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영화 <1987>에 대한 협소하고 자멸적인 관람평들 (1)

by 원시 2018. 1. 4.

영화 <1987>을 청와대 586 전대협 출신 찬가다, 7~8월 노동자 투쟁이 빠져있다, 87년 김대중-김영삼 낙선 노태우 당선과 같은 패배는 보여주지 않는다, 난 87년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고, 97년 IMF 이후 빈부격차가 87체제보다 더 중요하다, <1987> 영화가 민주화와 6월 항쟁에 대한 주류의 서사 영화다 등등.


이런 평가들은 역사에 대한 협소한 평가, 좌파나 사회주의임을 내세우지만 정치적으로는 자멸적인 해석이고, 비역사적인 태도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다 버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협소하고 정치적으로 자멸적인 평가들이 문재인 열광적 지지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온라인에서 ‘홍위병 같은 철의 키보드’에 대한 저항이자 카타르시스 분출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런 견해들은 정치적으로 신경쇠약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1> 영화는 영화다. <1987>은 한국영화 주제들을 다양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산다. 팝콘 먹으면서 노동자 시민들이 보는 영화 소재가 대부분 뭔가? 지난 20년간 가장 많은 영화 소재들은 ‘조폭/코메디물’, 혹은 ‘친구엄마 4’와 같은 애로물일 것이다. 


문화와 영화 소재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또 장준환 감독의 <1987>과는 다른 각도에서 “1987년”을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1980년 광주, 전태일 등을 다룬 영화들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문성근 출연한 <전태일> 영화는 보다 나오고 싶었다. ‘저 좋은 소재로 저렇게 못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1987> 영화, 보라고 널리 권장해도 좋다. 페이스북에서 영화 <1987> 그만 써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역사적 무능이자 피로감이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주역들이 안철수 지지선언하고, 민주당 문재인 정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나중에 영화 제목 “1987년 7~8월 여름 파업”이 나오면, 영화 보지 않을 것인가? 


<2> 정치적으로 좌파일수록 사회주의자일수록 역사와 대화해야 한다. 


역사학자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역사의 3가지 특성들 중에 두번째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들은 역사 행위자들과 사건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들 편에 서서 체험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진보정당을 하려면 역사가 ‘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자기가 87년에 짱돌들고 백골단과 싸웠다고 해서, 혹은 나이가 어려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전자는 무슨 진실을 다 아는 양, 후자는 ‘그건 이전 세대 개팔육, 586들 비지니스고’ 하는 태도들은 다 대중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한 무능력한 정치적 자포자기일 뿐이다.


역사가 카 (E.H Carr)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좌파고 사회주의자라면, 그리고 진보정당을 하려면,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탓을 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과 노동자들과의 정치적 대화 소재를 깔아준 <1987>을 정치적 담론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코카콜라 팔지 못하면, 펩시 콜라라도 옆에서 팔아라. 


<3>  <1987> 6월 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고,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은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경제민주화)을 위한 투쟁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적인 논리.  그래서 전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리버럴 민주당 정부 소유고,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고유한 사회주의자들의 에센스라는 비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깡통차기 딱 좋은 논리는 도대체 누가 개발했는가? 리버럴리스트들이다. 정치와 경제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해버린 것이다. 


또하나, 사회주의자라면 더 알아야할 20세기 진실이 있다. 소련이 망한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절차적 정당성’이 스탈린 개인숭배와 공산당 ‘진리독점’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에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의 ‘파괴적 혁명적 성격’을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성이 결여된 국가의 ‘강압 (폭력)’에 대한 저항은 소극적 자유, 자아실현을 위한 주체적 자기 결정권은 적극적 자유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전자보다 후자가 더 낫다는 선판단은 중지되어야 한다. 


마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 자유 혹은 민주주의’를 아주 잘 수행했고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딱 안성맞춤인 사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짧게 언급하자면, 소극적 시민자유 (negative liberty) 와 실질적 긍정적인 시민자유 (positive liberty)를 구별한 사람이 리버럴리스트 이샤아 베를린 (Isaiah Berlin)이다. 소극적 자유는 국가와 같은 외부 강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긍정적인 실질적인 자유는 자아실현에 필요한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는 주체의 자기 결정능력이다. 


그가 1958년 정도에 쓴 “두 가지 시민 자유 개념들 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소극적 시민자유와 긍정적 실질적 시민자유를 구별하지만, 이러한 양분법 패러다임 자체가 리버럴리스트 베를린의 정치철학적 기획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경제사에서 이 두가지 ‘자유’ 혹은 두 가지 민주주의들은 뗄레야 뗄 수가 없고, 그 정치적 폭발력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나온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와 내용적-실질적 민주주의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전자는 민주당 소유권,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사회주의자 소유권으로 나눈다면, 현실에서는 정치적 무능력만이 남을 것이다. 


좌파임을 자처하고, 청와대 586 386들보다, 혹은 배우 문성근보다 더 라디컬함을 내세우면서, 그 리버럴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슬라이더를 받아치는 능력을 연마하지 않고, ‘나는 패스트볼만 치는 홈런타자’임을 선언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미래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냥 삼진 아웃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4> 민주당 국회의원이나 보수당 국회의원 및 성공한 정치가된 87년 민주화 운동 세대는 극소수다. 대다수 전두환 파쇼 타도를 외친 사람들은 지금도 화이트 칼라, 공무원, 교사,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문재인 당선으로 보아, 이들 대다수는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 진보정당인 정의당 심상정을 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1987>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대협 의장 임종석 현 비서관이 대표한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거대한 장강의 흐름에서, 문재인과 그 정부 핵심들이 바로 6월 항쟁의 아이들이라고, 87년 유월항쟁에 참여했던 그 땅개미들이 시민들이 승인해 준 적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영화 <1987>이 현재 민주당 정권과 ‘청와대 386들을 위한 찬가’로 해석하는 이들은 목욕물을 버린다 해서 욕조에 들어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도청에서 전두환 계엄군 M16에 맞아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 열사와 그 광주 동료들은, ‘살인마’ 전두환이 부당하게 대한민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 부당한 절차가 300명 넘게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도청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강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고, 한국 민주주의라는 시대적 과제를 ‘자아실현’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결정한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바로 윤상원과 동료들의 죽음이다. 


소극적 자유와 긍정적/적극적 자유의 결합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