 시작되었다.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형 빰치기. 그러나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 '물러서면 안된다' “퍽” 소리는 허용할지언정, 한발짝 뒷걸음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소위 학교에 일진이니, 어깨 좀 들썩이는 얘들도 매 앞에서는 싹싹 비는 형, 조산원도 아닌데 그보다 더 크게 소리지는 형, ...내 스타일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었다. 그 때만은 “내 마음은 호수요” 원래 시인, 원시가 되는 것이다. 이게 싹싹 비는 것보다 때리는 사람 마음을 간담 서늘하게 하는 전법인 것이다. 소리없는 자가 강한 법이다. (*이건 낭만이지만,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했으면 그건 장담할 일이 아님) 


7교시 끝나고, 김우선군과 수도꼭지 시멘트에 걸쳐앉아, “야 임마, 그런다고 거기서 원시라고 말해버리면 어떡하냐?” “미안하다...” “많이 아프냐? 검정 줄 5개는 생겼겄다 임마” 검정 -> 푸르딩딩 -> 보라색채 -> 빨가스름해지고 -> 실핏줄이 보이다가 이런 식으로 매의 상처는 아물어간다. “침 발라 주까?” “됐어” 김일선군은 개구리 사지 벌벌 떨더니, 이제 찬물 마시고 좀 생기가 돌았다. 


배신자 김우선, 수돗가에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어 임마” 햇볕을 쬐고,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고, 수학여행갈 때도 같이 사회도 보고, 교무실과의 전투는 그 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난 지금도 당시 나의 역사적 임무에 대해서 옳았다고 믿고 있고, 내 허벅지 앞뒤, 발바닥은 여러가지 무지개 색깔로 가득찼지만, 반 친구들이 학교에 와서 자고 졸고 그런 꼴은 도저히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나름 <교실 혁명>을 역설했던 것이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잠은 침실에서, 교실은 즐겁게 놀기~


배신도 가끔 때릴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 화해의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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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6 17:22


‘탄’과 ‘칼’

원시 조회 수 662


어느날 회사에서 돌아와보니 출입문이 열려져 있었고, 열쇠는 박살나 있었다. 방 옷장 서랍은 열려져 있었다. 없어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져갈 물건이나 증거로 잡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개X의 자식들이...’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 날 밤 방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잔업을 해서 극도로 피곤한데..... ‘잡범들이겠지. 설마 경찰은 아니겠지.’ 순간 별의별 생각이 스쳐갔다. ‘아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가......여기에서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대한 액션이 뭔가?’ 방문을 열고 부엌에 있는 칼을 머리맡에 두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니, 부적의 효과는 있었다.




어제 <레디앙>기사, http://www.redian.org/archive/43542 화장실 바로 앞 휴게실 사진을 보다. 회사 직원 혹은 노동자에 대한 태도가 강산이 2번 3번이 변했는데도 변한 게 없다. 그런 현실을 바꿔보겠다던 우리의 현재 모습을 잠시 생각해보다. 


진보신당 사람들, 그리고 당원들은 아니지만 아직도 변혁의 꿈과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심정은 이 순간 어떠할까?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다 끌어들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온라인으로만 현실을 보는 내 이야기만 간결하게 하는게 낫겠다.





집안이 털린 느낌이다.




통진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을 유권자 90%는 구별하지 못한다. 512 통합진보당 폭력사건은 프로야구 중계방송되듯이 전국으로 중계되었고, “진보정치하는 너희들도 알고 보면 새누리당 민주당 정치꾼들과 똑같은 놈들이다”라는 극도의 냉소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다. “너희들이 정권을 잡으면 더 해처먹을 놈들이다”이라는 모멸적인 발언을 하는 세력들도 있다. 사람들은 의식화운동을 거치지 않더라도 자기 오감 체험에 따라 자기 생각을 바꾼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혹은 거꾸로 한국인의 특유의 ‘속도전 망각’이라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도, 만회의 시간은 최소 5~6년, 길게는 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들 정치적으로 억울하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일자리 창출과 밥그릇 깨부수기 다툼에 직접 동참하지도 않았다. 베테랑 혁명가에게는 이런 상황도 다 짊어지고 가야 할 역사적 책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타의반 자의반 지쳐버린 수분 부족으로 탈진 상태에 이른 많은 평당원들에게는 ‘심리적 박탈감’과 ‘사기 저하’가 자리잡고 있을 것같다.




그래서 집안이 털린 느낌이 든다. 황망함과 허탈감이 그것이다.




이십여년 전 방이 털렸을 때 ‘방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다. 부엌칼이라도 들어 ‘자기방어’를 해야했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한 순간에 다 깨질 수 있으니까.


2012년 당이 처한 상황, 또 당 바깥 동료들이 부딪힌 상황은 그 당시와는 또 다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적어도 수 만명이 지난 10년간 자기가 벌어서 낸 자비, 자원봉사시간들, 무엇보다도 선거때마다 마음 졸이고 주변의 걱정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살아야하는 심리적 압박, 빚져서 더 이상 당활동을 할 수 없는 분들......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노동중심성, 전태일 정신이다. 그런데 노동중심성은 전국 1만여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중심’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그 말의 정치적 의미가 나타날 것이다. 전태일 정신에 대한 강조, 그런데 왜 자꾸 집회시 민중의례와 같은 말처럼 들리는가? 


역설적이게도 또 드라마 같지만, 전태일 누이는 민주당 비례대표 1번 국회의원이다. 전태일정신은 정신이고 그 누이 전순옥의 길은 또 다르다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것을 이미 말해주고 있다. 전태일 정신은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과 같을 뿐이다. 미싱사 전태일의 죽음도, 80년 5월 광주항쟁도, 87년 6월 시민항쟁, 7-8월 노동자 투쟁은 역사적으로 재해석되고 재배치되고 재관행화되고 재법률화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무형의 공공 자산일 뿐이다.




내가 구로공단에 처음 갔을 때 느낀 점은 공포였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리에 기가 죽은 것이다. 아침 10시~12시 사이 구로 제 2공단을 안쪽을 걸어가는데, 거리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느 공장에서 울려나오지도 측정이 되지 않는 엄청난 큰 기계음, “쿵 쾅”하는 소음들이 귀청을 때리며 사람 기를 팍팍 죽였다.




이 곳에 사는 노동자들이 누군인지 알고 있다.어린시절 논바닥에 비닐 축구공으로 축구하던 맹윤기, 유철종 형제들, 아랫마을 신씨네 누이들, 화담마을 송창식을 ... 내가 읽은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 엥겔스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런 것과 굳이 연결시켜 필연적으로 무슨 논증을 할 필요는 없었다. 


현실은 더 간단명료했다. 나랑 동네에서 축구할 친구들이 서울로 돈 벌러 가버렸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향을 떠나온 이유가 있고 인생설계가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살기 바빴으니까, 신림 4거리 -> 신대방동 -> 구로공단 (요새는 디지털 역으로 바뀌었다고함) 지하철 2호선 두 정거장만 가면, “내가 흘린 땀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이 된다”는 표어가 붙어있는 산업공단 단지, 구로공단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도시공간’에 대해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복덕방 이름도 ‘광주 복덕방’, 가리봉 오거리 시장 안에 김치가게는 ‘충남상회’, 다들 자기 고향 이름을 붙이고 살았다. 보증금 100만원, 월세 7만에 시작했고, 주인집 아줌마의 시어머니되시는 분은, ‘어이 총각, 방 넓고 좋아, 아가씨만 데려오면 쓰것구만’ 그러니까 내가 운이 좋아서 좋은 방을 얻었다는 것이다. 어른께서 그렇게 또 ‘인생의 격려’ 차원에서 말씀하시니, 난 예의갖춰 ‘감사합니다’ 했다.




문제는 연탄이었고, 연탄가스와의 싸움이었다. 그 집은 화장실이 골목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연료는 연탄이었다. 당시 한국의 큰 도시에는 3저 호황의 결과로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 도시들까지 아파트가 미친듯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연립주택에도 연탄에서 기름이나 천연가스가 보급되었다. 여긴 ‘아직인’ 동네, 예외 공간이었다.


 주인 아줌마와 할머니는 연탄가스 염려말라고 하셨지만, 우리 선배 한분은 인천에서 연탄가스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실은 이건 큰 문제였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첫 날은 오후에 연탄을 피우고 2시간 간격으로 시계를 맞춰놓고 잠들었다. 깨어보면 내가 살아있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할 것까지야...그렇지만, 당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자구책은 다 동원했다.




‘자기 방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잠시 과거를 뒤돌아보다. 이런 회고담을 할 때는 아니지만. 열정과 패기, 의분도 중요하지만, 어이없는 우연적 변수, 연탄가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 더 중요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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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스승이 없는 사람은  불운한 것이다.

스승을 찾지 못한 사람은 조금 더 불운한 경우다.

스승을 찾으려고 노력도 안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운이 없다.


 스승을 능가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은 운만 있는 거다

스승은 없고 제자만 있는 이는 참 힘겨운 거다

제자가 자기를 능가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한 것은 참 못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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