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박근혜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이 주요 방송국 언론사를 철저히 장악하려고 했다. 박근혜 정권이 직접 방송국을 통제하고, 좌파척결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방송국들을 청와대의 나팔수로 전락시키려고 했고, 실제로 그랬다.

심지어 YTN에 대한 보복을 가했다. 그 이유는 2012년 대선에서 YTN 이 박근혜 당선을 예측하지 않고, 문재인 당선을 예상보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 지시로 각 방송국에 '정보경찰'을 심어놓고, 그들이 언론인들을 사찰했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말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기춘과 박근혜는 박정희의 독재헌법인 '유신헌법'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정치를 배웠다. 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정치는 '독재자 마음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정적들을 죽여버리고 신체적 정신적 타격을 가하는 중앙정보부' 독재 정치였다. 

중앙정보부가 주도 하에 시나리오와 음모를 짜고,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전쟁같은 '정치'를 김기춘과 박근혜는 선호했다.


 



[단독] 김기춘 "조용히 YTN 정리해라"...檢, 청와대·경찰 수뇌부 관여 수사 확대




Posted : 2019-05-24 04:34

앵커


정보경찰을 동원해 불법 사찰에 나선 박근혜 정부는 주요 언론사에 대해서도 이른바 '좌파 척결'을 앞세워 통제하려 했습니다.


특히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YTN을 비롯한 주요 방송사에 대해 노골적인 탄압을 지시한 정황이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검찰은 정보경찰이 청와대 요구를 넘어 전방위 사찰에 나선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전준형 기자의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지난 2013년 9월 26일,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방송계에 대한 조치와 인적 쇄신을 지시합니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 당선자를 잘못 예측한 YTN에 대해 '조용하고 단호하게 정리해나가라'는 노골적인 지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재작년 국정농단 재판에서 박준우 전 정무수석의 수첩 메모를 통해 공개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실장은 좌파 척결 등의 거친 표현을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정보경찰은 실제 YTN의 보도를 사실상 검열하고 좌편향으로 몰고 가며 민영화 문건까지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했습니다.


지상파 방송 3사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에 전담 정보경찰을 두고 무차별적으로 사찰해 약점을 캐고 다녔습니다.




언론 매체뿐 아니라 방송 보도를 심의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대해서도 신속 공정성 강화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검찰은 이런 전방위 언론 사찰의 배후로 청와대와 경찰 수뇌부를 모두 의심하고 있습니다.


주요 사안에 대해선 청와대 지시로 움직였지만 이명박 정부에 이어 관행적으로 정보 경찰을 불법 사찰에 동원한 경찰 수뇌부의 필요로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전 경찰청 정보국 관계자 : 청와대 정무수석이나 민정수석 이런 사람이 저한테 어떤 문건 생산해라 이런 건 없었던 거 같고 (청와대에) 정책제언은 했을 수가 있겠죠. 수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정보경찰에 대한 자체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경찰은 "경찰 정보국은 청와대가 요구하면 만들어주는 기계"라는 말로 불법 사찰의 책임에 선을 그었습니다.





검찰은 구속된 강신명 전 경찰청장의 구속 기한 연장을 요청하고 당시 경찰 수뇌부의 언론 사찰 지시 여부도 수사할 방침입니다.


YTN 전준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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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한 발자국”…“희귀암, 하청근로자도 조사해야”


입력 2019.05.22 (21:11)수정 2019.05.23 (09:00)뉴스 9



“이제 겨우 한 발자국”…“희귀암, 하청근로자도 조사해야” 

[앵커]


이번 정부 조사결과를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는 분이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입니다. 


황상기 씨는 KBS 취재진에게 긴 세월의 고통을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피부흑색종, 뼈관절암 같은 희귀암 7개는 정확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변진석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내 딸은 왜 숨졌나? 


10여 년의 싸움, 삼성전자는 문전박대했습니다.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에서 (발병 연관성) 인정을 하지 않는 바람에 엄청나게 큰 고통을 겪고 있었거든요."]


정부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 "돈을 벌어야 하는데 간병하느라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정이 파탄난 사람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오늘(22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 "상당히 희소식이기는 하지만 너무 어려움을 겪었고 너무 긴 세월 동안 고통을 겪은 문제라서 이거 참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조사대상 기업은 모두 6곳,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10여 년이 지나서야 보상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발병원인은 인정하지 않고 도의적 차원입니다.


나머지 기업들은 보상안조차 없습니다.


반도체 근로자 인권단체 반올림은 이번 조사를 일단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많습니다.


반도체 사업장 하청 근로자들에게도 발병이 잇따르지만 이번 조사에선 빠졌습니다.


[이종란/‘반올림’ 상임활동가/노무사 : "환기를 제대로 하고 보호구를 제대로 지급한다든지 (안전)투자 같은 게 필요한데, 하청업체로 갈수록 이런 것들이 열악해지고 안 되어 왔습니다."]


반도체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위험물질이 뭔지도 모릅니다.


피부흑색종, 뼈관절암, 이번 조사에선 7개나 되는 희귀암도 발견됐지만 정확한 역학조사는 없습니다.


[김은아/실장/산업안전보건연구원 : "아직은 (희귀암) 사례 수가 너무 부족해서 좀 더 추가적인 관찰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유미 씨처럼 혈액암으로 숨진 반도체 근로자는 정부가 파악한 것만 170명에 이릅니다.


KBS 뉴스 변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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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사망 위험 최고 3.7배”…10년 만에 공식 인정


입력 2019.05.22 (21:09)수정 2019.05.23 (09:00)뉴스 9-


“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사망 위험 최고 3.7배”…10년 만에 공식 인정 


[앵커]


지난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숨진뒤 불거진, 반도체 공장의 유해성 논란에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보건당국이 반도체 공장 노동자 20만 명을 추적조사한 결과 백혈병 등 혈액암 발병 위험이 높다는 점이 공식 확인됐습니다.


주로 20대 초반 젊은 여성들이 병을 얻었고, 혈액암 사망위험은 일반 근로자보다 최고 3.7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추적조사 착수 10년 만에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이 공식 인정된 것입니다.


정연우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황유미 씨는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3살이었습니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1년 반을 일했습니다.


[故 황유미/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2007년 : "몸에 멍이 자주 들었고요. 먹으면 토했고, 또 자주 피로했고, 어지럽고 막 그랬거든요."]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이 문제가 있다고 외쳤지만 10년 넘게 싸우도록 역부족이었습니다.


[박상옥/故 황유미 씨 어머니/2013년: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맨날 올 때마다 이렇게 싸우고 가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 주장이 사실로 입증됐습니다.


정부가 10년에 걸쳐 20만 명의 반도체 근로자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입니다.


반도체 근로자가 백혈병에 걸려 숨질 위험은 일반 근로자보다 두 배 이상 높았습니다.


또, 혈액암인 비호지킨림프종 으로 숨질 위험은 3.7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특히 반도체를 생산하고 검사하는 클린룸이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온 몸을 감싸고 먼지까지 철저히 관리하지만 수십, 수백 가지의 유해화학물질이 사용됩니다.


클린룸에선 주로 젊은 여성들이 근무하는데, 이번 조사에서도 20대 초반 여성의 발병 사례가 많았습니다.


[김은아/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업건강연구실장 : "특정한 원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작업환경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조사당국은 2010년까지 입사한 근로자들에게서 주로 발병했고 이 시기에 유해물질 노출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KBS 뉴스 정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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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무고한 시민들 20만명을 죽인 침략전쟁을 일으킨 조지 부시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무현 10주기 추모를 할 수 있는 적격인가? 3년 한국전쟁을 치른 후, 우리는 70년이 지나서도 "좌파 척결" "김정은 대변인" "평양으로 가라"는 욕설을 듣고 있다. 바로 이런 심리적 고통은 한국 전쟁이 낳은 정치적 상처다. 이라크가 입었을 상처는 이와 종류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역시  70년 후에도 한국 북한처럼 씻을 수 없는 상처들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 고통을 억지로 기어코 만들어낸 자가 바로 조지 부시이다.


-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이후, 2019년 2월까지 민간인 사망자는 18만~20만명에 달했다. 총사망자는 46만명, 제주시 인구에 해당한다. 미군은 4천 500명 사망했다.


- 2006년 8월21일, 조지 부시 발언은 충격 이상이었다. 2003년 이라크 침략 구실이 "사담 후세인이 대량학살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911 테러 배후에 사담 후세인이 있다"였다. 그런데 전쟁 개시 3년이 지나서 2006년 조지 부시는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에서는 대량학살무기 WMD가 발견되지 않았다. (* 그 다음이 더 어이없다) 물론 사담 후세인은 대량학살무기를 제조할 능력 capacity 은 있다"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미 CIA가 잘못된 정보를 자기에게 줬다는 핑계를 댔다. 실제로 사담 후세인과 911 테러와는 상관이 없었다. 


- 만약 미국이 강대국이 아니었다면, 조지 부시는 전쟁 범죄자로 국제사법재판에 넘겨져야했을 전범자이다.

46만명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모식에 아무리 같은 개띠 동갑이라지만, 하필이면 조지 부시를 초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대북 강경파로 알려진 빅터 차 Victor Cha 가 와싱턴에서 노무현과 조지 부시가 개띠이고 서로 기질이 잘 맞는다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2019년 5월 23일 한국, 노무현 10주기에 참석한 조지 부시 ) 



https://www.democracynow.org/2006/8/22/president_bush_admits_iraq_had_no


President Bush Admits Iraq Had No WMDs and 'Nothing' to Do With 9/11

STORY   AUGUST 22, 2006




9/11

On Monday, President Bush admitted that the Iraq war is “straining the psyche of our country.” But he vowed to stay the course. A reporter questioned him about why he opposed withdrawing US troops from Iraq. In his answer, Bush admitted that Iraq had no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nd had “nothing” to do with 9/11. [includes rush transcript]


President Bush, White House press conference, August 21, 2006. [Click for full transcript]

Transcript

This is a rush transcript. Copy may not be in its final form.

AMY GOODMAN: On Monday, Present Bush admitted the Iraq war is “straining the psyche of our country,” but he vowed to stay the course. A reporter questioned him about why he opposed withdrawing U.S. troops from Iraq.


REPORTER: A lot of the consequences you mentioned for pulling out seem like maybe they never would have been there if we hadn’t gone in. How do you square all of that?


PRESIDENT GEORGE W. BUSH: I square it, because — imagine a world in which you had Saddam Hussein who had the capacity to make a weapon of mass destruction, who was paying suiciders to kill innocent life, who would — who had relations with Zarqawi. Imagine what the world would be like with him in power. The idea is to try to help change the Middle East.


Now, look, I didn’t — part of the reason we went into Iraq was — the main reason we went into Iraq at the time was we thought he ha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It turns out he didn’t, but he had the capacity to make weapons of mass destruction. But I also talked about the human suffering in Iraq, and I also talked the need to advance a freedom agenda. And so my question — my answer to your question is, is that — imagine a world in which Saddam Hussein was there, stirring up even more trouble in a part of the world that had so much resentment and so much hatred that people came and killed 3,000 of our citizens.


You know, I’ve heard this theory about, you know, everything was just fine until we arrived, and then, you know, kind of that we’re going to stir up the hornet’s nest theory. It just — just doesn’t hold water, as far as I’m concerned. The terrorists attacked us and killed 3,000 of our citizens before we started the freedom agenda in the Middle East.


REPORTER: What did Iraq have to do with that?


PRESIDENT GEORGE W. BUSH: What did Iraq have to do with what?


REPORTER: The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er?


PRESIDENT GEORGE W. BUSH: Nothing, except for it’s part of — and nobody has ever suggested in this administration that Saddam Hussein ordered the attack. Iraq was a — Iraq — the lesson of September the 11th is, take threats before they fully materialize, Ken. Nobody has ever suggested that the attacks of September the 11th were ordered by Iraq.


AMY GOODMAN: President Bush at his news conference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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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의 뿌리와 518 광주, 마지막 도청 - 현재의 패배와 미래의 승리. 

-민주당 미진한 점이나 자유한국당의 교활한 부정직성과 뻔뻔한 몰염치를 탓하기 전에, 진보정당이 지난 20년간 잘 했다면, 518 유공자를 비난하는 집회가 광주 금남로 충장로에서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진보정당의 철학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뿌리를 일상생활과 정치에 깊게 넓게 키우지 못한 까닭에, 이종명 김순례 김진태 지만원이 뻔뻔하게도 광주 518은 북한군 소행이며 518 유공자들은 세금 축내는 괴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518 광주는 피를 나누고 (헌혈), 밥과 물을 나누고, 계엄군의 총탄과 곤봉, 헬기 기관총, 장갑차 공포 앞에서도 ‘지금은 우리가 패배해도, 미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에 이긴다’는 낙관적 의연함이 있었다.


마치 임진왜란과도 같았던 난리 속에서 대동정신을 발휘해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인동 양동 시장 아줌마들부터 들불야학 노동자들, 중,고,대학생들, 무명의 빈민들까지 다 같이 힘을 합쳤다.


- 시민군들이 부른 노래는 ‘민중’ ‘민주주의’ 단어가 들어간 노래가 아닌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이었다. 최정예 공수부대와 싸워야 하는 그 처절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시민군들은 정규군인들이나 불러야했을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여”를 함께 불러야 했다. 프로페셔널한 팔뚝질도 아니었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눈빛이 팔뚝질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운동가, 두 분의 사후에 영혼 결혼식 주제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졌다 )


진보정당이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노동자들과 시민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는, 정서적 교류는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 보면, 진보정당, 운동권이 80년 광주 5월의 대동정신이나 시민의 자유를 배우고 확산시키고 내실을 다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부끄럽다.


-5월 27일 지금은 도청에 남아 죽어 ‘패배하지만’, 미래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점쳤던 윤상원은 당시 30세였다. 지금 살아있다면 69세일 것이다. 진보정당 세대는 살아생전 ‘패배하지만’ 미래는 ‘빌딩 부동산과 아파트 평수, 금고 현금 크기가 아니라, 나의 사회적 역할로서 노동과 기여가 우리 사회의 행복을 결정하는 그런 민주주의의 승리’를 점칠 수 있을 것인가?


- 정치권들은 광주 사람들에게 빚졌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보상비와 국가유공자 지정은 광주 518 대동정신과 자유를 향한 투쟁의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광주 518 부상자들과 생존자들 대다수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로 정신병을 앓거나, 지금도 병상에 있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계엄군에게 너무 심하게 맞은 이후 정신병을 앓은 한 여성은 라디오로 자기 아버지 머리를 때려 숨지게 하는 그런 비극도 있었다.


5월 21일 광주시민 사살명령자 전두환은 골프치러 다니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재산이 1000억원을 축적한 사이, 광주항쟁 부상자들과 생존자들 대다수는 빈곤선에 머물러 있다.


전두환 범죄집단이 ‘사과’한다고 해서 광주 518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1997년 12월 20일 김대중 김영삼 전대통령들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은 정치적 오판이었다. 518 광주는 정치적 거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와 419 혁명 기간에 경찰 발포로 전국에서 죽거나 다친 희생자 규모는 80년 518 광주의 것과 비슷하다. 이승만 독재 하에서 발포 책임을 지고 최인규 내무부 장관과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은 사형당했고, 법무부 장관 홍진기는 사형언도를 받았다.


- 광주시민들에 대한 집단 사살을 명령한 전두환과 정호용,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419 혁명 이후 범죄자들이 처벌당한 수준 이상으로 ‘처벌’ 받아야 한다.


시민사살 명령을 내린 전두환은 아직도 광주 518은 북한군 사주를 받은 광주폭동들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한 전두환은 ‘사면’도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 아니라, 이회창 박근혜가 줄기차게 주창한 ‘법치’로써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들이다.


무장하지 않은 채 공수부대에게 맞은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혈하는 광주시민들을 향해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경우는 국가간 전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두환, 정호용, 박희도, 이상훈 등 1212 쿠데타 세력과 518학살자들이 스스로 ‘화해와 사면’을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태극기 극우파들을 앞세워 “518 유공자들이 세금을 축내는 괴물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2019년 518 기념식이 열리는 광주 금남로에서 서울 광화문 앞에서 데모를 하고 있다. 집단살인에 대한 처벌이 먼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 진보정당의 뿌리는 어디인가? 윤상원 열사 아버지 윤석동씨는 정치권을 질타했다. “자기들이 필요하면 우리 상원이를 찾고, 518을 기념하러 오고” 한숨을 내 쉰 적이 있다.


518 당시 금남로, 대인동, 충장로, 양동, 유동에서 밥을 해 나르던 아줌마들은 ‘국회의원’도, ‘유공자’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시장에서 일하고 살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나중에 518묘소에 가서 청년들이 하도 여러 번 불러서 따라 부르다보니 몇 소절 부르게 되었다고들 한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패배를 알면서도, 그 도청에 남아, 몇 백명으로 수천명의 공수부대와 헬기 장갑차와 맞서 싸우면서도 미래에 승리할 것을 예견한’ 그런 낙관적 의연함이 있는가?


정의당 이정미 대표나 심상정 의원이나 518광주 기념식장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기반성과 미래의 다짐을 발표해줬으면 한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시내와 화순, 곡성, 담양, 나주 등에서 시민군과 시위대들에게 밥을 나눠준 아줌마들 때문에, 광주항쟁은 대동정신과 시민의 자유 쟁취, 시민민주주의 실천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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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격자’ 마틴,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부친 ‘위로’

등록 :2016-05-25 15:03수정 :2016-05-25 22:34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


지난 18일 광주에서 5·18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가운데 휠체어 탄 이)씨와 5·18을 취재해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기자들’이 만났다. 오른쪽 두번째부터 윤상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 <전 볼티모어 선> 기자,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유족 제공


80년 5월 도청 인터뷰 인연

생가 방문 윤석동씨와 재회

5·18항쟁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1980)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74) <전 볼티모어 선> 기자가 지난 18일 오후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89·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씨를 만났다.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현장을 취재했던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도 동행했다.


브래들리 마틴이 윤상원의 생가를 찾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마틴은 80년 5월26일 밤 시민군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에서 윤상원을 만나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언론인이다. 그는 “그 청년의 생사가 궁금해” 항쟁 8년 뒤 처음으로 윤씨의 집을 방문했다. 마틴은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윤상원)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아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한 마틴 기자와 깊은 우정을 쌓아온 윤씨는 마틴의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943년부터 60년이 넘도록 농사 이야기와 일상을 꾸준히 기록해온 그는 아들의 죽음에 상처받은 마음을 적어 놓기도 했다. ‘상원이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88년 5월29일)’,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세월이 흐르니까 폭도란 누명을 씻고 (아들 윤상원의) 명예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1988년 5월28일)’고 썼다.


윤씨는 “마틴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서운함과 슬픔이 배어있는 표정을 지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1년여 전부터 신장투석을 받고 있는 윤씨는 이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마틴이 “키를 맞춰야겠다”며 허리를 구부리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csidx002f7007b915a9d8533cc43bff7fa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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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5314.html


아들 묘 비석이라도 만지고 싶었어”…아버지의 오월

등록 :2018-05-18 18:40수정 :2018-05-1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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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부친 윤석동(92)씨



18일 기념식 휠테어 탄 채 아들 묘지 쓰다듬어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정대하 기자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정대하 기자

하늘은 흐렸고, 묘지에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먼저 가버린 아들의 비석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이번에 오지 않으면 사랑하는 아들의 묘지를 다시 못볼 것만 같았다.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최후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숨진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를 바라 보았다. 신장 투석을 받고 있는 윤씨는 지난 해 기념식에 지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윤씨는 “올해 기념식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씨는 이날 만난 유족회 회원에게 “인자 곧 죽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아들 비석을 만져보고 싶어 왔어”라고 힘겹게 이야기했다.



윤상원 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60여 년 넘도록 써 온 농사일지. 정대하 기자

윤씨는 장남이던 아들이 세상을 뜬 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일기장처럼 써 온 농사일지에 아들이 떠난 뒤 휑한 마음을 적어두기도 했다. 윤씨는 5·18 8돌인 1988년에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세월이 흐르니까 폭도란 누명을 씻고 (아들 윤상원의) 명예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1988년 5월28일)’고 썼다. 그리고 ‘상원이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88년 5월29일)’고 적기도 했다.

윤씨는 1943년부터 60년이 넘도록 농사 이야기와 일상을 꾸준히 기록했다. 16살 때인 1943년 광산군 송정리 농업실습학교(현 송정중)에 다니며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뒤 꾸준히 생활의 느낌을 기록했다. 26권의 공책에 담긴 윤씨의 가계부와 노트는 논농사와 축산·양봉을 하며 7남매를 가르쳤던 가장의 일기장역할을 했다. 아들 윤상원 열사도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에 일상에서 느낀 생각을 써서 남겼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전 모습.



아들 윤상원은 1978년 2월 대학을 졸업하던 날 밤 속사정을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 “그래, 지금 내가 일단 발을 들여놓은 길은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도에 불과하다. 나는 꼭 맘먹은 일을 실천한 것이다.” 주택은행에 입사했던 그는 직장을 그만 두기 전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썼다. “민족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뛰어들어가 잘못됨을 바로잡는 데 조그만 저의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니 불초 소생의 뜻을 부디 용서하시고 차라리 그 길도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십시오.”

1979년 7월 아들은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그뒤 광주 광천공단의 한 공장에 고졸 학력이라고 속이고 취업을 했다. 그리고 박기순 열사가 만든 들불야학에 참여해 강학(교사)로 활동하는 등 현장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 숨졌다. 1982년 4월 두 사람의 넋풀이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5314.html#csidx62d015ac05c00c9b9d8fbd3017786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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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윤상원 열사 곁에 새겨진 총과 밥, 그 의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찾아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5698

18.05.14 15:53l최종 업데이트 18.05.14 15:53l 글: 임영열(youngim1473)편집: 김지현(diediedie)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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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도시, 빛고을 광주에 오월이 다시 왔다. '광주의 오월'은 여느 도시처럼 라일락 향기 짙어가고 산천은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빛의 도시' 답게 눈부시고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그 찬란한 푸르름 속에는 서글픔과 애잔함이 배어 있다. 


'오월 광주' 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변인, 서른 살 청년 '윤상원 열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동의어처럼 한몸으로 묶여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부채의식 때문일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의 그를 호명해 낸다.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로 향한다. 

  

광산구 임곡동, 구한말 나주와 광산지역 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산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3년 동안 11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논변(四七論辯)'으로 조선 성리학을 꽃피웠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義)와 학문(學文)'의 고장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이 무심히 흐르고 지척에 천동마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윤상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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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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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을 이름은 '샘골'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자어로 고쳐 '천동(泉洞)' 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 입구를 걸어 올라가면 오래된 시골집들 사이로 열사의 생가임을 알리는 노란 배너와 벽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는 하얀 벽돌담 에는 1974년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낸 윤상원 열사의 편지글이 소개돼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4년, 어떤 시대였던가. 서슬 시퍼렇던 '유신 독재'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스물네 살 젊은 윤상원의 깊은 고뇌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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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생가에 들어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은 2004년 겨울 화재로 소실됐다.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 5월에 '윤상원·박기순 열사 자료전시관'으로 복원했다. 열사의 호를 딴 '해파재(海波齎)'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5·18 광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사진과 일기장 등이 전시돼 있고 방명록 옆에 열사의 흉상이 놓여 있다.


마당 오른쪽 한편에 윤상원과 그의 '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오월을 상징하는 오각형 기단석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다. 수레바퀴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놨다. 밥그릇에는 '민주'라고 새겨져 있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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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옆에는 기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 때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과 5·18 항쟁 당시 열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은 입간판 형태의 기념물 들이다. 거울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있다. 자세히 보니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월 광주의 상징이자 시대의 들불, 영원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윤상원 열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8월 19일 이곳 천동 마을에서 윤석동 선생과 김인숙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이다. 장성한 후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 이곳에 있는 임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대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수 끝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연극반 동아리에서 극예술에 심취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 했던 그는 197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입사해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그 당시 은행은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된 선망의 직장이었다.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암흑시대, 돈을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동료·선·후배 동지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온다.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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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만나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 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윤상원은 '진짜 노동자'가 돼갔다. 윤상원 말고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이다. '야학(夜學)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했던 터라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라고 눈물로 적어 놓았다.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훗날 '혼령의 부부'가 된다.


그들에게 자비(慈悲)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과 함께 1980년 5월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연대한 광주의 집회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정권을 찬탈하려던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목표로 삼았다. 바로 계엄군을 내려 보낸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지상에서는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공중에서는 무장 헬기가 콩 볶듯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졌다. 두부처럼 뭉개지고 잘려 나갔다. 어린 학생, 막 결혼한 신혼부부, 임신한 여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육신에 구멍이 뚫린 채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그 푸르던 날, 가정의 달이며 이 땅에 자비를 베풀러 부처님이 오신 날,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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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이 사실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훗날 MBC는 5·18 왜곡보도에 대한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싣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디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로 한다. 밤을 새워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투사회보>만이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언론'이었다.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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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시민군에게 밀려 외각으로 퇴각한 계엄군들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청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총을 내려놓자는 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윤상원이 나섰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봄날이 끝나갈 무렵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들은 M16 소총과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군의 본거지인 도청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순간 귀를 찧는 파열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윤상원은 총을 든 채로 쓰러졌다. 어슴프레 동이 트고 핏빛으로 물든 전남 도청의 새벽을 무등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광주의 피'를 먹고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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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먼저 떠나보낸 윤상원은 그렇게 1980년 5월 27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박기순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죽고 2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에서는 특별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 윤상원도 신부 박기순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 결혼식'이다. 


이 결혼식에 헌정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썼다. 윤상원 열사의 전남대학교 후배이자 1979년도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서정성 짙은 노래로 은상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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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오월에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 길에는 '하얀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輓章)처럼 흐느끼고 있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열사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오월 영령들 앞에 선다. 물음을 던져본다. 


열사들이 꿈꾸던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 우리는 지금, 함께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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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해준 이후,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 광주 518.  아직 성대한 국가 기념식일 수 없는 이유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 범죄자들을 사면했다. 이 잘못된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 전두환 범죄집단 중, 정호용은 1000억대 자산가가 되었고, 박희도 이상훈 등 행동대장들은 극우 태극기 집회에 나가서 "좌파척결"을 외치고 있다. 
허화평 전 보안사 비서실장은  407억원 자산을 보유한 미래한국재단 대표로 있고, 허삼수는 연매출 수십억원대 광고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이 자기를 "사랑으로 돌아주신" 은인이라고 표현하며, 취재하는 뉴스타파 기자에게 "이제 재미있게 살아라. 재미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봐라"고 충고했다. 

결국 518 광주 학살자들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셈이다. 2019년 지만원, 자유한국당의 이종명, 김순혜, 김진태의 518 왜곡과 폄훼 발언 이후, 실력있는 언론인들이 518 사살명령자를 찾기 위한 취재를 하고 있어서, 그 동안 은폐된 전두환 노태우 범죄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의 방해공작 때문에 정치권과 의회는 518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해준 것에 대해 반성적으로 재평가하고, 518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한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이 광주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고, 자유한국당은 민자당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자유한국당도 광주 518 기념식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했다. 2월 10일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은 "광주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다"라고 했고, 김순례는 "518 광주 유공자들이 국민 세금을 축내는 괴물"이라고 욕했다. 이에 대한 나경원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며 이종명과 김순혜를 인정했다. 

어느 나경원이 진짜 나경원이냐? 2월의 나경원이냐? 아니면 5월의 나경원이냐? 봄 ,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변신하는 카멜레온 나경원 정치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적은 예산에도 좋은 프로그램을 만든 뉴스타파에 감사드린다. 





1979년 12월 12일 벌어진 군사반란, 이른바 12∙12사건은 전두환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전두환은 ‘빛의 고을’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공식 통계로만 220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고 3100명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1980년 광주학살은 전두환이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벌인 쿠데타라는 것이 역사적, 법적 평가다. 이미 1997년 대법원은 12·12와 5·18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그의 측근들에게 무기징역 등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그 해, 정부는 5월 18일을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지정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지 22년이 지났지만, 전두환 쿠데타의 핵심세력과 이들을 추종하는 집단은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매도하고 있다. 12·12와 5·18은 쿠데타가 아니고,  5·18 당시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왔다는 따위의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뉴스타파는 전두환 쿠데타 40년,  5·18민주화운동 39년을 맞아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의 지난 40년 행적을 추적했다.





취재진은 먼저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거나 5·18에 책임이 있는 전두환 측근 77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전두환이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1997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당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과 5·18 진압부대 대대장급 이상 간부, 그리고 광주항쟁 진압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들이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고등학교 졸업명부, 육사동문회 명부,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수첩, 검찰수사자료와 재판기록 등을 단서로 추적해 77명 중 47명의 연락처나 주소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망한 사람은 19명이었다.

행적이 확인된 47명 중 상당수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고위 관료와 정치인,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다. 장·차관이 된 사람이 14명, 공기업의 대표나 감사가 된 사람이 11명, 사업가로 성공한 인물도 9명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8명이었고,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도 7명이나 됐다. 이 중 6명은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과 그 후신인 민자당 소속이었다. 군 최고 계급인 대장에 오른 인물도 18명에 달했다. (복수 직책 거친 인물은 중복 카운트-편집자)

전두환 쿠데타 부역자 47명 중 14명 장차관 지내...국회의원도 7명

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 강남과 용산, 경기도 분당과 과천 일대의 고급 아파트나 주택에 살며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도 여럿 확인됐다. 사망한 이학봉 전 보안사 대공처장과 유학성 전 안기부장의 재산은 가족에게 고스란히 상속돼 있었다.

서울 강남과 서초, 경기 분당, 과천 일대 땅부자 된 전두환 잔당들

‘5공 설계자’로 널리 알려진 허화평 전 보안사 비서실장은 10년 넘게 미래한국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 본부를 둔 이 재단은 청와대 인근에 서울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미래한국재단의 전신은 1983년 대통령 전두환이 만든 현대사회연구소라는 이름의 관변단체였다. 설립 당시 기록을 확인해 보니, 현대사회연구소의 설립자금 94억 원은 전두환이 재벌기업 등에서 뜯어낸 돈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김영무 김앤장 설립자,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 등이 이 연구소의 이사를 지낸 사실도 드러났다. 2005년 미래한국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 연구소는 현재 407억 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허화평은 개인재산으로 서울 강남 압구정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 청와대 인근에 1000제곱미터 규모의 대저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허화평 자택 인근 주민들은 허화평의 집을 ‘전두환이 준 선물’로 알고 있었다.    

12·12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을 지냈고 허화평과 함께 ‘3허’로 불리며 5공의 실권자로 행세했던 허삼수는 현재 수십억 원대 연매출을 올리는 광고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두환 세력 중 재산이 많기로는 5·18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호용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정호용은 본인과 가족 명의로 경기도 과천에만 3채의 대저택과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고 있고, 서울 강남구·용산구·종로구, 강원도 평창 등에도 수십 건의 토지와 건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93년 국회의원이던 정호용이 신고한 93억 원대 재산목록을 토대로 추적한 결과, 정호용 일가의 부동산 자산은 현재 1000억 원대로 불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5·18 왜곡하며 소위 ‘태극기 부대’가 된 전두환 잔당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 중에는 12·12와 5·18을 왜곡, 폄훼하는 활동에 발벗고 나선 이들도 많았다. 12·12 당시 1공수여단장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불법 장악해 실형을 받은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5·18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이었던 이상훈 전 국방장관이 대표적이다.

박희도는 현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대불총)’이라는 보수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지난 2013년 대불총이 주최한 한 행사에서 이런 주장을 한 바 있다.

(광주의) 무장 폭도들은 민주화 투사가 되고 이를 진압한 국군이 반란자가 되어 훈장마저 박탈당한 처지에 놓인 상태다.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12·12 당시 1공수여단장)
대불총에는 12·12 쿠데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이었던 신윤희도 몸담고 있다.

이상훈은 소위 ‘태극기부대’의 핵심세력으로 꼽히는 애국단체총협의회의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조선일보에 ‘임을 위한 행진곡은 친북노래’라는 주장이 담긴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박희도와 신윤희, 그리고 이상훈이 활동하는 대불총과 애국단체총연협의회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인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행정안전부에서 각각 3억 원과 4억 원의 민간단체지원금을 받았다.

반성하지 않는 전두환 잔당들

뉴스타파가 지난 3개월 동안 추적해 만난 전두환 쿠데타의 핵심인물 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고 5·18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장세동도 그 중 하나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안기부장을 지내며 ‘5공 2인자’로 불리기도 했던 장세동은 현재 5∙18 직전 광주에 머물며 학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의혹을 부인했다.  

5∙18 직전 광주에 내려간 것은 정상적인 절차였다. 2군사령관 요청으로 2개 부대가 광주에 내려갔는데, 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내려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에 갔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이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5·18당시 특전사령관 작전참모)
취재 : 한상진 홍여진 박경현 강민수 강현석 강혜인
촬영 : 최형석 정형민 신영철 오준식
내레이션: 조경아
데이터 : 최윤원 김강민 
편집 : 정지성 박서영 김은 
CG :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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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2019.04.08 08:53 


육본 ‘3급 비밀문건’ 단독 입수

5월25일자 김해행 기록 첫 확인

행불자 가능성…“진상 규명을”


경향신문 입수, 5·18 관련 비밀문건 속 수송품 ‘시체’

문건 모두 오기·허위 가능성 없어…당시 공군 조사 시급

이후 발간 자료의 5월25일 수송 기록, 고의로 은폐한 듯




경향신문이 입수한 5·18 당시 공군 수송기 관련 비밀문건들. 1981년 6월 육군본부가 작성한 3급 비밀문건 ‘소요진압과 그 교훈’(왼쪽)에는 5월25일 ‘김해∼광주’ 수송기 기록 옆에 ‘시체’라고 적혀 있다. 8개월 뒤인 1982년 2월 육군본부가 편찬한 ‘계엄사’(가운데)에 실린 5월25일 수송기 기록에는 ‘김해∼광주’ 운항 기록이 삭제됐다. 공군이 1980년 5월21일부터 29일까지 작성한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오른쪽)에는 5월25일만 운송 화물 목록이 없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계엄군이 공군 수송기로 ‘시체’를 운반했다고 기록한 비밀문건이 나왔다. 광주 외부로 시신이 옮겨졌다는 기록이 담긴 군 문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군의 3급 비밀문건에는 5·18 기간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시체’를 옮긴 기록이 나온다. 이 문건은 육군본부가 5·18민주화운동 1년 뒤인 1981년 6월 ‘광주사태의 종합분석’이라는 부제로 243권만 만들었다.


문건 110쪽에는 5·18 당시 공군의 수송기 지원 현황이 ‘공수지원(수송기)’이라는 제목의 표로 작성돼 있다. 일자와 내용(수송품목), 수량, (운항)구간, 비고란으로 나눠 공군이 수송한 물품 등이 적혀 있다. 1980년 5월25일 공군 수송기의 운항구간은 3개였다. 첫 줄의 광주~서울(성남) 구간에선 11구(軀)의 환자를 후송했다고 적혀 있다. 둘째 줄의 김해~광주 구간에서는 의약품과 수리부속 7.9둔(屯·t을 의미), 서울~광주 구간에는 특수장비와 통조림 3둔(屯·t)을 수송한 것으로 기록됐다.


주목할 점은 비고란이다. 둘째 줄 ‘김해~광주’를 운항한 수송기 기록 옆에 ‘시체(屍體)’라고 적혀 있다. 공군 수송기가 김해로 나른 화물 중에 시체가 포함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5·18 당시 공군이 작성한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에 따르면 공군의 C-123수송기는 당일 김해를 출발해 광주비행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김해로 돌아갔다.


김해로 옮겨진 ‘시체’는 군인 사망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중 영남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5·18 당시 계엄군 간 오인 사격 등으로 사망한 군인 23명은 모두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성남비행장으로 옮겨졌다. 군은 임무수행 중 사망한 군인은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영현(英顯)’으로 기록하며 ‘시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5·18 연구자인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이 문건은 5·18 당시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시신을 광주 외부로 옮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군인이든, 민간인 사망자든 김해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5·18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은 현재까지 76명에 이르지만 1997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진행된 11번의 암매장 발굴에서는 단 한 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군 사망자는 ‘영현‘으로 표기···‘시체‘는 일반 시민 가능성


공군 수송기가 5·18민주화운동 기간인 1980년 5월25일 광주 외부로 ‘시체’를 운송한 기록이 확인된 육군본부 3급 비밀문건(소요진압과 그 교훈)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1981년 6월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만든 190쪽 분량 책자 형태의 이 문건은 5·18 당시 여러 군 기록을 바탕으로 “광주사태를 종합분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군 출신인 이성춘 송원대 국방경찰학과 교수는 “5·18 1년 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만든 이 문건에 실린 기록들은 모두 당시 군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잘못 기록됐거나 허위일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번 진행된 5·18 조사에서는 공군 수송기의 역할이 주목받지 못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6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은 모두 공군을 조사하지 않았다. 2018년 5·18 당시 헬기사격과 전투기 출격 대기를 조사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공군에 대해 첫 조사를 했지만 전투기 출격 대기에 조사가 집중됐다.




■ 노영기 조선대 교수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


“김해로 시체가 옮겨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사망자를 김해로 옮길 이유는 없다. 당 시 공군 관계자들을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



■ 이성춘 송원대 국방경찰학과 교수(육군 중령 출신)


“시체는 그 줄에 적힌 화물 의미하는 것. 1982년 발행 ‘계엄사’에 운항기록이 없는 것은 일부러 삭제한 것으로 봐야 한다.”



■ 정문영 전남대 5·18연구소연구원 (2018년 국방부 특조위 조사관)


“공군의 5·18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 해당 문제(시체 운송)는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다.”



■ 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2018년 국방부 특조위 조사관)


“공군 조종사들은 ‘육군서 실은 대로 날랐다’고 주장한다. 관계자는 고령이고 사망자도 많다. 서둘러 조사해야 한다.”


■ 공군기록 5월25일 화물 ‘미기재’


경향신문이 확보한 공군의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이하 5·18 상황전파)에 따르면 공군은 1980년 5월21일부터 5월29일까지 C-123, C-54, VC-54 등의 수송기를 투입해 광주의 계엄군을 지원했다. 김해와 성남(서울)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 제5전술비행단과 제35전대는 광주와 성남·김해 구간을 100차례 넘게 운항했다.


‘비광(非光)’이라는 도장이 찍힌 공군의 비밀자료인 ‘5·18 상황전파’는 날짜별 수송기 운항 시간과 구간, 수송 품목, 요청 부대 등이 자세히 기록됐다. 5월24일의 경우 ‘오전 7시20분 공수요청(육군) 고체연료·의약품, C-54, C-123, 김해~광주’로 적었다. 공군이 수송기를 지원한 5월21일부터 5월29일까지 같은 방식으로 문건이 작성됐다.


그런데 5월25일만 유일하게 수송기 운항구간만 있고 운송한 화물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공군은 이날 VC-54 수송기가 서울~광주~서울, C-123 수송기가 서울~광주~서울을 운항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C-123 수송기는 김해~광주~김해를 오갔다.


이날 공군의 수송기 운항 기록은 ‘시체’라고 적힌 육군본부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 실린 공군 수송기 지원 표와 일치한다. 하지만 육군본부 기록에 적혀 있는 운송품목이 공군 기록에는 없다.


■ ‘김해∼광주’만 사라진 육군기록


육군본부가 1982년 2월 편찬한 ‘계엄사’ 문건도 주목해야 한다. ‘시체’라고 기록한 1981년 6월 ‘소요진압과 그 교훈’을 만든 8개월 뒤 같은 육군본부가 만든 문건이고, 두 문건 모두 5·18 이후 각종 군 기록을 바탕으로 종합해 분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유독 5월25일 공군의 수송 지원 내용만 다르다.


‘계엄사’는 5·18 당시 공군의 수송기 지원을 ‘항공수송(일자별)’이라는 표로 정리했다. 표에는 5월25일 C-123 수송기가 ‘서울~광주’를 2회 운항한 것으로만 적혀 있다. 1981년 육군본부와 5·18 당시 공군의 기록에서 확인된 구간 중 ‘김해∼광주’ 구간 운항 기록이 아예 빠져 있는 것이다.


이성춘 교수는 “육군본부가 1981년 만든 문건에 ‘시체’가 적혀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후 만든 문건에서는 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공군 수송기가 수송한 ‘시체’는 군 사망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3·7·11공수, 20사단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3공수와 20사단은 수도권, 7공수는 전북, 11공수는 강원도 화천이었다. 숨진 군인을 김해로 옮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계엄군 사망자 23명은 5월25일과 5월28일 모두 성남비행장으로 옮겨졌다.


군은 또 임무 중 사망한 군인을 ‘시신’이나 ‘시체’ 등으로 적지 않고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영현(英顯)’으로 표기한다.


공군의 ‘5·18 상황전파’ 문건의 5월28일자에는 군 사망자를 수송기로 광주∼서울로 운송한 기록이 있는데 ‘영현 수송’이라고 적었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가 작성한 ‘상황일지’에도 ‘영현 11구’ 등으로 군 사망자를 기록했다.


[단독]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 광주비행장, 사실상 특전사령부


공군 수송기가 ‘시체’를 운송한 5월25일 광주비행장에는 5·18 당시 유혈진압에 앞장섰던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했던 공수부대는 잠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3공수는 광주교도소, 7·11공수는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에 머물렀다.


흩어져 있던 공수부대는 5월24일 시 외곽 차단을 20사단에 넘기고 모두 광주비행장으로 집결했다. 비행단 부단장실이 특전사령관실로 제공됐고 3명의 공수여단장들도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다. 광주비행장 전투기들이 5월21일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공수부대는 격납고를 사용했다.


공군 수송기로 ‘시체’가 옮겨졌던 5월25일 광주비행장은 사실상 특전사령부였던 셈이다.


광주비행장에 주둔하면서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구성해 5월27일 전남도청 무력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4080600065#csidx2ddd58f18e7e77e905b22552269b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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