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나에게 '조건없는 육친의 정' '사랑'이 뭔지 보여주신 분이다. 다섯살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매년 할머니 집에서 짧게는 1개월 길게는 2개월씩 살았다. 


할머니 이름은 송기순.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은 '잠들(댁)' 거기 사람들은 잠들떡이라고 불렀다. 꼬마시절 고흥에 가면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손지요~'하고 나를 소개시켰다. '누구라고?' 동네 사람들이 한번 더 물으면 '이잉 큰아들내미 둘째 아들이요' 그러셨다. 


할머니는 문맹이다. 글자도 모르고 전화번호 숫자도 모르신다. 그래도 동강장이나 유명한 벌교장에서 물건 거래는 잘 하신다. 


5일마다 열리는 벌교장은 1일, 6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동강장이나 벌교장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할머니가 '니 목아치 (몫)다' 하면서 사들고오신 하얀 엿가락 때문이다. 


공책 페이지를 뜯어서 만든 종이 안에 밀가루가 분칠해져서 온 흰 엿이었다. 장 날에 가는 날이면 아침 일찍 갔다가 해 지기 전에 돌아오시는데, 그 날은 동네아이들과 놀다가 두세번 집을 들려보곤 했다. 혹시나 할머니가 장에서 엿을 사오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그렇게 반나절 하루종일 기다리는 건 좋은 일이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던가? 


내가 우리 할머니로부터 배운 문장,말소리 "금메 말이시~ " 이 '금메 말이시'는 쓰임새가 여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동감을 나타낼 때도 쓰이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나서 내 의견을 말할 때도 쓸 수도 있다. 


우리 할머니는 샘터에서 설거지를 하실 때 "쉬이 쉬이" 하고 소리를 내면서 그릇을 닦고 씻으셨다.


"할머니 쉬이 쉬이 소리를 내믄 밥그릇이 더 깨끗해지능가? "

이렇게 내가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나중에 고등학교 학생이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직도 쉬이 쉬이 소리를 내시요이?"

그러니까 할머니는 부엌일을 할 때면 나름대로 '노동 리듬'을 타면서 일을 하셨고, 그 소리를 내곤 했다. 


꼬마시절에는 할머니가 그릇이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 


설날이 좋았던 이유는 조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떡을 찍어먹을 수 있는 조청을 직접 만드셨다.

부엌 큰 솥에서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불을 때곤 하셨다.


"할머니 다 되얐는가?"

"아즉 멀어~ (고흥 사투리 )...... 동곽 한바퀴 하고 와라" 


그러면 또 동네 동곽에 한번 더 나가서 아이들과 놀다가, 집으로 달려오곤했다.


"다 되얐는가?"

"벌써 된다냐?" 


결국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조청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동강장을 가기 위해 때론 4 킬로미터 넘게 걸으셨고, 운이 좋아 경운기를 얻어 타고 가시기도 했다.

그 동네에 버스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직접 걸어다니시기도 했는데,

어린 손자의 흰 엿은 잊지 않으셨다.


송기순 여사, 잠들댁, 할머니의 건강을 빌면서,


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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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아래서...정치란 내 심미적 표현도 있지만, 타인의 행복에 대한 고려이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이야기가 고달프다. 정치는 외부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준비된 능력보다 더 많이 보여줘야 할 때, 더 큰 문제는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고, 자신이나, 조직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할 때이다.


언젠가는 그 허전함의 거품은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테크네이다. 공적 지혜를 모으지 못하면, 다같이 망하기 때문이다.


November 30, 2013 at 11:12pm 


최순실과 박근혜에게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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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섹스


◎ 2002/4/10(수) 16:09

  

사실, 80년 이후, 그리고 89년 세계 정치권의 변동 이후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계몽주의 사조에 대한 회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 유행할 때를

같이 해서, 우리들 정신세계에 각인될 수 있는 개념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이고,또다른 하나는, 섹스입니다.


그냥, 상징적인 단어들이지만, 10대의 사춘기를 대학입시에,

20대 초반의 열정을 '정치'라는 한정된 주제에 몰입했던

우리들에게, 아마 '죽음'과 '섹스'라는 단어들은 30대에도

40대에도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주제일 것입니다.


(*물론 영악하게도, 죽음과 섹스 이 두 단어들을 잘 이용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냥 죽음과 섹스는 문화적 코드가 아니라, 역시 심리-정치-경제-사회

적인 것이죠.)


제가 말한 이런 이야기들을 고려한다면, 신문지상에서 '386'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피상적인가, 얼마나 '정치' 그것도 좁은

정치에 갇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2000년대

학번과의 단절을 정치적으로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도.


죽음이 상징하는, 그 패배주의, 상처, 공허함, 돌아오지 않는 화살,

의미상실, 기억의 손실, 온갖 회의, 희끄무레함과 회색, 도피, 

관계의 단절, 열림과 폐색, 회전과 공전, 헛바퀴질, 의식과 무의식의 마지막 교차.



섹스가 상징하는, 그 아찔함, 고통, 또다른 허무, 갈증과 파괴, 부드러움,

나에게로 집중, 또다른 자아, 또다른 관계의 단절, 오감의 기억들, 편집,

훔쳐보기, 색다른 시도, 게이, 레스비언, 공개와 까발김, 허탈, 내 자동차,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것들은 영화에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90년 이후의 우리들의, 아니

적어도 나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고립된 섬이었습니다.

서구나 다른 국가들이 겪은 80년 경험을, 소위 운동권은 10년 안에 다

겪어야 하는, 아찔한 회전기구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로 다시 사회로, 자기들이 부정했던 사회로 그런 사회로 다시

진입하는 과정, 아마 다들 아찔했으니까. 저만의 경험은 아닐테지요.

어쩌면 제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있지요. 


그런데요, 이런 이야기들 하자면, 참 너무 개인적이라서 그럴까요.

사실 돈 버는 이야기, 그거 참 재미있는데,

돈하고 '자본'과는 다른 개념이잖아요. 

자기가 일해서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런 이야기들,

어쩌면 하루 일과중에서 가장 많이 투하하는 이야기들이

빠지니까. 카페나 술집에 가면, 다 돈 버는 이야기, 여자 이야기,

남편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쓰러져 있는 레닌 동상위에 한 여인이 걸터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하는 일이 변했으면, 변한 대로, 사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이치대로 하는 것이 '진실성'을 수반하는 것인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의 너무 무겁고, 그 이유는, 정치를

너무 좁은 의미로 사용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해요.


운동은 아픔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만드는 전차이지요.

그 아픔은 미래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 때, 그 아픔이 발견되고요.


발견하는 것이 없을 때, 아픔을 공유할 것이 없을 때, 그 전차는

멈추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픔이 없을 때, 혁명가였던 사람들도, 운동권이었던 사람들도,

다 배부른 정치꾼으로, 아니면 고급 브랜드를 즐기는 어설픈

히피로 끝나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었습니다.


죽음은 정신의 아픔이고,

섹스는 육체의 아픔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도 젊기 때문이고, 생명이 끝이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겠지요.







 (오시마 나기사 Oshima Nagisa 감독 1976년. In the realm of the sen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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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본 동물 사진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이다. 야생동물 사진작가 알란 맥페덴 (Alan McFadyen)이 찍은 물총새가 입수하는 장면이다. 이 사진 1장을 위해서 6년간 4200시간 72만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물총새와 반사된 그 물총새 '거울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사람이 바늘로 거품 표면을 찌르는 순간처럼 정밀하다. 

존경심이 든다. 아름다운 집요함과 집념이 느껴진다. 얼마나 고요한 순간이 필요했을까? 1장의 사진을 위해 바치는 공력, 진정 고요하고 정갈한 집중과 집요함이다. 


그간 나에게 부족했던 이 '순간'의 사진이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4200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특별히 노동시간을 염두해두고 일하진 않았지만, 알란 멕페덴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리고 왠지모를 해방감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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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안에 들어가기 전, 물총새 워밍업  (Kingfisher) 


사진출처: http://www.boredpanda.com/perfect-kingfisher-dive-photo-wildlife-photography-alan-mcfadyen/




물 표면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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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숨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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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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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경]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한 내 해석은 이렇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나와 우리의유한함불완전함 대한 깨달음이다. (2015.june.23.)

 

지식에 대한 경멸 풍조는 지배자들만 이롭게 한다. 지식을 백정 취급하듯이 천대하면, 동서남북 4 대신, 동서나 남북만 있는 것처럼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아주 제한된 선택지에 걸려 넘어진다. 누가 자빠지는가? 지배층이 아니라 지배받는 사람이다. 막상 저항해야 주체들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정치적 지혜가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초등학교 O, X식으로 끝난다. 이런 작전 가지고는 필패다.

 

역시 공식적인 학교 교육에서는지식 자체 즐거움을 배우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한계를 깨닫고 철창 탈출 해방 욕구가 강렬했을지라도. 제한된 지식을절대 으로 외우고, O,X 빨리 돌진하는 능력이 IQ 높은 행위이고 합리적 똑똑한 학생이라고 배웠다. 현재 한국 대학의 위기도, 근본적으로 자본의 공략에 무너지는 이유도, 지식 형성 과정에 대한 강조와 실천이 약하기 때문이다.

 

지식 자체를 알고 깨달아 나가는과정 대한, 특히 시행착오, 실패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사회적 지위와자기 인정 투쟁대상이고 생존 등급 판정이었기 때문에, ‘ 알아줘’ ‘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목숨 걸고 절대성을 부여한다.

사실 지식에 대한 경멸은, 우리 인간 자체의지적 호기심 대한 비하 그건 아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학문 강조하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지적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사랑을 모를 없다. 세상 지구 어느 누구보다도 학문 강조 가치관을 습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좌파건 우파건지식 경멸 빠져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 자본과 지식 자격증을 확보하고 있는 지배자들이 아주 좋아라쾌재 부르는 사회 현상이다. 장기적인 노예 재생산 과정이다.

 

물론 가끔가다가알아야 면장을 한다 이야기도 하지만, 이건 어쩌다 에피소드에 불과하고, 자기 편리할대로 가져다가 쓰거나, 그냥지식 수단화 뿐일 때가 많다. 마치 무슨 지식인성명서처럼.

 

지식 경멸 현상이 특히 좌파 사이에 퍼지는 , 결국 지배자들 좋은 일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지배자들과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선택적인’ ‘제한적인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현행 법률 ( 3 개입법 )정당하고 동시에 합법이라는 것이랄지, 노동자의 임금 크기는 노동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점에서 결정된다 랄지,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이 이후에 발전한다랄지 . 지배자들이 만들어 놓은지식 절대 참으로 고정불변의 지식으로 외우다가, 결국 지식의 유한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비판 의식까지도 버리게 된다.

 

문자나 언어, 수학, 음악, 미술, 영화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반항, 변혁, 혁명, 선거에 뛰어들 때는자기가 알고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그들의 학력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지식이다. 민중이건 시민이건 민초건 그들이 말하고 퍼뜨리는지식역시 불완전하고 유한하다. 지식을 경멸하는 습관은 민중의 의식 자체를 폄하하는 버릇이나 허무주의적 인식론으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이 멘붕이 오면, 정신 넋나간 소리를 하거나, 말년 김응용 감독처럼니들이 야구를 알아?” 회고적 향수적 태도로 일관하거나나도 해봐서 아는데인식론으로 끝나게 된다. 지배자들 좋은 시키는 반동적인 작태들이다.예수의 사랑론, 인식론은 사랑하는 주체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에 대한 명료한 깨달음이다.

사랑만큼 좋은 어디있겠는가? 흐린 오후에도 소낙비에도 눈이 와도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 워낙 그게 힘들어서 탈이다.

 




성경 구절 번역 - NJ원시


내가 사나이답게 때론 천사처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기지 않은 내 말은 시끄러운 징소리나 양철판 깨지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난 사람을 감동시키는 연설하는 재주를 가졌을지도 모르고, 아는 것도 많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삼라만상의 법칙을 깨달을 수도 있다.


나는 또한 산도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자신감도 가졌을 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난 내가 소유한 그 어떤 것도 버릴 수도 있고, 또 포기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내 생명을 포기하고 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내가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행동이다.


사랑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다. 사랑은 시기질투가 아니고 잘난 체 하는 것도 오만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예의없이 무례한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며, 성질 급하게 화내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잘못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악’과 어울려 희희락락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에 기뻐하는 것이다. 사랑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신념, 희망, 그리고 인내는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세상에는 감동을 주는 (설교나 연설) 메시지도 있지만 그것들은 전부 다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범하게 말을 잘 하는 능력을 지녔지만, 그 말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세상에는 아는 것도 참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지식 역시 유한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 습득 능력, 감동적인 연설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재주 역시 다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부분적인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내가 했던 말 감정 생각은 모두 다 미숙한 어린 아이의 말, 감정, 생각이었다. 난 이제 성인이 되었고 이제 더 이상 미숙했던 어린 시절처럼 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거울 속에 비친 희미한 이미지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얼굴을 서로 마주 대하듯이 명료하게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체가 아니라 단지 어느 한 부분일 뿐이다. 나중에 그 지식은 전체가 될 것이다. 마치 신이 나를 완벽하게 아는 것처럼. 그 날이 올 때까지 신념, 희망,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가 우리들 곁에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Good News New testament (the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Corinthians 13 Love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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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굽기, 그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저 형언하기 힘들 갈색류 고구마 칼라에 반했다. 마리 앙뜨와네뜨도 소화해내기 힘든 은은한 색채이다. 일전에 욕심만 가득 가득, 그러니까 굽는 시간을 아끼고, 구운 다음 껍질을 벗겨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굽기 전에 고구마 껍질을 벗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껍질의 소중함을 모르는 고구마에 대한 무지였다. 맛도 덜하고 쉽게 타버렸다.

사람의 피부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게 고구마의 껍질같다. 고구마의 껍질이 위대하다. 그 얇은 막인데 고온에서 버티고 동시에 고구마 구운 맛을 드높인다. 
그러니까 수분 문제이다.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구우면, '수분'이 다 날아가버린다. 이 껍질이 1시간 굽는 시간 동안에 '수분' 증발을 막고, 오히려 가마솥이나 압력솥뚜껑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어린시절 할아버지 집에서 숯으로 고구마를 구워먹던 '3동(三冬)의 겨울' 시절에는 당연히 껍질을 벗기지 않았다.

남들이 다 아는 것인데, 뒤늦게 다시 발견하는 이 "껍질"의 위대한 기능들에 탄복하다. 껍질 벗길 때 그 껍질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존경심을 불어넣어 껍질을 벗기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껍질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그 각양각색의 얼굴 표정들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껍질은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뭔가 목표가 획일화되고 쏠리고 몰리고. 껍질과 껍데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는 밤이다.

나의 고구마 굽기의 도전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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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n Mcfadyen  알렌 맥파드엔,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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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March 23 · Edited ·

도둑과 혈투를 벌인 염소, "우리 염소는 끝까지 버텼다"


어제 1400원 주고 헌 책방에서 <동물 백과 사진첩>을 하나 샀다. 어린시절 우리집 '염소'를 만났다. 반가웠다. 이름이 "자아넨" (스위스 자아넨 골짜기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염소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젖모양새까지 정말 우리집 염소랑 똑같다. 그런데 후회가 된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왜 우리집 염소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강아지는 다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가? 그냥 같이 산 게 아니라, 순번을 정해가며 집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개울과 산 밑에 염소를 데려다 놓고 해가 지기 전에 데려오고 그랬는데도. 그냥 이름이 '우리집 염소'였다.


그러니까 우린 염소 젖을 먹고 자랐다. 옆에 자료를 보니, 1년에 자아넨 염소께서 3000리터 젖을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염소 젖은 판매된 우유보다 훨씬 진하고 마치 콩을 갈아섞어 놓은 듯한 달콤함이 있다. 약간 데워서 소금을 조금 넣어서 마셨다.


난 염소 젖을 짜보진 못했다. 부친과 당시 나보다 키가 큰 형은 자랑스럽게 따뜻한 수건으로 염소 젖을 닦은 다음에 신묘한 손가락으로 젖을 짜냈다. 내가 조금 만질라치면 '우리집 염소'는 뒷발로 차고 움직이고 '메메메'거리고 난리가 아니었다. '가만 있어, 나도 해보자' 그러면 더 '메메메이앵앵'거리며 한바퀴돌면서 시위를 하곤 했다. 어린마음에 자존심 상했지만, 염소 젖을 얻어 먹는 것으로 그 나름 울분을 삼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우리집 염소'가 사라졌다. 도둑 맞은 것이었다. 담벼락은 있지만, 대문도 잠그지 않고 자던 집이었다. 그날따라 강아지들은 도대체 뭘 지킨거냐?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도둑이었던 것 같다.


'우리집 염소'는 그 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염소를 앞산에 풀 먹이러 가는 것 때문에, '니가 가라 형이 가라 동생이 가라' 싸우던 것을 자책하고 있었다.

'우리집 염소'를 도둑맞은지, 이틀 후인가 삼일째 되던 날, 동네 아저씨인지 우리 삼촌인지, 우리집과 앞산 사이 논두렁 밑 논에서 우리 집 '염소'를 발견했다. 그런데 '우리 집 염소'는 죽은 채 시신으로 돌아왔다.


어른들과 삼촌들 말로는, 논두렁에서 '우리집염소'가 끝까지 저항을 하며 도둑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자국이 있다고 했고, 추측으로는, 이 도둑이 '우리집 염소'랑 새벽 내내 그 논두렁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까지 저항을 하자, '우리집 염소'를 칼로 찔러 죽이고 도주한 것 같다고 했다.


'우리집 염소'는 그후 동네 이웃들에게 '염소 고기'로 분배되었다. 우리집에도 남은 고기가 왔지만, 우리들은 먹지 않았다. '누가 그랬을까? 진짜 그 도둑놈 새끼가 미웠다.' 사실 '우리집 염소'는 엄청 고집이 세다. 산에서 집으로 데려올 때도, 자기가 먹고 싶은 풀이 있으면, 손에 잡은 밧줄을 엄청 세게 자기 쪽으로 당겨서, 내 손바닥에 밧줄 자국이 벌겋게 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당시 체중은 20~25kg 사이 소년인데, 이 염소가 제 멋대로 고개를 돌리면 막 끌려갈 정도였으니까.


'우리집 염소'는 정말 예민한 동물이다. 그리고 영리하다. 그 여름 날 밤, 그런데, '우리집 염소'는 우리가 다 잠든 사이, 평소 자기가 가던 그 길목 논두렁에서 도둑놈 새끼랑 혈투를 벌이다가, 그렇게 숭고하게 우리들에게 '영혼'을 남기고 갔다.


우리 형제들과 가족들의 친구, 그 이름이 자아넨 염소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게되었다. '일하는 염소'......

'다 먹었냐? 그럼 집에 가자' 니가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해 질녘 너 데리고 집에 오는 것은 참 고역이었지만, 너와 함께 걸어가던 논길, 산길, 개울 길은 그렇게 우리들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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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선생님이 마르크스의  <자본:정치경제학 비판>을 번역하고 대학 교재로 강의를 했던 그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1980년~1990년대  그 <자본> 책은 번역서 이상이었다. 사람들 가치관을 흔들어놨고 그 초점을 이동시켰다.  한국에서 직업 차별을 당하고, 장시간 잔업과 철야 노동을 하는데도 그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던 이름없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시민’으로 복권시켰고, 박정희 말대로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깔았던 한국시민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서울 구로공단 한 회사 굴뚝에 "내가 흘린 땀방울, 조국 근대화 초석이 된다"라고 써져 있었다)


 당시 한강의 기적의 상징 수도 서울,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1주일에 평균 50~60시간 넘게 일했다.  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공장과 회사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수행 선생의 <자본> 강의와 연구는, 이러한 한국 노동자들이 자기 생존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과 회사의 이윤을 위한 “잉여노동시간” 비율 문제가 공정한가 사회정의 원칙인가를 따져묻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사회적 신분 차별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누구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고, ‘무엇을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 저항할 때, 마르크스의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이라는 비판틀은 노동자가 ‘조국 근대화의 진정한 초석’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한국 노동자들이 외친 것은 단순한 ‘임금을 올려달라’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서 사농공상이라는 뿌리깊은 신분차별 타파 선언이었고, 불공정한 노동계약관계 법을 폐지하고, 궁극적으로는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을 자기들 스스로 결정할 정치적 권한을 외친 것이다. 


마르크스 <자본>은  자본주의를 인류가 만들어낸 사회진화의 산물이고,  봉건 신분제보다 더 우월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사회경제정치제도일 뿐이다. 누군가가 이 ‘미성숙한’ ‘불공정한’ 자본주의를 바꿔야 한다. 이러한 인류 보편사 과정에서, 한국은1948년 이후 남한에서 20세기 정치적 이념들 중 한 축을 담당한 사회주의가 불법화되면서, 그 자본주의 대안운동과 담론은 단절되었다. 김수행 선생의 <자본> 완간 번역은 이러한 강제로 단절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과 대안 제시를 다시 본궤도에 올리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2015년 한국 자본주의는 97년 IMF 긴축 통치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경쟁’ ‘시민 내전 전쟁터’로 돌변했다.  마르크스 <자본>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사회적 현상들, 즉 세계최고 고학력, 노동소득의 종말과 빌딩 땅 등 자산소득 계층의 대물림, 선진자본주의화 속에 강고하게 자리잡은 ‘봉건제적 신분 차별화’, 가처분소득이 감소하는데 동네 치킨집 자영업은 증가하는 비합리적인 경쟁의 구조화, 자산소득(빌딩,땅소유주)계층을 위한 사적 서비스업종 증가, 시중 400조이라는 자본파업 현상 등을 새로운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시민권을 상실해버린, 노동시간 주권을 상실해버린 청년을 비롯한 노동 안과 바깥 사람들의 정치적 시민권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과제 완수가  15년 넘게 준비하고, 6년 넘게 땀흘려 마르크스 <자본 1, 2,3>을 번역한 김수행 선생님, 그리고 20년 넘게 제자들을 친조카, 동생들처럼, 친구처럼 허물없이 도와준 멘토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도 서둘러 가셨습니까? 마르크스가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그러나 끝내 밟지 못했던 미국 땅, 조금 더 천천히 둘러보시고 미국 자본주의 특성에 대해서 공부해보자고 하셔야죠?  2008년 미국 금융공황 이후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당신들 말이야, 뭐하고 있어? 그렇게 공부해서 언제 다 할라고” 카랑카랑한 죽비가 그립습니다. 김수행 선생님이 즐겨 썼던,  “당신들 말이야~”, 이 말은 스스로 ‘주체’와 ‘주인’ 이 되어 달라는 선생님식 주문인데, 선생님 걸어온 길보다 더 좋은 조건에 있는데도, 그 성과는 미미한 이 현주소가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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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26일. 경향신문 기사 중에서. 

난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선배들과 동료들과 함께 움직였다. 

사람은 때가 되어야 만나는 것 같다. 가까운 거리건 먼 거리건 간에 '마음'이 중요하다.

92년 당시 구로공단 하루 급료가 16000원 ~ 19000원 정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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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서 만나야할 사람이 있는데 이제 만나지 못한다. 서울에서 이메일을 받고도, 뉴스에도 보도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힘들다. 미국 유타 모압, 여기서 3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어쩌면 김수행 선생님만큼이나 그간 고생하시고, 또 미완의 제자들을 거둬주신 사모님의 충격과 상심은 얼마나 클지 헤아릴 수가 없다.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나오는 마르크스는 서슬 시퍼런 인정없는 혁명가였다. 나도 우리도 그렇게 배우고 외우고 시험도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가르치는 김수행 선생님은 어떤 측면에서는 김제동보다 더 시민들에게 학생들에게 친근한 동네 아저씨같은 분이다. 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이 있다면, 김수행 선생님은 학교와 거리의 ‘마경(마르크스 경제학)’ 아저씨이다.


보통 선생 그러면 학생 입장에서는 늘 ‘좋은 면’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김수행 선생님은 흔치 않게, 좋은 이야기도 나쁜 궂긴 이야기도 콩나물 국밥을 같이 먹으면서 나눌 수 있는 분이다. 제자치고 어디 못난 면을 선생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선생님의 이론은 '깊은‘ 단순함과 명료성이고, 일상은 온갖 궂은 일들 도우미이다. 그야말로 일하는 사람들 삶의 에너지 그 자체이다. 만약 한국 시민들이 피부로 우러나오는 김수행 선생님의 친근함을 알게 된다면, 마르크스에 대한 편견이나, 반공이데올로기는 사라질 것이다.


“자기가 정말 마음 속으로 느껴서, 좋아서 해야한다꼬~오”


유럽,아시아,라틴 아메리카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55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 한국에서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단 4년 만에 응축적으로 발생했다. 1989년 김수행 선생님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직접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89년 중국 천안문 사건,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91년 소련 해체가 연달아 일어났고, 그 배후로 ‘마르크스’가 지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영국에서 보낸 김수행 선생님에게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란 어느 정도 이미 예측된 것이었고,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강의하시다 말고 이런 말을 하셨다. “소련이 망했다꼬 운동을 그만두거나 전향했다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건 변명이라꼬, ~ 자본주의는 그렇게 쉽게 망하는 게 아니야, ” 그리고 나서 학생들을 쭈욱 둘러보시더니 “운동은, 자기가 정말 마음 속으로 느껴서어~, 좋아서 해야한다꼬, 그래야 오래할 수 있다꼬, 잘들 한번 생각해보라꼬”


잘은 아니지만, 선생 말씀대로 ‘생각’해보고 있는 사이, 그 검던 머리도 백발이 되었고, 이제 대구 억양의 영어도 노래도 들을 수 없게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죄송할 따름이다. ‘선생님의 그 부지런함 절반만 따라했어도 지금보다 나았을텐데’ 이런 자책이 든다. 김수행 우산 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우 비를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 태풍에 그냥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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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검정색이었을 때는, 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선생과 학생 사이에 벽이 높았을까? 그냥 막 찾아가서 물어봐도 되었을 것을. 당시 우리들의 한계였다. 지적 정치적 행동의 한계. 좁은 시야. 몇 년이 지나서야, 97년 IMF 외환위기를 맞고, 시민내전을 치르고, 사람들이 '자본'의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때, 다시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이 순간 애도하지도 못하는 이 불량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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