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총진군 비판: KBS2 시사투나잇보다 못하다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12-08   18:21:09 조회수 조회 : 407    추천수 추천 : 20    반대수 반대 : 3    

    총진군 비판: KBS2 시사투나잇보다 못하다


[1] 당원들의 신체적/정신적 힘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는 지도부의 무능이 바로 총진군 기획이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는 평당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지도부 구태의연한 전대협식 투방-문건정치로부터 해방될 때이다], [민주노동당 총진군식 투쟁양식 수정해야 한다. 깃발 이동] 등에서, 여러 차례 총진군식 정치사업이 효과가 떨어지고, 당원들의 정치적 지혜를 적재적소에 배치시키는 전법이 아닌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민주노동당은 여러 사회단체등과 구별되어야 하고, 적어도 노동분업을 이뤄야 한다. [KBS 2 시사투나잇]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는 시각과 관점은, 열린우리당/한나라당 수준을 넘어서 있고, 완벽하지 않지만, 한국에서 3가지 정치흐름, 진보(민주노동당), 자유주의(열린우리당), 보수우익(한나라당)을 균형있게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때론 정치적 풍자로써, 과거 20년 넘게 쌓아온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부각시킨다. 단적인 사례이지만, KBS, MBC에도 노조가 있고, KBS 내부에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숫자면에서도 경합을 벌이고 있다. 1980년대, 땡전뉴스 (전두환 각하께서는…9시 뉴스)와는 이제 다르다. 


80년대 우리가 왜 시위를 했는가? 왜 치약 얼굴에 처발라가면서 거리에 나섰는가?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는가? “광주학살원흉들을 KBS, MBC, 조-중-동 등에서 은폐하고 진실을 알리지 않아서,” 직접 거리에 나가서 데모하는 것이었다. 


대자보 수준은 어떠했는가? 대자보는 어떠했는가? 2~3장 짜리, 그 핵심은 ‘군사파쇼에 저항하라. 울분에 찬 절규’였다. 그러면 2004년 국회의원 10석에, 전국에 나름대로 포진한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이끌고 나갈 전망을 제시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의회와 직접민주주의 모든 공간에서 정치적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의회의 법률/제도 개선, 언론매체에서 이데올로기 경쟁/투쟁, 일상공간에서 진보정치 담론 형성 등에 자기 힘을 쏟아야 하고, 당원들이 그러한 다중의 전선들에서 밀리지 않게 자양분들과 정책들을 공급해줘야 한다. 


그리고 당원들이 직접 정책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그들을 정책생산자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깃발제작, 관광버스 대여, 모금함 만들기 등은 정치활동의 1~3%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원들을 아직 동원대상 정도로 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2] 시대착오적인 신화 – 수만명 앞에서 연설해야 정치적 오르가즘 느끼는 과거회상병


아직도 집회 시간의 3분의 1은, 진보-귀빈들 소개하고, 판에 박힌 소리들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하는가? 아직도 우리에게 어떠한 신화가 필요한가? 아직도 강철 신화, 스몰 K, 레닌 등, 하다못해 ~ 의장님이 필요한가? 묘한 감성구조를 가진 집단들이다. 마치 이것은 무슨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주사바늘만 보면 흥분하는 구조같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희로애락 구조와는 다른, 정치적 오르가즘 구조이다. 


정치적 쾌감, 패기, 마이크, 그리고 쩌렁쩌렁, 전두환-노태우처럼 적들이 아주 단순할 때나 통용되는 방식들과 투쟁양식들. 아니 이것들이 시대착오적이다, 농성, 단식, 데모 등이 불필요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폭동/반란의 메커니즘이 지금과 같은 민주노동당식 총진군에서 나올 수 있는가? 2004년 한국에서 폭동과 대규모 군중투쟁이 발발하게 하는 촉매제를 민주노동당은 만들고 있는가? 


총진군, [국가보안법 폐지]만 80% 외쳤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 그 단순성, 내용빈곤도 문제이지만, 성난 민심을 정치적 투쟁으로 동력화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도 결여되어있고, 그렇다고 해서, 각 지역, 직업별로 그러한 동력들을 이끌어낼 정치적 기획을 민주노동당에서 준비한 것도 없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분화되고 있고, 노동자들도 다 같은 노동자들이 아닌 이 세상에, 노-노 갈등의 골이 패일 대로 패인 이 마당에, 손에 잡히는 정치적 기획과 대안이 없으면 이제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총진군 추운 날씨에 나온 어린이들, 그들 앞날에, 그들이 살아갈 날에, 과연 그 어린이들 정서와 행복관에 맞는 진보정치를 할 작정인가? 


잡은 마이크들이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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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 옹 인터뷰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전화: 062-952-8308 윤석동, 김인숙>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1992년에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timore Sun) 신문사 기자 마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2009.05.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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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지만 진실한 노래이군요. 오랫만에 몰래 따라 불러봅니다.





표지 그림은,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윤상원 선생, 

국내외 정세를 살피느라 신문을 보고 있다 (도청안)



지금까지 전두환이 싱긋 웃고 있다.

학살자는 공식적으로 아직 없다.

다만 자위발동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게 공식 입장이다.



보리피리를 불기 좋은 그런 오월

푸른 보리밭 사이로,

붉은 피보다 더 진한

그 푸르디 푸른 하늘을 이고서

온 짙은 초록 보리밭 사이로

젊은 시민군들

속삭이며 스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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