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_언어_languages/우리말_Korean_문학

남 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 방(朴時逢方) - 시인 백석 지음

by 원시 2018. 12. 4.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 방(朴時逢方)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 1948. 10>







  작자 소개


백석(白石 ; 1912∼?) 시인. 본명은 기행.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 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1936년 시집 <사슴>을 출판하였다. 1947년을 전후하여 '적막 강산' 등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석의 시는 평북 지방의 방언을 통해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백석의 시 세계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세계에 잠겨 있는 만큼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신과 모순되어 있는 상태를 심화시킨다.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고향'은 타관에서 떠도는 자의 절절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백석의 향수는 단지 고향의 풍물이나 인정 세태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소재들은 보다 깊고도 지속적인 고향의 삶의 역사와 관련을 맺으려 할 때에만 선택된다. 풍속이나 이야기로서의 설화가 시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풍속과 이야기야말로 유랑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에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랑자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워지는 대상은 가족공동체인데, 백석은 유랑의 여로 속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고 있다. <신범순, '백석의 공동체적 신화와 유랑의 의미'에서> 










  요점 정리


 


  어휘와 구절


삿: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딜옹배기: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질옹배기 

북덕불: 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손깍지베개: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를 받침. 

앙금: 물에 가라앉은 부드러운 가루. 여기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슬픔. 한탄 등이 차츰 가라 앉아 진정되는 상태를 가리킴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 어느 목수네 허름한 방 하나를 세내어 기거하게 되었다. '쥔'은 주인의 준말. '쥔을 붙이었다'는 '세를 내었다'는 뜻이다.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 나의 무력하고 나약한 삶에서 오는 슬픔과 어리석음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되새겨 보는 것이다.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더 높은 것'은 시대나 운명과 같은 초개인적이거나 초월적인 힘을 가리킨다. 요컨대 자신의 삶이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그것이 시대의 힘이든 운명의 힘이든 )에 이끌려 온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드물다는 굳고∼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의지의 표상이자 희망이다. 자신의 무기력하고 어리석은 삶에 대한 반성 끝에 시적 자아는 자신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이 '갈매나무'처럼 굳세고 정결한 것이어야 함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특별한 수사적 장치나 비유적 과정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점차 깊은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진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 이 시의 제목은 편지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주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신의주 유동에 살고 있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이 (시인;시적자아)가 보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형식의 시는, 자신의 근황과 내면을 표현하기에 적당하기때문에 일찍이 1920년대 말 임화의 '우리 옵바와 화로 '같은 작품에서도 시도된 이래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채택되었던 것으로 결코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시의 문맥으로 미루어 볼때, 시적 자아는 '박시봉'이라는 목수의 집에 임시로 세들어 살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객지에 나와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슬픔과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회한(悔恨)에 젖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운명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운명론적, 수동적인 세계관에 빠져드는 기미를 보여 주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행에 이르면 시적 자아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굳세고 깨끗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씨네'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시에는 곤궁하고 난처한 시절을 만나,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깃들일 터전을 잃은 사람의 심사와 그와 같은 난국을 벗어나려는 정신적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아마도 어느 겨울을, 아는 사람의 집에 얹혀 산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삿자리를 깐 방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의 우울한 형편을 돌아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한다. 


그것은 먼저, 공간이 비좁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여 공간이 갑갑하게 느껴진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 시의 중반부는 회한과 비탄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화자의 내면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와 같은 바닥에 이른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내면의 정돈, 상승과정이 이 시의 전개에서 백미를 이룬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불가항력인 운명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을 인정함으로써 일단 안정을 기하게 된다. 그것은 추락의 마지막 단계로서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일어섬의 전 단계로서의 방법적 체념, 곧 침잠인 것이다. 


속마음을 가라앉히면 바깥풍경이 제대로 보인다. 화자는 눈 덮인 자연을 바라보면서 눈 맞는 나무, 눈 맞는 잎새를 새롭게 주시한다. 혹독한 계절을 맞아 잎들은 시들고 앙상한 가지가 하염없이 눈을 맞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화자가 꿈꾸는 강한 삶의 태도, 스스로 기대하는 미래의 또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아 맥없는 말을 끝없이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시는, 조용히 음미하며 읽을 때 도약을 꿈꾸는 서정적 내면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해설: 이희중]


 


 참고 자료


백석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백석의 시에서 '고향'의 모습은 그 자신의 유년 시절 체험을 통해서 풍부하고 다양하게 그려진다. 


그는 어린 소년을 시적 자아로 내세우고, 시적 자아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고향과 고향 사람들과 풍습(민속)을 다양하게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재현된 백석의 '고향'은 '여우난 곬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족 간의 우애와 정이 넘치는 공동체적인 제의(祭儀)의 공간으로 나 타난다. 


뿐만아니라 그 '고향'은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들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고 있는 동화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화해와 공존의 세계를 그려 내기 위해서 그가 흔히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적인 제의인 것이다. 


따라서 백석의 시에는 이러한 제의와 관련된 풍성한 음식, 놀이, 민속 등 현대화의 과정에서 상실된 민중들의 민족적인 생활 세계의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