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0. 5. 7. 17:47

노회찬 "6411버스 노동자"와  베버 "노동자" 관점 차이: 베버가 본 독일 노동자 계급 - 정치적 리더십 소명의식과  권력본능 결여  


1. 몇 년간 정의당의 어떤 모순을 관찰해오고 있다.  노회찬은 " 6411번 노동자 정당이 정의당이다"라고 했지만,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꺼려하고 인습에 안주하기 때문에, 독일 정치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1919년에 주창했다. 


정의당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당원들과 진보비즈니스 단체의 막스 베버  '책임정치' 바겐세일이 놓치고 있는 것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가 투명인간이 아니라 한국 참여민주주의의 주체, 노동해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정의당이 2020 총선에서 거의 모든 후보들이 '노회찬의 6411 버스'를 자신의 정치노선으로 한번 이상씩은 언급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형식 논리적으로보면, 정의당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막스 베버의 부정적이고 비관주의적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을 자신이 주장하는 독일 리버럴 민주주의 주체로도 간주한 적도, 그런 정치적 구상을 한 적도 없다. 독일 노동자 계급의 현 상태 (존재: Sein)가 이러하니, 정치적으로 각성된 정치 주체로 되어야 한다( 당위 Sollen)는 것도 연구하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 모든 비정규직도, 아니 비정규직 50%도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정의당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책을 발표해도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 상태와 정치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좁히기 위해 연구하고 학습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그게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급받는 노동자들을 '정의당 한번 찍어주는 팬'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당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당의 '정치 신념이자 확신'이 되어야 한다.


2.  1895년 막스 베버가 프라이부르그 대학교수 취임 연설에서 나타난 "노동자"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막스 베버가 31세되던 1895년 5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 교수가 되어 취임강연을 했는데, 그 제목이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이다. 연설 말미에, 베버는 독일 노동자 계급이 독일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투쟁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을 좌지우지 하는 저널리스트 집단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로마 역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 1792-5년 국민공회의 분위기와 독일 노동자 계급을 비교한다.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의 덕목이나 능력은 없고, 정치적 소-장인(Kleinmeister)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또한 독일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치적인 변화를 별로 희구하지도 않고, 인습과 관습에 순치되어 있다고 봤다. 


독일 노동자처럼 정치적인 학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리더가 되면,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정치적 적이라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인기의 왕관을 쓰고자 하는 안달복달하는 자일 뿐이다. 


3. 정의당 노회찬의 대표 수락 연설에 나타난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타고 강남으로 출근하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4.  정의당의 '노동자 관점' - 직장인, 월급쟁이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 월급쟁이, 학생, 비정규직, 주부, 노인은 현금이나 쥐어주는 단순한 복지시혜 대상이나 불우이웃이 아니다. 선거 때 정의당 찍어주는 팬클럽 회원에 그쳐서도 안된다. 


그들의 일터에서, 휴식터에서, 놀이터에서, 노동의 현장과 노동의 바깥 공간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말, 글, 행동이 정의당으로 흘러 들어와야 한다. 











참고 자료




1895년 막스 베버, 프라이부르그 대학 취임 강연 - (번역 요약) 원시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 (Der Nationalstaat und die Volkswirtschaftspolitik) 

뒷부분 pp.30-32 


막스 베버는 비르마르크 체제 하에서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해서 경제적인 대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교육받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어떠한 경제적 요소가 그러한 정치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르조아 계급도, 대토지 지주인 융커 계급도 아닌, 어떤 다른 계급이 정치적으로 더 위대한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현대 노동자가 자신있게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의 상속자라고 선언하다.

노동자 계급이 독일 정치의 지도자가 될 전망은 있는가? 


오늘날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거나, 정치적 성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부쟁이 (쉬마이쉴러)이고, 수상쩍은 인기의 왕관을 쓰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독일 노동자계급의 최상층은 자기중심적인 자산가계급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은 또한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경제적 권력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자유를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독일 노동자계급은 저널리스트-패거리들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다. 그 일단의 패거리들은 리더십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가 강등당한 부르주아들의 영토 안에 머무르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100년 전 추억놀이에 빠진다. 그들의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들 마음 속에서는, 1792-5년 프랑스 혁명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 대표자의 정신적 후계자들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기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란 정치적 소장인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정부 공동 운영의 한 축으로서 참여할 때, 자본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아니다.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공통적인 이해관계 공동체를 형성한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숙함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사회가 이미 옳다고 정해놓은 것만 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원치 않은 인습에 순치된 사람들이 한 나라를 지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일이기 때문이고, 독일 노동자들은 이러한 성격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적이다.  



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독일 노동자들과 부분적으로 다른가?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쟁하면서 완성시킨 더 오래된 경제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정치적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의 세계 강대국의 지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강대국의 과제를 해결하게 만들고,   개인들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학습을 받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독일인들은 국경선이 위험에 빠질 때나 긴급하게 그 정치적인 학습을 받는다.


큰 정치가 강력한 정치적 권력문제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독일 발전에서도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은 옛날에 저질러버린 유년시절 장난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독일 세계권력정치의 출발이 아니라 종지부라면, 그 값비싼 비용 때문에 중도포기가 더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독일의 위험한 상황이란, 국가의 권력이해관계의 담지자로서 부르주아 계급이 힘이 없어 보이고,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위를 떠맡을 정도로 성숙해질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의 깊이에 최면걸려 거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위험은 대중에 있지 않다.피지배자의 경제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위로 성장하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자격조건에 대한 질문이 사회정치적 문제의 궁극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사회정치적 활동 목표는 세상사람들의 행복이 아니라, 험난한 미래의 투쟁을 위해 민족국가의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합은 근대 경제발전 과정에서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결여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노동귀족”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다면, 부르주아의 팔이 아직은 창을 던질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최초로 더 넓은 어깨 위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려면 한참 더 가야겠지만.



Werden andere Klassen die Träger einer politisch größeren

Zukunft sein? Selbstbewußt meldet sich das moderne Proletariat

als Erbe der bürgerlichen Jdeale. Wie steht es mit seiner

Anwartschaft auf die politische Leitung der Nation?


Wer heute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sagen würde, sie 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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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sch reif oder auf dem Weg zur politischen Reife, der

wäre ein Schmeichler und strebte nach der fragwürdigen Krone

der Popularität.


Oekonomisch sind die höchsten Schichten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weit reifer, als der Egoismus der besitzenden Klassen

zugeben möchte, und mit Recht fordert sie die Freiheit, auch in der

Form des offenen organisierten ökonomischen Machtkampfes ihre

Jnteressen zu vertreten. Politisch ist sie unendlich unreifer, als

eine Journalistenclique, welche ihre Führung monopolisieren

möchte, sie glauben machen will. 


Gern spielt man in den Kreisen

dieser deklassierten Bourgeois mit den Reminiscenzen aus der

Zeit vor 100 Jahren - man hat damit in der That erreicht,

daß hier und da ängstliche Gemüter in ihnen die geistigen Nach-

kommen der Männer des Konvents erblicken. 


Allein sie sind

unendlich harmloser, als sie selbst sich erscheinen, es lebt in ihnen

kein Funke jener katilinarischen Energie der That, aber freilich

auch kein Hauch der gewaltigen nationalen Leidenschaft, die

in den Räumen des Konventes wehten.


 Kümmerliche politische

Kleinmeister sind sie, - es fehlen ihnen die großen Macht-

instinkte einer zur politischen Führung berufenen Klasse. 


Nicht

nur die Jnteressenten des Kapitals, wie man die Arbeiter glauben

macht, sind heute politische Gegner ihrer Mitherrschaft im Staate.

Wenig Spuren der Jnteressengemeinschaft mit dem Kapital

fänden sie bei Durchforschung der deutschen Gelehrtenstuben. 


Aber:

wir fragen auch sie nach ihrer politischen Reife, und weil

es für eine große Nation nichts Vernichtenderes giebt, als die

Leitung durch ein politisch unerzogenes Spießbürgertum, und

weil das deutsche Proletariat diesen Charakter noch nicht ver-

loren hat, deshalb sind wir seine politischen Gegner. Und weshalb


ist das Proletariat Englands und Frankreichs zum Teil anders

geartet?


Nicht nur die ältere ökonomische Erziehungsarbeit,

welche der organisierte Jnteressenkampf der englischen Arbeiter-

schaft an ihr vollzogen hat, ist der Grund:


 es ist vor allem

wiederum ein politisches Moment: die Resonanz der

Weltmachtstellung, welche den Staat stetig vor große macht-

politische Aufgaben stellt und den einzelnen in eine chronische

politische Schulung nimmt, die er bei uns nur, wenn die Grenzen

bedroht sind, akut empfängt.


 - Entscheidend ist auch für unsere

Entwicklung, ob eine große Politik uns wieder die Bedeutung

der großen politischen Machtfragen vor Augen zu stellen ver-

mag. 


Wir müssen begreifen, daß die Einigung Deutschlands ein

Jugendstreich war, den die Nation auf ihre alten Tage beging

und seiner Kostspieligkeit halber besser unterlassen hätte, wenn

sie der Abschluß und nicht der Ausgangspunkt einer deutschen

Weltmachtpolitik sein sollte.


Das Drohende unserer Situation aber ist: daß die bür-

gerlichen Klassen als Träger der Machtinteressen der Nation

zu verwelken scheinen und noch keine Anzeichen dafür vorhanden

sind, daß die Arbeiterschaft reif zu werden beginnt, an ihre

Stelle zu treten.


Nicht - wie diejenigen glauben, welche hypnotisiert in die

Tiefen der Gesellschaft starren, - bei den Massen liegt die Gefahr.

Nicht eine Frage nach der ökonomischen Lage der Be-

herrschten, sondern die vielmehr nach der politischen Quali-

fikation der herrschenden und aufsteigenden Klassen ist

auch der letzte Jnhalt des sozialpolitischen Problems. 


Nicht

Weltbeglückung ist der Zweck unserer sozialpolitischen Arbeit,

sondern die soziale Einigung der Nation, welche die moderne

ökonomische Entwicklung sprengte, für die schweren Kämpfe der

Zukunft. Gelänge es in der That, eine "Arbeiteraristokratie" zu

schaffen, welche Trägerin des politischen Sinnes wäre, den wir heute

an der Arbeiterbewegung vermissen, dann erst möge der Speer,

für welchen der Arm des Bürgertums noch immer nicht stark

genug zu werden scheint, auf jene breiteren Schultern abgelegt

werden. 


Bis dahin scheint es noch ein weiter Weg.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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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후히히하하호호흐흐허허

    이런 컨텐츠를 무료로 몰래 염탐해서 볼 수 있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기자들보다 깊이 있고 학자들보다 열정적인 필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에 깊이가 있고 열정이 있고 진득한 호기심과 문제의식이 있는 분을 못내 뒤지고 있었어요. 저는 맑스 베버의 대표작만을 읽었고 루카치부터 하버마스까지 역시 대표저작을 한 개씩 일독한 정도입니다. 공부할 때 생각이 나고 그때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느꼈던 기묘한 열정과 당혹감이 다시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2020.06.19 18:22 [ ADDR : EDIT/ DEL : REPLY ]
    • 지루한 글일 수 있는데,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버, 루카치 책 읽으신 거 메모도 남겨주시고 그러세요....

      2020.07.02 16:05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